공회 회고담 1 - 88년 탈퇴 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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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창역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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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5 00:00
책으로 출간 된 자료여서 실명 그대로 공개합니다.
감정적인 비판보다 차분하게 여러 면으로 살펴 보면 좋겠습니다. 현재 공회의 90 % 이상 교회와 교인들은 1988년 산창교회의 탈퇴와 그 이후 걸어 간 길을 걷고 있습니다. 다양한 의견은 좋으나 실명이 거론 되고 있으므로 '표현'에 조심하시고, 우리에 대해 비판한 자료가 원색 그대로 접하기 어려운데 모처럼 소중한 자료를 받게 되었으니 공회 노선을 다시 살피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 운영자 올림
■ 간증
‘최고의 복’ - 회고록, 박은혜 권사님
25년 전에 산창교회 처음 왔을 때는 아기를 둘 가진 아기 엄마였고 아무 철도 없는 스물 일곱 살 나이였습니다. 그 때는 이만기 목사님이 계셨고 제가 왔을 때 있던 성도들의 수는 약 20명 정도였습니다.
서울 사직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조그마한 공간으로 된 교회에 들어섰을 때 정말 이상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교회는 교회겠지’ 하고 다녔으나 차츰차츰 교회를 들어 설 때면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하여 주위를 살필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 아래층이 동경회관이라는 술집이었고 교회간판은 초라하고 술집 간판은 색깔이 진하여 눈에 확 들어오는데 누가 볼 때 술집에 간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유경숙 집사는 그 당시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불러서 ‘너 어젯밤에 어디 갔었냐’고 했으니 그것은 삼일예배 가는 것을 보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 올라가는 계단이 술집계단으로 1층까지 장식이 되어 잇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예배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수요일 밤 집회 때는 마이크 노래 소리, 쿵쿵거리는 악기 소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겁니다.
이러한 장소와 분위기에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약 2년이 지났을 즈음에 새로운 목사님을 맞이한답시고 철없는 성도들 고병우, 백숙이, 신선애와 함께 도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키가 크고 인물이 좋으신 젊은 신사가 쓰윽 들어오시더니 이곳 저곳을 살피시더군요. 그리고 짐을 올려놓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모님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심한 듯한 표정으로 앉으시는 겁니다. 짐이 다 올려지고 나니 점심시간이 넘었지요. 철없는 저희들은 목사님의 식사대접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딱딱한 공회 분위기 속에 젖은 타성 때문인지 반가워 할 줄도 모르고 그저 맹종 외에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저희들에게 점심식사를 했느냐고 물으시길래 ‘안 먹었습니다.’라고 했더니 자장면을 시켜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배가 고파서 그냥 먹었지요.
참! 기가 찰 일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째 그리 철이 없었는지 심히 부끄럽기만 합니다. 목사님은 예배실 뒤쪽에 있는 부엌을 보시더니 ‘여기 싱크대 하나 사 놓고 이 위에 찬장을 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더니 당장에 밖에 나가서 시켜서 설치를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 목사님은 많이 다르구나 단번에 처리가 이루어지는구나’ 놀랍게 느꼈습니다.
교회는 좁고 부엌은 연탄이다 보니 연탄가스 냄새가 늘 났습니다. 그로 인해 목사님과 식구들이 연탄 가스에 취해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 사정은 빚이 있었고 재정도 심히 빈약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첫 설교는 막혔던 하수구가 확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속이 시원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될 것 같았고 소망과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그후, 목사님이 오신지 두 달쯤 되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서울 잠실동교회 백태영 목사님을 강사로 집회를 했는데 울산 우인목 장로님이 아파트 한 채를 헌물 하셨는데 그 돈은 경우 400만원 정도였으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목사님이 부채를 구하여서 양덕 타워맨션 맞은 편 개울가에 아담한 흰 건물의 교회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 때 몇 명 안 되는 교인들도 얼마 안 되는 헌금이지만 자기 분수 이상으로 헌금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예정인 여학생이 30만원을 작정하였으며 그것은 1년 내내 갚아 나갈 계획이었는데 그 당시 처녀들의 월급은 10만원 미만이었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교회를 지으면서 무리하였고 대장염으로 죽을 고비도 당하였던 것 같고 많은 고생도 하셨습니다. 아마 그때 목사님이 많이 늙으셨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다시피 하셨으니 교회에 대한 목사님의 믿음과 용기 그리고 집념과 사랑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후 1 - 2 년이 지났을까? 교인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가득 차고, 자리가 없어 옥상에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중고등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면 좁아서 들어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좁으니 무덥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교회를 지어야 된다는 뜻을 품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면서 많을 곳을 살피시다가 오늘의 교회 위치가 공터로 남은 것을 보고 선택하여 전부 빚으로 구입하였던 것입니다.
이 건물을 신축하기에는 2년이란 기간이 걸렸습니다. 문제는 주민들의 반대였습니다. 주민들의 반대 이유는 집 값이 떨어지고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착공 예배를 드릴 때 여기저기 큰 녹음기에 염불 테이프를 틀어 놓았고 물을 끼얹겠다고 물통과 다라이에 물과 바가지가 즐비했고 주민들은 성도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소리치거나 떠밀고 예배를 방해하고 예배를 다 마친 후에는 난장판이 되었고 경찰이 동원되었습니다.
지하 굴착공사를 하기 위하여 포그레인이 들어오는 날에는 이웃사람들이 비상종을 치면서 모여 들었고, 내가 설던 집에 살던 아주머니 김창희씨는 포크레인 밑에 들어 눕고 기절을 해버립니다.
이웃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 가며 교회를 짓느냐고 책임추궁 했고 목사님은 그 큰 사람을 병원에 입원시키러 가고 우리는 거짓인줄 알지만 한편 걱정도 되었습니다.
이웃 주민들과 마찰은 이루다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경찰관들도 수 차례 동원되었으나 그런 불법 행위를 지켜만 보고 있었고 누가 폭행하는가만 관망하였고 전혀 막아주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법이란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신문기사에도 몇 차례 기사화 되었습니다. 그들과 우리들은 집을 방문하거나 반상회와 동사무소, 경찰서, 시청, 신문사, 변호사, 법원 등 몰려 다니면서 투쟁했고 그때 우리들은 주민들을 볼 때마다 맹수를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 마을 주민인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갈 대나 시장엘 가도 사람들만 몇 명이 모여 있으면 온통 이 동네 주민들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상황이 얼마나 무섭고 악독하고 무지막지했는지 모릅니다. 목사님을 욕하고 삿대질하고 그러다가도 한편 목사님에게 호소하거나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도 싸움 중에 오줌을 싸기도 하고 밤잠을 못 자면서 고민했다고 하였으며 피차간에 큰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습니다.
법원에 제기한 공사반대 가처분 신청에서 우리가 승소하여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여름에 하려던 공사를 한 겨울에 가서야 하게 되어 또한 손해도 많았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모든 면으로 약한 교회였지만 하나님이 함게 하심으로 그 어려웠던 일들이 하나하나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교회를 짓기 위해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흙이나 나무 치우는 일, 못도 빼고, 벽돌과 시멘트 올리기, 모래 나르기, 지하실 시멘트 긁어내기, 종 탑을 올릴 때 도르래 식 콘크리트 올리기 등 너무나 일이 많았습니다. 땅에 큰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먹으면서 일했습니다.
그 뿐 아닐 또한 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있었던 성도들은 알고 있는 줄 압니다. 바로 공회 탈퇴 문제였습니다. 큰 다툼 끝에 많은 교인이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저도 처음 신앙생활을 공회에서 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그때 공회사람들은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구원을 못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공회 사람들은 최고로 잘 믿고 다른 교회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건설구원은 못 받는 것으로 그렇게 사상인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타 교회와 교류도 없었고 성가대, 전도회, 분과위원회 활동과 다른 교회들과 종교서적들을 접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속화되고 타락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교회가 공회 사상에서 해방되기까지는 목사님이 얼마나 많고 오랜 고민과 기도, 교훈과 눈물이 있었겠습니까. 그 결과로 지금의 우리는 이러한 자유와 은혜와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교회 설립26주년인 되는 이 시점에 돌이켜 보면 어린양과 같은 성도로서는 목자와 같은 목사님 잘 만나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느껴집니다. 목사님은 어리고 철없는 양떼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시고 ‘항상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성경공부 소책자나 주제별 성경연구, 크로스웨이, 조직신학, 사역훈련, 다락방 공부, 찬양과 암송,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 등으로 성숙한 신앙, 성장하는 성도로 이끌어 왔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우리교회 강단에서 설교하였고 우리도 여러기관에 가서 선교와 봉사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목사님의 노고였고, 혼자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게 하셨음을 저희들은 분명히 보았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아무 것도 안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 있게 하셨고 다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까지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큰신 은혜와 목사님의 교회를 아끼시는 그 애정과 성도들의 응답이 지금의 산창교회를 이웠음을 새삼 고백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우리들에게 어떠한 시련이 온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앙망하는 믿음으로 하나 되어 전진을 계속하여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는 참 된 교회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였고 앞으로 크신 은혜를 믿습니다. 할렐루야!
2003년 2월 3일 박은혜 권사
(산창교회 26년사, 1977-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