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양성원..그 복원을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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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양성원을 상기하며_ <혼잣말로 생각해봄입니다.>
여태껏 해결 부족 문제에 부닥쳐 긴 세월 황무함에 휩싸여 있었다. 일찍이 총 공회적 확정으로 세워진 게 맞을진대, (분분한 틈새로) 마치 무엇에 맹렬히 표적되어 속박되고 버려짐같이 되어져 본래 아름다움 사라진지가 오래였다.
근데, 근래 들어 그 기능의 회복을 기하고자 따스한 빛살아래 (안팎의) 새 단장에 분주한 모습이다. (그 경영이 끊어진 이유를 차치하고서) 모처럼 활력 찬 움직임이 밝은 미래사위한 디딤돌의 모양새를 봄만 같아 매우 긍정적으로 이해해봄이다.
(개인적인) 나름의 그 이유로서_
애초 그곳이 사람의 지정의로 세웠거나 그 지위가(격이) 각기 가기위한 과정으로 구성되었거나 있어도 없어도 그만으로 세워졌던 게 아닐진대,
오늘날도 여전 하나님 영광위한 발견인 셈이며, 이러한 움직임이 주님의 선을 땀으로 쌓고자하는 초점(중심)으로 복음전파위한 적극적 모색의 한 표출로 여겨보기 때문이다.
“세상적 가치관은 하나님의 가치관과 충돌함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가치관에 매여 살도록 힘써야한다.<인용>”. 당시 하나님 영광위해 경영코자 기쁜 출발이었던 게 명확할 진대는, 오늘날 그 여실의 실행에 역행(거스름)이 결코 아니어야함이라 이해되기 때문이다.
(레위기에서 보듯)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은 헌신(헌물)이 무슨 소용 있겠는지..,당시 온 교회적으로 쌓은 선(善)을 주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고 이에 거룩한 헌신으로의 작정이 정녕 맞는다면 주님께서 그 인정해 주심을 전제로 함이 아니겠는지..
근데 그간 제반현상이 어두움의 지속이었던 게 분명하면 이 현상의 줄곧 진행이 주님의 칭찬하심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고 이 미해결을 줄곧 다음세대로 즐겁게 넘길 사안도 결코 아닌 것이며 더구나 (이를) 전혀 목격하지도 않은 세대는 (이에) 하등의 잘못도 없음이라 여겨보기 때문이다.
지금껏 아예 그곳에서의 경영이 끊기고 황무한 듯 멍에꺾임 같음은 애초의 동기와 목적에 분명히 반(反)하며 이의 결말이 즐거운 표적(表迹)이라 볼 수 없으며 최후수단의 최적가치로서 귀결(됨)이라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애초 그곳이 주님의 소유 삼으시고 경영케 하심이 엄연히 증거 됨이 정녕 맞는다면, 자라나는 후대들이 이를 하나님의 지식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바, 이에 이의로서 다른 이유나 근거를 찾기가 매우 희박함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무론 양쪽 간 그 이유에 상당한 근거가 있을지나) 지금껏 (그곳에선) 복음전파위한 경영이 멈춰졌는바 당시 하나님 영광위한 (총공회적) 사업따른 대의와 규범과 그 이행에 대한 (공동된) 약속이 아예 뒤틀리고 부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사역자양성위해 순전한 우물 격으로 예비 되고 주안에서 대대로 물려줄 선한 긍지와 자랑으로 견고히 세워졌던 게 맞음이면, 주님면전에서의 진실 된 언약을 (인위로) 거스를 수가 없음이 매우 온당함이라 여겨보기 때문이다.당시 절실히 필요를 따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자랑코자 (선파 하고자) 기초를 놓으며 기쁜 출발이었던 게 맞는다면, 온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분명 애초의 언약과 그 걸음을 기억하시며, 따라서 ‘복된 장마 비로 가지를 내고 열매 맺음처럼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기 위한 거듭된 모색이 시급히 요청됨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생산이 멈춰졌던 일련의 과정이 비록 연단의 은혜라 할지라도 무산된 통합의 회복으로 그 근실운영이 비견될 수 없을 만큼 큰 가치인지에 대한 냉철한 (영적)분별이 급히 요청됨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교회의 신실한 개혁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되게 함이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는다면, 주님의 능력으로 덮음 받아 참된 교회공동체의 성숙위한 개혁신앙완전(성)의 공동(共動)운동으로 일행전진이어야 함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은혜를 한낱 감정의 만족으로 치부하려드는) 인간의 이름만 난무하는 곳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없음이다. 자신을(자아를) 내세우는 곳엔 하나님과 무관한 곳이 되고 이로 대립과 분열과 갈등과 다툼..이 있게 마련이며 하나님의 셈하심(심판)을 결코 비켜갈(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행여 여태껏 현상이 (성경에 나타난) 분쟁의 모습과 동질(동격)인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근심해봄이다. 그럴 경우, 이럼이 지속되면 이 틈에 마귀가 스며들어 시험을 받을까를 염려해야함이며 또한 (한 울타리에 속한) 온 교회가 진리에 거하며 진정한 평안과 안심에 머물고 있음이라 단언할 수 있는지..하나님의 은혜가 약해지면 시험이 오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자칫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음이라 배웠기에 (한편으로) 이에 생각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곳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여전 드러내어져야 온당하다 여겨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낱 양성원 건물자체를 두고 염려하심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염려하시고 계심이라 여겨봄입니다.
(비록 논쟁할 수 있으나) 주님의 허락 없이하는 분쟁의 표시는 (장차 주님께서 셈하실 적에) 주님의 칭찬을 받음에 역행인 것이며, 주님의 선한 일의 흥왕과 성취 위한 정체성 (본질적 특성과 지속적인 공유)에 심대한 부정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방치와 경영의 두면 중, 대의와 명분과 가치적으로 볼 적에 여태 현상이 애초에 견주어 미흡이 분명 맞으면 후대에 반면거울로 여전히 두고 볼 성질(특성)이 결코 아닌 것이며, 이 어두움지속이 온 지체의 참 평안과 안심이 결코 아닐진대 마땅히 뒤덮인 어두움을 급속히 걷어내야 하며 이를 위해 (온 지체가) 거룩한 근심 지녀야만할 공통과제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난제가 크다 하여도 당시 목회자양성위한 총공회의 중추거점맥락으로 출발했음과 (총공회적) 지대한 가치와 목표지향점이 하나였던 게 명확할진대 단연 즐거운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음이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주님께서 이미 주시려 기다리심에 그 받음이 주님의 몸 된 지체들에 달려 있음이라 보며, 등불이 꺼지지 않는 명실 공히 산실로서의 빛난 성취위한 결정적 열쇠를 찾는 적극적인 모색이 절실히 요청됨이라 여겨봄입니다.
한 지붕아래에 거하면서도 하나님께 따로(모여) 예배함은 반쪽예배라 근심해봄입니다. 서로지체 됨이기에 함께 예배하며 또한 후손들이 이를 보며 그 기쁨 된 교제 속에서 아름답게 건강히 자라나며 한 지체된 동질(성)에 매여 살아가야함입니다.
‘산 제물로..’,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의 심정으로, 주님 때문에 (서로) 선대하면 ‘주의 오른 손’이 능력으로 덮어 주시지 않겠는지,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김’같이 주님 앞에 은혜와 감사의 고백으로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 버려야만하지 않겠는지,
비록 견해차 클지라도 심원으로 해석 같이하며 이로 혼미한 역사를 분명히 세울 적에 온 지체의 진정한 승리됨이며 온 지체의 마음에 참 평안과 안심됨이라 여겨집니다.
예수님만이 온 교회와 공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심판은 오직 주님께 있으시니 (난제를) 주님께 다 맡기며 다만 주님의 선한사업위한 선(善)을 도와줄 관용과 용서와 화평을 (온 지체가) 굳게 함이면 시원한 해결의 실마리를 바로 찾을 수 있음이라 여겨짐입니다.
속히, 흡족함 회복으로 주의 길 예비와 화평과 평안의 만족 넘쳐나며,속히, 즐거운 공통분모를 기어이 세워 주님의 마음 시원케 해드리며, 막대기들이 하나 되듯 무너짐 일으켜 주님께 받은 칭찬을 머리에 이고 (온 지체가) 기쁨과 감격이 충만할 날 속히 이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말씀했으며 진정한 회복은 내 의로 일어날 수 없으며, (온 지체가) 갈급히 주님만 붙들며 지혜의 충족으로 ‘새 부대를 준비’를 준비하도록 적극 끌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총 공회의 (품)격이라 생각해봄입니다.
주님, 우리를 생각하시어 복을 주시옵소서..아멘
(그곳이) 단순히 어떤 자비량의 산물이 아닌 것이며 사람에게 드려진 것도 결코 아니다. 애초 총공회적인 합일로서 대대로 주님위해 그 설립(목적)을 견지하고자했음이다.
그 포도원의 존재이유를 전체적으로 확정하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고자 당시 주님과의 (복음위한) 약속으로 받은 게 맞음이면, (오늘날) 그 운영을 해야 하는지..안해야하는지의 문제도 결코 아닌 것이며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려 함에 그 순종을 전제로 (주님으로부터) 즐겨 받은 것이라 여겨봄이다.
당시 모두의 입에는 진리전파위한 순수한 목적에 즐거운 공감이었을 터이며 주님의 뜻을 신실히 이루고자한 기쁜 기별된 응답으로 (주님 앞에) 순수히 바쳐지고 받은 게 맞는다면,
여태껏 현상이 ‘예수생명전파’코자한 (주님과의) 애초의 약속을 파한 것이 되며 따라서 (문제의 원인이) 분명코 사람 편에 있음이다.
복음위해 세워졌기에 당연 그 포도원이 주님께서 명하신 것으로밖에 달리 이해할 수가 없음이다. 처음규례의 견고함과 그 순수한 목적이 매우 거치게 되고 (그곳에서의) 생산이 속박됨은 정도를 벗어남이며 그 헐어진 결말이 주님보다 앞서감에 따른 (주님의 뜻에) 불순종을 의미함인지(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조밀해짐이다.
주님의 교회에 성령이 떠나가시고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겨버리시면 다 헛것 됨인데 긴 세월 (그곳이) 아예 과거 속에 얽매여 무경영의 적막에 빠져있던 어둠의 현상인 게 정녕 ‘주의 영’으로의 성장의 결말인지에 대해 강한 의문이 생김이다.
애초에 (복음을) 뿌리고자했음이면 인내로서 그 거둠의 목적에 장애가 없어야함인데 (긴 세월) 각기의 견해(주장?)에 멈춘 나머지 정작 주님위한 생산이 전혀 없으며, 이(복음사역)에 같은 마음, 즉, 애초 하나님의 뜻을 최고로 여김을 여실히 함께 품지 못함과 지체 간 기쁨과 평강이 깨뜨려짐에 대해
(온 지체가) 주님면전에서 떨어야만 (회개의 눈물로 채워야)하지 않겠는지..에 대해 생각이 조밀해지며 근심해봄이다.
복음위해 주님께 기도로 응답된 주님과의 규례임이 정녕 맞으면 그 지키지(따르지) 않음이 (사람위주의) 편벽(치우침)된 것이며. 여태 무용지물 된 심각한 현상에 있어 이미 세상의 조롱과 비소와 교계에 수군거림을 어떤 근거로 피하겠으며, (부모가 서로 다투면 자식은 양쪽 모두에 이득을 볼 수 없듯) 분란의 지속은 피차 망하는 법이라 했음인데 정녕 온 지체에 참 평안이 있음인지..
(한낱 기우인지..) 이러다 (크게 또는 작은 울타리에 속한) 온 지체가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경고(징계)하심을 당하지 않겠는지..를 성경에 일곱교회 상기하며 (한편으로) 심각히 거듭 근심해봄이다.
이해관계가 (계속)부딪히면 자칫 옳고 그름은 사라져버리게 마련이다. 아무리 옳아도 이익이 되면 (자칫 사람본위의) 이익을 따라가는 실수를 범하기가 쉽다. 이 현상이 정녕 피차간 어떠한 (성경적인) 옳음에서 연유되(었)고 그 결말인지에 대해 생각해봄이다.
여태 현상이 어떤 기쁨의 모양으로 하늘에 사무침 되겠으며 주님 앞에 어떤 선함으로 기억하심 되겠음인지, 처음의 목적과 규례가 어두움에 맹렬히 던져진바 되고 말씀으로 둘린 띠가 풀어져 하나님의 영광이 뒤덮여 있(었)던 게 분명할 진대는 (온 공회적으로) 하나님의 주권하심에 실로 피동 된 의로운 경험이겠는지 생각해봄이다.
이틈에 마귀가 가만히 스며들어 둥지를 틀고 있(었)지는 않(았)는지...이로 (주님의 지체들이) 시험에 들까를 심히 염려하고 깊게 관찰해야함이며 (결말로) 상당한 이견의 대립 있어도 복음전파위한 대의와 명분과 목적에 하등의 장애가 있어선 결단코 안 됨이라 여겨봄이다.
온 교회의 공동기도와 그 응답과 연보로 (헌신되어) 영광의 주님께서 거할 처소로 세워졌으며 주님께로부터 위임 받았음이 분명하다면 당연 부흥위한 일로전진이어야 함이며 그 이룸 통해 주님께 영광되게 함이 매우 지당함이다.
복음위해 주님께로부터 그 온전한 운영을 (달란트 격으로) 위임받았을 뿐 (그것이) 분명코 주님의 것이 맞을진대, 이 현상이 양쪽의 이견만 돋보이고 성경말씀이 더 크게 부각되지 아니한 듯 모습 아니라면 그 근거 어떠함인지를 적극이해하고 싶음이다.
아무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할 만한 그런 좋은 교회나 단체라 해도 내부에 갈등이 생기면 어느 한쪽도 이기는 게 없고 피차 멸망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음이다. 흔히 듣게 되는바 (본의가 아니어도) 서로 머리가 되고자할 적엔 곧 분열로 가기 쉽다. 그릇이 깨지면 그 안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화목의 그릇이 깨어진 데에 무엇을 담겠는지.. (자신 부끄럽지만) 한가지로 말하자면 자신이(자아가) 죽지 못하여 갈라지고 하나가 안 되는 것이라 늘 배워왔음이다.
애초의 동기와 목적대로면 이 (문제)해결에 있어 상호이해의 양보로 서로의 권리가 (견해나 주장이) 복음전파의 대의에 전적 흡수되어 애초언약에 대한 견지의 기별에 맞추게 되면 금방 (난제가) 해결되리란 소망을 가져봄이다.
주님께서는 갈라짐을 예수의 보혈로 하나(한 덩어리)되게 하심이며, 총공회적인 시대적 사업에 있어 전체가 ‘하나’됨이어야 마땅함이라 여기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높이는 공동의 기별로 주님께 충성된 청지기로의 본래의 면모보고 싶음이 양떼들의 전적인 공감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늘 보고 계심이며(시139:1), 장차의 해결에 있어 마치 상품처럼 거래적으로 치부되어지지 않으며 온 공회적으로 본래 목적된 원줄기의 균형적 복원위해 향기 뿜어낼 획기적 도모가 절실히 필요 됨이며,
나름 총공회의 품격과 위상과 영적인 권위 있기에 (그곳에서) 새 미래사를 활짝 펼침에 있어 (온 지체가) 성경으로 모여 치료하실 하나님을 먼저 구하도록(대하16:9), 온 교역자께서 적극 끌어주시기를 (개인적으로) 거듭 간절히 소망해봄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감찰하시고 다 세고계심일진대 이러히 하나님의 영광이 벗기운 듯 형상은 흑암에 대한 두려움의 결여(상실)에 연유됨인지에 대한 분별이 오늘날 (온 지체에) 절실히 요구됨이다.
(각기의 심중에 분명 근거와 그 까닭이 있겠으나) 개인적인 그 이유로서_
여태껏 현상과 애초를 견주어, 어느 면이 그 (애초세운) 대의와 목적에 부합되며 우위우선이 됨인지..
(그곳이) ‘주님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고자 선한기업으로 예비 된 터’임이 분명 맞으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표징 됨이며, (그곳이) 하나님의 의를 순전히 이루기 위해 총공회적으로 도모되고 주님께로 받은 은혜의 소산이라 여겨봄이다.
당초 정한 것이 무익한 노고로 허사의 경영을 목적한 게 분명코 아니며, 주님의 백성의 구원위한 터이고 세상을 복음으로 진동시켜 주님의 백성 된 자를 장중에 모으시고자하심을 받들어 세웠고 (사명으로) 받았음이다.
(맞는다면) 그간의 의사 상충으로 애초에 공통된 아름다운 일심모사가 (마치 광야로 유리하듯) 굽어져 그 획기적 행보와 규례가 온통 무산 되고 (총공회적으로) 소명 받았던 분외(分外)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고 어두움에 싸여있음이다.
주님의 산업에 권위와 충실이 끊어지게 되면 그 분깃대로 값을 내는 대신, 마치 황폐하여 잡풀만 나고 광야같이 황무함 되기 마련이다. 그간 주님 앞에 경영으로 올릴 소산이 전혀 없(었)기에 공동된 애초의 목적이 온통 함몰된 느낌이다.
당시 설립이 진리에 따른 교훈과 그 증거로서 으뜸 된 기업으로 정한 게 분명하면, 그 생명 샘의 역할을 도시 경(輕)히 여긴 셈이며, 주님위한 손(일)이 깡그리 풀어져 온 공회적 행사의 즐거운 모사와 열성과 화평 된 빛의 보배가 아예 상실된 형국이다.
이는, (본의가 아니어도) 주님위한 애초의 본질과 목적이 아예 퇴색되고 크게 요동된 형상이다. 긴 세월 본래의 공동된 의를 이룸이 온통 정체됨은 여전 올릴 주님위한 기업의 소산을 업신(하찮이) 여김 되며, 이 결말은 총공회가 (주님위해) 그곳에 세워진 도리를 즐겨하지 않음같이 비쳐짐이다.
애초의 소망이 온 공회(지체)의 입에 확실히 둔 게 맞으면, 여태껏 (주님위한 그 경영이) 마치 보자기에 싸인 듯, 나무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힘 당한 듯, 애초에 (총공회적으로) 받은 주님의 풍성 된 구속에 단단히 매여 있지 않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지속이
‘어떠하게 온 양떼의 눈에 (애초대로의) 자긍’이라 변증되겠음인지..
설령, 양방의 기준이 주님과 사람 앞에 허물이 없고 양방의 눈과 의향과 걸음이 주님을 결코 떠나지 않았음이라하여도, 그 결말로선 지금껏 그곳에서 주님께 올릴 소산이 전혀 없음이다.
그러기에, 그간 오랜 양방의 주장이(견해가) 애초의 본질적인 통합성(연합)의 뿌리에 접하여 의논 되었음인지,
아울러 애초 그 일을 두고 주님의 면전에서 실로 어떻게 서로 보증했음인지를 살필 계제로 여겨봄이다.
(나무는) 뿌리와 줄기를 근간으로 결실함이다. 근데 뿌리 채 뽑히게 되면 나무가 말라 죽는다.
지금껏 형상이 애초 터에 세운 공동된 대의의 근간이 완전히 뽑혀있음이다.
따라서,
(이 심각한 문제해결위해) 각기의 지향(의향)점으로 다른 한쪽을 이해(또는 승복) 시키려함보다,
애당초의 전체적 본질성과 형상에 부각된 통일성, 즉, 성경적 변증으로의 연합된 공통분모를 찾음이 매우 절실함이라 여겨봄이다.
(미련 떠는 생각인지 모르나)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말씀했는데, 설령, 한쪽이 승리한다한들 주안에서 어떤 순수한 감격이겠으며 참 승리이겠음인지..
(성경에서 보듯) 응당, 서로지체인데 (주님의 몸 된) 온 교회의 승리이어야만 진정한 승리됨이라 분명히 여겨봄이다.
주님께서 (타작마당에 곡식을 모으듯 하시려) 온 교회에 위탁(의뢰)하셨음이 분명 맞는다면 주님의 기업이 (불가항력적인 경우 아닐진대) 분란에서도 마땅히 애초가 보전돼야함이다.
애초에 받은 보응에 주목하지 못하여 본래의 정로가 혼동되고 생산이 핍절되면 (주님위한) 선한 아름다움이 기록되지 못하며, 이럴진대 정녕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심이 결단코 아닐뿐더러 (온 공회적으로) 내내 곤고함의 올무에 매여 있게 될 뿐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바른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말씀했다. 상처가 깊어지면 악취가 나고 썩기 마련이며 오랜 상충으로 인해 골이 깊어진 상처를 마냥 두고서 정녕 온 지체(울타리)의 경내에 참 평안이 있음인지에 생각이 (거듭) 깊어짐이다.
깊은 샘물 길어 내기위해 실로 출발했음인데 그곳에서 즐거움소리와 왕래가 없고 도리어 분쟁으로 광야같이 업신여기듯 황무하여, 안으로는 온 지체가 환난에 잡힘 되고, 밖으로 세상이 기롱하며 수군거리며 조소하며 말거리가 되는 업신여김에 대한 어떠한 빌미도 단연 불식해야함이다.
이 문제해결에 있어 (수평적이 아닌) 수직적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게 되면 간단히 해결됨이라 여겨봄이다. 주님께서는 우편에서 일 하시(려)는데 다른 방향에서 찾음이면 본래적 주님의 일을 (제대로) 찾기가 어렵기 마련이다.
그 명쾌한 답을 찾음에 있어 어떤 각도로 잡고 푸느냐에 따라 그 양상이 크게 달라짐이라 여겨봄이다.
이 곳(애초 양성원)을 산실로 목회자양성위한 폭넓은 대책과 저변확대 등,
총공회적으로 정립(확립)될 사안이 잔뜩 쌓여있음이라 여겨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주님의 양떼위해 총공회적으로 깊게 연구된 풍부한 자원을 기반 한,
전(全) 교회의 체계적인 양육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주님 양떼위한 목양(양육)에 요긴 된, 분야별 통합연구와 그 따른 편찬이 절실히 요긴 됩니다.
총공회적인 이러한 체계적인 교재와 그 시행이 여태 보이지 않음은 총공회의 속성과 권위로나 역사적으로 (보아) 결코 걸맞지 않음이라 여겨집니다.
그 대충적 (개인) 생각으로서,
◐ 양성원의 활력 찬 통합운영과 총공회적인 국내외 선교센터의 설립 필요성 /
(단기적으로) 우선 합의 가능한 과목부터 각 공회를 망라한 통합수업과 아울러, 보다 크게 승격시킨 통합된 규모의 정립위한 건설적인 전체적 숙의가 절실히 요긴 됨.
또한, 현시점에서 바라본 국내 및 나아가 세계선교에 대한 방향설정위한 연구 및 그 실천적인 (파송 자) 양성위한 방안(방책) 강구의 필요성이 제기 됨.
_온 교회의 신앙성장과 동력위한 도모로서,
◐ ‘평생통신교육신학원’ 개설의 필요성 /
각 교회에 전담전도인의 일꾼을 양성하며, (개 교회는 물론) 여러 사회기관과 단체대상의 전문전도자로 헌신케 함. (교회중직 피 택시 일정한 혜택부여).
◐ 체계적인 ‘성경교재’의 발간과 통신성경교육원(대학)의 개설 필요성 /
<인용, 예> 신,구약성경의 핵심교훈, 성경연구입문, 기독교의 기본교리, 성경의 역사와 지리..등등의 개론을 정립하여 성경을 배우며, (성경을) 보다 체계적으로 배우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함양과 신앙성숙을 도모함.
◐ 체계적인 ‘성경교리교재’의 발간과 통신교리교육원(대학)의 개설 필요성 /
성경에 의거된 (총공회 노선의) 기존 교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집대성하며 또한, 일목요연으로 축소된 초,중,고교 용의 기본적 기독교교리와 요리문답집의 발간과 계절별 성경학교에서 교재화.
◐ 교회학교 교사위한 ‘교사교육지침서’의 발간과 교사양성과정으로 통신교사교육원(대학)의 개설 필요성 /
후대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함에 있어 이론과 실제적으로 필요 되는 전공과목을 설정함.
(인용, 예) 신약개설, 구약요론, 교사론, 교육심리, 성경공부의 이론과 실제, 생활지도, 교육론, 기독교교리, 어린이예배와 설교, 교회음악, 학급운영, 교회사, 주교행정, 주교교육활동, 전도와 양육 상담, 실제적인 교사의 경건생활, 어린이특별활동, 계절학교운영, 교회교육과 가정교육..등.
<위 통신교육의 시행에 있어서, 통신교육을 통한 교재독서, 자학학습, 공개강좌..등의 전문교육을 통하여 진실한 교회일꾼 양성교육을 도모함.
각 분야별 교재로 자습하며 출제의 답을 작성하여 본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제출하고 지도 받음.
인터넷의 수단을 적극 활용하여 청강하며, 직접 지역순회세미나가(특강이) 필요시엔 전국 각 지역(지방)의 교회당이나 각 공회의 양성원 등, 지정된 장소를 편리로 택하여 수강.>
◐ 교회학교를 위한 ‘단계공과 및 계절 성경학교 교재’의 발간 필요성 /
(부연하여) 현, 어느 교회에선, 오늘에 주교예배설교의 본문과 내용을 (년도가) 아주 한정된 [백영희목사설교공과모음집]에서만 뽑는바, 이는 과거 일정기간에 가르친 극히 국한된 것이며, 따라서
적극 적용은 하되, 오늘날 양떼위한 목양위해 (소위) 바톤을 이어받은 오늘에 목회자께서 직접 준비하시어 영의 양식을 (직접으로) 먹여주실 분명한 책무가 있으심임.
단계공과는, 몇 개년단위로 큰 주제 설정하여 성경전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게 함이며, 이 공과를 때에 따라 직접설교에 적용할 수도 있게 될뿐더러 집에서도 배우고 자습할 수 있게 함.
계절 성경학교 교재는, 주일에 모여 성경을 깊게 차분히 배우기란 시간적 한계가 있기에,
그 보충적으로 여름과 겨울방학을 적극 활용하여 신앙교육을 체계적으로 적극 강화할 필요가 제기됨. (어느 교회에선 이때에 줄곧, 성경쓰기만하다 마치는 경우를 과거에 보았는바 이는 다양한 가르침에 비효율적이라 생각됨.)
이 경우, 보다 충실기하고자 (가르칠) 교재내용을 사전 습득키 위한 교사강습이 필요 되며 이를 개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교육함.
◐ [백영희목회연구소]를 일원화하며 서적관의 통합관리와 운영, 총공회의 근간인 신학사조 등..의 제반통합확립과, 그 삶의 실증 속에 담긴 권위(모범적 사례)를 현대교회의 목회자 상으로 거울삼고자 주제 설정하여 그 공동적 연구 /
기타,
◐ 찬송가와 건전한 복음송의 보완 및 총공회적 통일 기하기 위한 작업 /
◐ 강단설교(또는 세미나강의) 교류 및 개절별 각 공회집회를 윤번형식으로 일원화의 연구 /
이 사업위해 분야별 위원회의 조직과 상근간사직원 두며,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길 간절히 바라는 온 교회의 의지로서, 매월기본 천원(아이는 자유로)의 자원연보를 고려해봄직도..
이는 비록 작은 시작일지나 나중 큰 불씨를 일으킬 수도 있음이라 생각됨.
(그곳에서) 통합운영일 적엔 주님의 사업이 크게 확대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 (양성원장의) 직분이 개 교회 목회에 결코 못지않게 매우 큰 소명인 셈인바,
명실상부 위대한 산실로서 그 중임이(중대한 임무가) 매우 지대함이라 생각합니다.
총공회 내에 이러한 중차대한 직무를 감당할 분들이 많으신바 그 즐거운 추대가 가능함이라 여겨봄입니다.
인생의 해가 더 저물기 전, 주님위해 한 생애 오롯이 품으신 풍부한 지식과 고매하신 경험을 믿음의 후대들 위해 기꺼이 다 (쏟아)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의 불로 급속히 밝은 등불 켜질 날, 심히 고대해봄입니다.
전적 동의합니다. 이 곳의 저희는 1982년부터 44년째 20대로 시작하고 60대까지 생을 다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이 곳에 모든 것을 공개한 자료를 보신 분들은 공감하실 듯합니다. 그래서 각 공회들에게 또 1990년대부터 이 노선을 연구하겠다는 총공회 내 모든 기관들을 이 곳이 소개도 해드리면서 협력을 요청했으나 무조건 거부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금도 각 공회는 이 노선을 연구한다 하면서 극비에 붙이고 있습니다.
(◐ 양성원의 통합운영, 국내외 선교센터의 설립)
이 곳의 연구 부장은 1987년부터 양성원의 교수였습니다. 현재 서부교회 서영호 목사님과 둘만 남았습니다. 또 각 공회에는 국내외 신학 과정을 통해 Ph.D를 받은 학자들이 많습니다. 또 이 곳에는 이 노선만 연구한 공회 전문가도 있습니다. 원어 과목은 통합 강의가 가능하고 공회 별 입장이 다를 수 있는 과목은 양성원 건물에 강의 시간을 따로 편제하면 됩니다. 같은 과목을 2-3가지 개설하면 더욱 낫습니다. 비교도 되고 또 선택의 폭도 제공하며 세월 속에 정착이 됩니다.
국내 선교도 이주민이나 다양한 장애자들을 위해 역량을 모아야 하고, 또 해외 선교도 공회 별로 특화 되어 함께 추진하고 지원 협력도 가능합니다. 지금 부공2가 필리핀에 영어 양성원을 진행 중인데 타 공회에 완벽한 영어 양성원 강사가 있고 여러 번 추천을 했지만 정치적 문제로 아예 외면 되는 상황은 선교라기 보다 반선교적인 선교 활동이라고 보입니다. 일반 교인들이 조목조목 짚어 가며 나서지 않고 교역자들에게 맡겨 놓으면 그들의 경력이나 이해 관계로 끝이 날 듯합니다.
(◐ 평생통신교육신학원)
백 목사님도 일제 말기에 신앙 출발하며 우편을 통한 통신 교육을 했고 지금까지 각 공회가 사용하는 '연경'이 바로 그 방법입니다. 이제는 인터넷과 유튜브의 동영상 강좌가 가능합니다. 각 공회는 그들의 양성원 강좌가 세계적으로 전파되어야 한다며 역사적 시대적 사명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저히 극비에 붙이고 있습니다. 윗글로 안타까워 하는 교인들이 소속 공회에 직접 호소를 해야 해결이 됩니다. 백성의 침묵은 왕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공회에는 목회자급 교인, 목사급 집사, 목사를 가르칠 교수급 교인이 유독 많습니다. 부공2가 60곳, 대구공회가 80곳, 나머지는 불과 10곳 20곳이 전부인데, 이제 나뉜 세월이 30년이고 서로 같으면서도 뻔한 상황에서 내부가 부실하다 하여 평양처럼 극비에 붙이니 더욱 피폐해 집니다. 목회자 200명의 자녀가 수백 명인데 성인이 되면 거의 타지로 보내면서 타 교단으로 빠져 나가도록 방치를 하면서 공회 소속을 찾지도 않게 합니다. 조금만 추스려 보면 인재들이 많습니다.
(◐ 체계적인 ‘성경교재’/ 통신성경교육 개설)
지금 각 공회에는 실제로 신앙도 실력도 모두 갖춘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 공회 내부의 강의에서도 철저히 봉쇄를 하여 길을 막아 놓고 있습니다. 부공2와 대구공회에는 적어도 10여명씩의 소장파 학자들이 있습니다. 연세는 지금 절정으로 좋으나 강의 경력을 막아 놓아서 소장파로 분류됩니다. 참담하고 기막힌 일입니다. 부공2에만 해도 훌륭한 학자들이 많으나 교권을 가진 무학의 지도부가 기회를 모두 막고 있습니다. 시기요 질투요 자기 교권 때문이 아닐까요?
(◐ ‘성경교리교재’ 교리교육)
교리 연구 자체를 극비에 붙이는 교단? 사이비나 하는 행동입니다. 각 공회가 현재까지 연구해 놓은 것만 해도 많습니다. 공개를 해야 비교도 하고 차이점은 토론이 가능합니다. 소속 공회에게 먼저 필요성을 제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만방에 전한다며 시작을 해놓고 극비에 붙이는 이유, 심지어 타 공회가 발간을 하면 소송을 해서 전과자를 만드는 공회들을 향해 교인들이 이의를 제기해야 가능합니다. 평양과 이란이 스스로 돌아 서겠습니까? 군중이 침묵하면 함께 고생해야 합니다.
(◐ 교회학교 교사 교육/ 양성과정)
세계 최대 주일학교를 그렇게 강조했고 국내의 각 교단과 유명 교회들이 수천 회나 방문을 해서 배웠다는 서부교회 주일학교에게 우선 이런 필요성을 제기하도록 내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학자가 계신다는데 곧 발표할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이 90년대부터였습니다.
(◐ [백영희목회연구소]를 일원화)
서로 교류, 서로 방문, 서로 제공, 서로 통신이라도 하자며 30년을 부탁해도 답변 자체가 없습니다. 서부교회 돈으로 설립한 부산 연구소를 서부교인들이 찾아 가서 부탁을 하면 좋겠습니다. 공회들마다 기둥 같은 목회자들이 국내외 유명한 신학을 했고 학위를 제대로 갖춘 분들이 많은데 학문을 했다면 윗글을 읽으며 자책 자탄을 해야 하고 회개를 해야 하나 손바닥에 작은 이권 하나 때문에 움츠리고 앉아서 골아 죽고 있는 상황입니다.
(◐ 찬송가/ 복음송의 보완)
공회들이 공회 찬송 외의 찬송을 각 교회의 주일 예배까지 다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회 찬송의 보완과 조정이 필요한데, 명분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만사 이러다 보니 변변치 않은 이 곳이 여러 면으로 노력은 하지만 모두가 보시기에 우습고 안스럽습니다. 윗글을 적은 분과 각 공회에 같은 심정을 가진 분들이 소속 교회와 공회를 향해 내부에서 소리를 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공회 울타리는 휴전선보다 더 철통이 되어 확성기 방송만 가능한 정도입니다.
(◐ 강단 교류/ 집회 윤번)
1년에 한번 집회하던 노곡동마저 불도저로 비밀리에 일방적으로 철거를 했습니다. 좋은 시설이 있으니 오시라 해도 무슨 죄가 많은지 오지도 않습니다. 또 가겠다면 대문을 용접하고 막고 있습니다. 밖에서 들어 가는 것은 '통신'마저 거부하니 안에서 호소하면 좋겠습니다. 목회자란, 교인이 말하면 먹힙니다. 요즘 같이 교인이 줄어 들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제안이 다 옳다 할 수는 없고, 그러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나, 이런 제안을 놓고 우선 순위도 의논하고 또 대략의 의견도 일단 모아나 봤으면 합니다. 역사 속에서 사라진 재건교회가 지금 각 공회들 모습입니다. 각 공회와 교회의 내부에서 제기 되지 않고는 함께 공멸할 듯합니다. 이 곳에 적은 글은 모두가 몰래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내부에서 제기 되지 않으면 한 발도 나가기 어렵습니다.
간절함이 같고
절절이 애타는 심정이 같은데
이제 조금만 더 지나가면 아주 달라 질 수밖에 없는 마지막 기회를 우리가 보내고 있습니다.
주변에, 소속 교회에, 소속 공회에, 여러 면으로 노력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애초, 주님면전에서 뭇 심령의 소원으로 신청되어 (주님께로부터) 받은 부요의 분깃을 (함께) 즐겁게 품고서 그 의의 문을 활짝 펼쳤음이다.
그 설립이, ‘몸이 하나이고 성령이 하나’이듯, ‘한 소망 안에 부르심 입어 성령으로 하나’된 (공동) 명제로서 동질의 소명으로 함께 굳건히 지켜 행하고자 했음이다.
(분명할 진대는)
실로 주님의 은혜이며 존귀한 엄위로 자랑할 만큼 획기적 출발인 셈이다.
그런데, ‘주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심’에 따른 ‘하나’로서 애초 그 부르심 입은 부름에 합당한 행보와 율례를 동일 소망으로 힘써 지켜내지 못하고 (그 동일로) 손을 편 즐거운 모사와 그 열성이 깡그리 사라졌음이다.
그 이름대로 생명 샘의 역할해내고자 세워졌음일진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애초 기업’이 긴 세월 아예 경시 되고 있음이다.
당초의 의롭고 순전함의 지속과 즐거운 소리가 끊이지 않아야함인데
마치 어두운 가운데 휩싸여 눈이 멀고 갈 곳을 알지 못하며 낯선 객이 된 듯하여
마귀에게 틈을 주고 이웃에게 즐거움을 받는 결말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때가 언제이고..싸움 아직도 안 끝났나..이럴 바엔 왜 지었지..돈도 많은 가보지..) 수군거리는 세상의 비소가 귀에 쟁쟁 울림인듯하다.
안으로 온 공동체가 환난에 잡힘 되고, 밖으론 세상이 기롱하고 수군거리며 조소하고 말거리가 되는 업신여김과 오해를 아예 불식해야함이라 거듭 생각해봄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바른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말씀했다. 설령, 의사 상충이 있다하여도 공동체의 경내에 참 평안이 여전해야함이다.
이는 지체들의 기쁨과 형제사랑으로 실상의 풍부한 소산과 화평의 즐거움이 온 공동체의 소망인 것이기 때문이다.
(맞는다면) 지체들 간의 화목이 산산이 깨어졌음인바, 이러고 전도가 제대로 될지가 의문되며,
(전도 받은 자들이) 나중에 무겁고 어지러운 연유들을 하나씩 물어올 적에 무어라 변명해 주어야할지..
훌쩍 자란 후손들이 (이를) 벌써 알고서 어떤 회의(?) 느낄지도 모르는바, 총공회에 대해 또한 신앙인격형성에 유익 될지(아니면 장애로 남을지..) 매우 근심된 일로 여겨봄이다.
상처가 점차 깊어지면 악취가 나고 썩기 마련이다. 온 지체의 앞에 놓인 번뇌를 (예방적으로)끊어야 함이다. 그 터(기초)가 주님이 주재하시고 보증으로 주신 은혜의 표징인 게 맞으면, 총공회가 그 인정으로 주님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고자한 선한기업이 단연코 보전되어져야함이다.
각기 나름, 주님께서 도와주심을 바라며 (문제해결에) 善을 절절히 구하여 은총 얻으려함이나 (그토록 채워 주시기를 원함이어도) 여전 가뭄에 목마름 같은 현상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벗기운 듯 현상이, 애초 으뜸으로 정한 산업으로 세운 도리와 받은 증거를 즐겨하지 않음같이 비쳐짐이다. 그곳에서 이룰 주님의 의를 단절함은 애초 함께 올릴 소산을 업신여김(하찮게 여김)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곳에 그림자만 짙게 드리워짐은 역기능이며, 당연 아름다운 일심모사의 추구여야 함이다. 그 (즐거운 기업으로 받은) 애초의 지향점(초점)이 결코 흔들리거나 흐려지거나 상실되어져선 안 되는 것이라 여겨봄이다.
손이 풀어지게 되면 물건을 놓치게 마련이다. 주님영광위해 받은 애초의 보배를 온 지체의 입에 확실히 (필히, 확고하게) 두어져야함이다. 속히 흑암에서 벗어나야함이며, 당시 그 확고한 소망이 보자기에 에워싸인 듯, 나무 뽑듯 뿌리 뽑힘 당한 듯 현상에 있어 장차 어떤 심판을 받게 될지에 (자신이)근심됨이다.
애초 세운 그 자체가 주님의 선대하심이 정녕 맞을 진대는 주님께서 이를 조성하셨음이며,
공히 받아 지닌 크나큰 책무를 분명코 기억하시며 그 목적과 규례도 (모두에) 이미 증거 된 것이다.
(맞는다면) 양방의 근거가 (또는 주장이) 아무리 합리 합당하여도, 애초에 깊은 샘 길어내려 한 도모와 그 수고와 헌신이 아예 없기에 그 결말로서 허사가 셈이다.
양방 간 의향대립으로 애초의 공동대의와 목적과 규례가 공히 보증되지 못하고 주님께 의탁 받은 합일경영이 여태 혼동되어 암울한 초래만 있을 뿐이다.
애초의 대의와 본질의 통일(성)에 견줄 적엔 주님의 의가 분명히 사라졌음이다.
복음전파위한 산실에 어두움이 짙게 덮여져 주님위한 선한 산업에 권위와 충실이 끊기고
그 생산이 핍절된 발자국을 주님께서 이미 감찰하시고 다 세고 계심이다.
이로, 주님께서 애초 언약과 그 받은 분깃의 소산을 전혀 일궈내지 못한 이유를
총공회의 목전에서 물으신다면,
(양방각기)
어떤 변증의 저울로서 우리의 눈과 의향된 걸음이 실로 즐긴 복종이라 하겠으며,
어떻게 (애초) 주님과의 언약을 결코 상실하지 않(았)음이라 명쾌히 (대)답할 수 있음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설령, 양방각기로의 기준이 합당하며 허물이 없다(주장)하여도,
주께서 이 길을 미리 정하시고 (준비시키시고) 여일 그 실행의 ‘울’ 주심이 애초 온 지체의 입에 인정된 게 정녕 맞음이면,
주님면전에선,
서로 양보하는 한이 있을지언정,
양방의 기준을 한사코 (마냥) 요구하지 않음이 매우 지당함이라 생각함이다.
주님께서 말씀의 법도 따라 권능을 베푸시고 영광을 받으시려함이 맞으면,
이 현상은, 양방의 이견(異見)만 마냥 돋보이며 맴돌 뿐,
하나님과 성경말씀이 보다 우위우선으로 넓고 크게 부각되지 아니한 느낌을 (개인적으로) 강하게 받음이다.
그간 마치, 뿌리 채 뽑혀 광야같이 황무하여 잡풀만 무성한 듯, 커다란 망에 씌워진 듯, 곤고한 올무에 묶여 업신여김이듯, 왕래 없어 공허하여 버려진 듯 모양새를
마냥 (연속으로) 둠이,
애초, 그 정로(正路)와 수고로 그 충실을 기하고자 집중된 (온 지체의) 입에 不定되어 역방향인 셈이며,
애초의 보응에 주목되지 못하여 크게 요동되고, 이는 도시 긍정화로 바뀔 수 없는 노릇이 된 셈이다.
이 어두움의 현상은 애초 총공회의 합일소망에 의거된 (주님께 기도로 받은 그 응답의) 조건과 충족에 결코 부합되지 않음이다.
이 (어두운 현상의) 지속은 하나님의 복음전파위한 애초의 언약과 규례를 결국 파(罷)한 것이나 다름없음이다. 그 정도 떠남은 주님의 선대하신 은혜에 감사와 사업경영에 복종이 아님을 의미하며, (맞을진대)
주님의 노가 격동될까를 실로 근심해야함인지에 근심된 생각이 거듭 조밀해짐이다.
그간 각기(양쪽이) 다 옳다함대로 줄곧 행했음이라하여도
종내 심판은 주님께 있으심이며, 따라서
사람(주님의 양떼인) 편으로는 (오직 성경에) 명하신 복음의 진동위해 밝히 등불 켜야 함이 (주님 앞에)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는지 여겨봄이다.
애초 주님의 선대하심에 기뻐 반응했음에도 그(애초의) 대의의 명제가(명분이) 그 뿌리서에부터 송두리째 뽑혀져 (깡그리) 부정되고 있음이다.
애초 주님위해 그 목적과 규례가 신실히 지켜져야 할 기별로 주님께 바쳐지고 오직 경영에 소산을 내도록 다만 위탁받았던 것일 뿐이다.
따라서 양방 각기의 나름으로 품겨진 명제를 훌쩍 뛰어 넘어야함이라 굳게 여겨봄이다.
무용지물 된 정체의 지속을 벗기 위한 수단으로,
주님 앞에선, 수평적인 言往說來를 오직 화목으로서 (공히) 끊어내야 함이란 생각을 (차제에)짙게 해봄이다.
주님의 의를 기쁘게 순전히 이룩하고자 받은 (주님의) 은혜가 아로새겨진 곳이라 여겨봄이다. 그런데,
줄곧 힘써 일으켜 세워가야만 할 복음이 마냥 엎드려짐 된 (비정상적) 형상이다.
(외관상) 우뚝 선 모양새이나,
슬픔같이 누임된 듯, 그곳에 사람이 (발자취, 왕래) 없고, 하수가 광야 같아 황무하고 적막하며, 기근 당함과 곤비함과 그물에 걸린 듯, 멸시 받아 싫어 버린바 되고 비틀거림 같음의 애처로운 모습이다.
주님위해 선한사업의 기초를 공히, 확정했음에도 복음이 마냥 가려져 멸시(무시) 당한 듯,
귀히 여겨지지 않은 형상이 결코 아름다운 게 아님이다.
주님께서 (주님의) 의를 폐하지 않으시며, 이를(이 현상을) 늘보고 다 아심이다.(시139:1).
(영적으로) 그간 틈새에 어두움의 세력이 가만히 스며들어 여태 둥지를 틀고 숨어 엎드려 있음이
정 아니라면,
주님의 명령을 멀리하여 공히 받은 주님위한 사업을 견고히 품지 아니하여 적막에 휩싸인 현상이,
어떤 모양으로 (하늘에) 사무침 됨인지..를 주의 깊게 여겨봄이다.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음이며 시비를 그치라,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며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말씀했음이다.
만민에게 복음의 빛 비추도록 공히 세워진 게 맞으면,
복음으로 정한 기초를 (결단코) 버리지 않아야만
주님의 양떼 됨의 (합당한) 도리라 여겨봄이다.
그런데, 여태껏 (서로) 어깨겨룸같이 되어져 결국 미해결의 결말은 (그 원인이),
단연코, 주님께서 머리이신데 서로 간 각기,
어떤 ‘하나’로서 해결의 셈에 기인하고 합력됨인지..,
여전 이럴 적엔 내내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음이다.
곧, '주님과 다투는 격'이 되고 마는 셈이 아니겠는지....
내내 이러한 현상이 분명코, 어두움에 속함일 진대는 급속히 벗어나야함이며, 주님의 의가 가까이 서고 그 성실이 세워져야할 그 시점이 바로 이 때!!라 여겨봄이다.
맞을 진대는,
본디의 주님의 일에 실로 여일 진보이어야 마땅함이며,
그 적극적인 '촉매' 격으로서, 주님의 뜻에 부응된 (양방 간의) 희생적인 결단과 그 결행이 매우 요긴 됨이라 생각해봄이다.
(비록 어려울지나) 주님의 대의에 적극 부합키 위해, 양쪽이 정 아니라면 다른 한쪽에서 진전위해 ‘양보(양해)’하는 한이 있어도 주님과의 애초의 약속이 굳게 지켜져야만 합당한 도리라 여겨봄이다.
그 애초가 온 지체의 마음에 공히 인정된 게 정녕 맞을진대, 오늘날에도 여전 (공히) 인정되어져야만 이치에 걸맞음이라 여겨봄이며, 따라서
이 해결에 있어 희생을 감내(감수)하는 '대승적인 결단이 요긴' 되며, 이는 주님의 면전에서와 양떼위한 큰 믿음됨이라 여겨봄이다.
(부연으로) 위 ‘양보(양해)’의 의미가 무조건적인 게 (그 의미가) 아님이다. (예로) 당시 (신임투표 과정에서) 일부 부정이 있었는 경우, 이를 두고 ‘깨끗이 하라’는 말의 언급은 당연히 성경(말씀)으로 지적돼야함이다.
어떤 일의 과정에서 그르침이 있는 경우, 두루뭉술하게 넘겨가(려)는 의미가 아니며, 잘못된 게 있다면 그 옳은 바가 (양떼들에게) 명확히 주지되게 일깨움 받는 게 당연함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온 지체 안에서 내내 논쟁(분쟁)으로만 일관하게 되면, (관련 당사자들은 차치하고서라도) '한울타리'에 거한 주님의 양떼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믿음의) 후손들의 형편은 어찌됨인지..
(바른 인용인지..속담으로)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격'이 되어 (직접으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주님의 백성된 무리가
단지 '한울'에 머문 연유(이유)로, 직·간접적인 여러 장애를 겪게 됨이다. (비켜가지만 한 외적 경우로, 전도 시, 전도자의 인격이나 모본적 삶도 중요하지만, ‘어느 교회냐..’ 물을 적에 좋은 교회로 소문난 교회이면 대화가 쉽게 마련이며, 그만큼 교회(단위)의 아름다운 격을 간과할 수 없음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지체 위에 나타나도록 하나님의 의를 다시 쌓는 함께 진전이어야 마땅함에도, 여전 어두운 현상된 결말의 책임을 상대에 전가한 듯 모습인바,
(양방 간) 이리 긴 세월 겨룬 그 결정적 이유로서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크게는 양방각기, 좁게는 양방의 각 지체가(개개인이), 어떠하게 (소위, 기본 또는 건설)구원 면으로 절단날 수 있기에 이러한 (지속의) 현상인 것인지..
나아가, 장래 심판대에 모두 섰을 적에, 이 땅에서 (양방) 각기 나름 성경적 지정의에 따라 품은 (각기의)기준을 양보하게 되면, 넓게는 양방이, 좁게는 각 지체가(개개인이) 장차 어떠하게 크나큰 책망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도 있기에 (또는, 확정적으로 받게 되기에) 여태껏 이토록 (양방이) 팽팽하게 맞섬일까..를 생각해봄이다.
더 이해해보고 싶음은,
양방 각기의 지정의에 따른 기준을 (양방) 각기, 어느 성경말씀에 입각하여 생명처럼(?) 견지로 여기며 (각기) 후손대대로 파수해야만할 사안인 것인지,
이게 맞는다면, 다른 쪽이 이(지금의 현상)에 잘못을 시인하고 돌아설 때까지 ,각기의 (지정의에 따른) 기준을 당대는 물론 (각기) 후손대대로 유언처럼(?) 파수해야만할 사안인 것인지,
이게 아니라면, 가령, 어느 차세대에서 서로 간 양보(양해)로 인해 (이 난제를) 풀게 될 경우, (주님 앞에) 죄를 짓게 됨인지,
이게 아니라면, 애초 촉발(부딪힘)의 원인된 당 세대에서 (결자해지로) 마땅히 풀어주셔야 함이 그 합당한 도리 됨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자신 부끄러우며)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말씀했다.
입술의 열매를 짓고자함에 있어서 다투며 기도하며 금식해도 상달되지 않음이 성경말씀이며,
주님의 길과 생각은 사람의 의사에 비견되지 않는 높음이시기에
나중 심판은 다만 주님께 있으시니 (주님께) 온통 맡기며,
다만 온 지체가 다툼을 먼저 풀고서 주님의 의와 언약을 기쁨으로 잡아
(마음의 길 아닌) 주님의 길에 서서 주님위한 의의 소산을 공히 일궈내야 함이 도리 아니겠는지..를 생각해봄이다.
주님의 견책이 가득 쌓인 현상인지..이로 주님의 면전에서 슬퍼해야함인지..에 대한 근심이 지워지지 않음이다.
하나님의 은혜인 '화목을 전제'로서 풀어야지 사람위주중심의 방도는(방안은) 유익(이익)은 될지 모르나 인위적인 편리요 편법일 뿐, 실로 경건이라 보겠음인지..
화목이 바탕(근간이) 돼야 선한 모든 것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음이라 생각함이다.
주님께서는 능력이 모자라심도 아니시며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시며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심이다. 여태껏 인내하시며 순서로서 지체 간의 화목을 먼저 기대하고 계심이라 여겨봄이다.
주님 판단하심을 찾아, 온 지체의 각 부분된 형제간의 화평과 평안의 만족이 넘쳐남과 영적정체성에 흡족의 회복이 있어져야함이다.
그곳 통해 하나님영광위한 포도원지기의 역할을 성실로 갚으며, 화평과 의를 세우고 뿌려 새싹 돋음이 사방에 발생하게 하며, 하나님영광이 나타나는 일컬음을 받아 주님께 받은 상급과 보응이 있으며,
또한, 후손대대로 언약을 세우며, (온 지체가)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께 온전히 나아가는 그 발전적 지향에 (全지체가) 집중해야할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봄이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로 받아 하나님영광과 복음위해 즐거운 출발이었던 게 맞으면,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함이며 즐거운 합의로서 무산된 통합(성)의 회복과 건설적 전진에의 집중이 매우 요긴 됨이다.
(거듭으로) 영감과 찾은 지각으로 막대기들이하나 되듯 함께 무너짐 일으켜, 주님께 받은 칭찬을 머리에 이고 크게 즐거워할 날 급속히 이르기를 소망함이 온 지체의 공감이시라 여겨봄이다.
묵은 길을 수축하여 빈번 왕래하며 활력 넘친 거할 곳이 되어져야 마땅함이라 여겨봄이다.
복음을 풍성히 담을 그릇역할로서 받게 된 주님의 선대하심과 원하심을
결코 잊지 않음이어야 애초의 이치에 걸맞음이라 여겨봄이다.
애초 그곳이 기도의 응답으로 인정되어져 주님의 것으로 드린 것일진대, 이견의 첨예함 벗어나 ‘주의 길’ 예비함에 부합하여 경영케 하신 하나님을 존경해야함이다.
복 받은 총공회라 인정됨이 온 지체의 행복일진대, 해가 더 지기 전에 형제(공동체)간 (서로) 매인 줄을 공히 풀어, 주님의 면전에서 기쁜 소식 발하며 함께 즐거이 노래해야함이 마땅함이라 굳게 여겨봄이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말씀했음이다.
말의 응답이어야 복인 것이며, 온 공동체가 크게 기뻐하며 감격 충족할 날 속히 이르도록,
온 교역자님과 은사위치에 서신 분들께서 적극 이끌어 주시기를 심히 고대함이
온 교회의 공감이시라 굳게 믿고 싶은 심정이다.
복음전파가 애초의 목적일진대 성령의 인정하심이며, 또한 성령께서 길을 가르쳐주심에 온전히 반응하여 필경, 주님을 위함에 모두의 손맥이 풀어지지 않은 일치진보로 획기적인 이룸의 역사가 효과 있게 이루길 소원함이 온 지체의 공감이시라 굳게 여겨봄이다.
새롭게 길 예비하고 대로를 수축하며 단장위한 적극적 모색이 주님 원하시는 지혜라 생각해봄이다.
진정한 회복은 내 의로는 일어날 수 없고 ‘주의 이름’만 주셨음이며 주님만이 답이심이기에,온 지체의 기도에 선대하시어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맞으면,
만백성을 통할하시는 주님 앞에 절실히 부르짖어 시간과 기회를 잡고 아름다운 향기 뿜어내도록 적극 이끌어 주실 과제라 여겨봄이다.
하나님 통치아래 완성하여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님위한 목적됨에 해석을 같이함으로 혼미한 역사를 바로 세우며, 푯대 향해 모두의 승리로 즐거이 전진하여야함이 온 지체의 공감이시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음이다.
하나님을 여호와인줄을 전파코자 모두에 쌓인 선과 거룩한 헌신이 어우러져 주님의 것으로 즐거움으로 구별하여드렸음이 맞으면 마땅히 그 동기와 목적이 존중되어져야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뿐이시기에 온 지체 또한 서로사랑 함이 풍성하도록 힘씀이며, 주님의 지체들이기에 기어코 주님께로 초점 맞추는 게 그 해결이라 생각해봄이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서 다만 주님의 기쁨이 되게 밝은 미래의 지향이 합당함이라 여겨봄이다.
차이가 있는 게 거룩이기에 이의 회복이 지체될수록 손해임이 정녕 맞으면 혁신변화개혁위한 절차를 급히 밟아야함이라 생각해봄이다.
주님의 뜻을 모두의 마음에 품고 지어 드린 게 엄연한 인정일 진대는, 주님의 소유로 경영케 하심인지(또는 아닌지)를 분명히 분별해야함이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사역자양성위해 순전한 우물 격으로 예비 되고 또한 주님 안에서 후대로 물려줄 자랑으로 견고히 세워졌음이 맞으면 애초의 하나님영광위한 발견과 땀으로 쌓은 선의 표출이어야 마땅함이다.
이 현상의 기저가 (뿌리나 밑바탕이), 성령의 기뻐하심에 연유된 것이면 기쁜 일이나 (본의 아니게) 무엇에 요동된 것이면 매우 근심됨이며,
따라서 당초 주님께로부터 받은 게 분명하면, 하나님영광위한사업의 대의와 규범이 흔들려선 근심이며 엄정적이고 생산적 사역의 대의와 목적에 따른 부합이 무엇인지를 기필코 찾아내야할 계제라 여겨봄이다.
(나름의 표현으로) 양방이 (말씀으로) 잘 걸러진 최선의 평가(처방)에 따른 무거운 심정의 부득이한 표출이었어도, 이 현상이 성경에 나타난 분쟁과 동질(동격)이면 심각한 문제이다.
(비록 논쟁할 수는 있으나) 주님허락 없이하는 표시일 경우, 주님 판단(칭찬)하심에 반한 것이 되며 (맞을 진대는) 급기야 온 교회공동체의 영적정체성에 커다란 부정적인 해를 끼치게 되는 결말에 이르게 되는바 이에 분명한 분별이 절실히 요긴 됨이라 여겨봄이다.
(본의 아니라하여도) 주님의 권속이며 서로 지체에 마귀가 궤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마치 뱅뱅 돌리려하고 휩싸이게 하려는지, 분쟁을 틈타 스며들어 맹렬히 표적하여 요동과 흩어지게 하고 오염시키려들고 있(었)지는 않는지, 아니면(그 반면으로) 주님의 이름을 실로 어떻게 드러낸 수입이 있었는지, (온 지체에) 어떤 기쁨 되었는지 (영적)분별이 실로 요긴 된 계제라 여겨봄이다.
원망과 방관과 어두움의 지속이면 화석화 될 수 있음이며, 또한 후대에게 선례 되어 지게 되면 어떠한 모본 질서이며 유익 되겠는지에 대한 분별이 절실히 필요 됨이다.
주님의 때가 있으시겠지만 주님면전에서 공히 해결해야할 (사람편의) 시점도 분명히 있음이라 보는바,
주님께서 ‘오늘날 온 교회에 어떠한 신호’를 보내고 계심인지를 귀 기울여 듣는 게 시급함이라 여겨봄이다.
하나님의 미리 계획하심아래 그곳도 여태 품고 있으심이 맞음이면, 주님영광위한 수입 얻고자 주님따라 서로 품고 하늘나라 세움에 합동하여 일로매진하는 믿음의 진보가 시급히 요구됨이다.
정체 현상이 일면, 연단(단련)의 한 과정일지언정,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했던 애초의 대의와 목적이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됨일 진대는, 무산된 통합(성)의 회복이 긴히 요청됨이다.
주님경외함의 지혜와 완전한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수같이 흐르며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기 위한 (공통) 합의된 진보가 시급함이라 여겨봄이다.
주님의 소유를 은혜로 받은 게 엄연한 인정일 진대는,
비록 견해차 크고 가득 찼어도, 뜻을 같게 하시어 무너진 기초를 재건해야함이며, 그럴 적에 모두의 승리이며 참 안도와 평안이 있음이 온 지체의 공감이시라 여겨봄이다.
애초 그곳이 하나님의 세밀하신 계획아래 준비시키시어 쓰시고자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산업으로 받았음이 모두의 인정됨이 맞는다면, 또한, 하나님을 여호와인줄을 전파코자 모두에 쌓인 선과 거룩한 헌신 어우러져 주님의 것으로 즐거움으로 구별하여드렸음이 맞는다면,
결과적인 이러한 정체는 경영케 하신 하나님을 존경하지 아니하였음이란 결말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온 교회가) 민첩히 애초의 흡족을 필히 회복해야함이라 생각해봄이다.
‘주님의 신’으로 된다고 말씀했음에 따라, 쌓여진 최고의 교리신조행정을 토대로 건설적 면으로 어떻게 (구원에)유익 삼을지, 온전성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저력을 보일 절호의 계기라 여겨 봄이다.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복된 장마 비로 가지를 내고 열매 맺음같이 기어이 주님의 것임대로 함께 행하고 지켜지고, 주의 이름 경외함으로 하나님 말씀이 (그곳에) 하수같이 흐르며 주님의 마음 시원케 해드리는 흐름이어야 합당함인지,
아니면, 여전 이 정체(停滯)가 합당함인지에 확실한 분별이 매우 절실함이라 여겨봄이다.
‘일부 공회’가 서로 양보로서 (그곳을) 사용코자함을 듣게 되는바, 단순히 생각할 진대는 그곳을 여일 황무한 채로 둠보다는 비할 바 없이 낫다고 보임이나,
(어린 눈으로 보건댄) 애당초의 총공회를 큰 울타리로 볼 적에,
이는 작은 한 울타리에서 이뤄짐이며 (단지) 서로 간 필요(성)에 따른 편리(편의)라는 생각을 (한편으로)해봄이다.
즉, 애당초 주님 면전에서 총공회적으로 연합된 언약과 이 따른 대의·목적·규례면의 충족엔 (상대적으로) 크게 미흡 됨이다.
(인간 편으로선 십분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위로 하나님면전에선 (그러한 수평적) 편리(편의)가 우위우선이라기보다,
온 교회적 합의로 주님의 의를 온전히 이룩코자 공히(더불어) 나아가야함이 이 (부분적인 것)에 견주어 매우 합당함이라 생각해봄이다.
새싹(새살)이 새로 돋아나듯, 그곳에 본디대로의 진정한 회복이 있어져야함이 맞으면 내 의로는 도시 일어날 수가 없음이다. ‘주의 이름’만 주셨기에 오직 주님만이시며 주님만이 답이시다.
이 현상이 외부적으로부터 온 게 아니라 서로 지체 간에서 비롯됨이다. 세상에서 온 것이면 세상과 대적해야하나 지체들 간에서 초래된 것은 마땅히 내부적으로 풀어야함이라 생각해봄이다.
그런데, 양방의 ‘기준’이 제각기 옳다함에도 여전 긴 세월 이 현상임은
'주님께서 주시려는 답'을 여태 찾기 못함에 기인함이라 생각해봄이다.
따라서, 이 해결위해 지금은, 강력한 화합과 회복의 길을 찾는 데에 초점을 맞출 때라 여겨짐이다.
그 전제로 먼저 (주님면전에서의) 회개와 기도가 매우 긴요 됨이라 봄이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말씀했다. 따라서 그 정답을 얻기 위해 온 교회의 기도가 요긴 되는 셈이며, 이러한 간구는 어련히 (주님을) 믿는 자의 몫이라 생각함이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음인데, 긴 세월의 골에 무엇이 채워져 있겠는지 (거듭)생각해봄이다. 그 (골의) 틈새로 무엇이 달라붙겠는지.. 마귀에게 틈을 보이며 그 방치하는 만큼 그(본래의) 감사가 더 비움 됨이며, 애초의 감사가 점차 사그라질 적엔 원망의 마음으로 딱딱해지고 결국 병들게 마련인 셈이다.
(생각건대), (히스기야왕의 통곡의 기도가 하나님을 시원케 해드렸듯) 전 교회적인 ‘회개와 기도와 감사의 기간을 선포’함이다.
그간 모두의 (마음에) 무겁게 메인 짐을 주님 앞에 온통 내려놓으며 온 지체가 (말씀대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함이 (주님 앞에) 매우 온당함이 아니겠는지...를 깊이 여겨봄이다.
애초 그곳이, 주님의 은혜로 특별히 예비 된 게 맞으면, (비유로서) 주님의 눈과 마음과 귀가 그곳에 여전 쏠려 있으심이다. 그런데, 즐거워한 왕래 없고 경영이 무산되어 생산이 끊어지고 그 견고함 잃었으며 본래의 감사가 사라지고 어둡고 싸늘하며 적막하고 황무함 같은 현상이 분명코 긍정적인 결말이 아닌 것이다.
주님의 목적에 일치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의 인정과 관용과 도와주심바라며, 성령께서 열어주심에 적극 반응하여 효과 있게 이루길 소원하는 기도와 간구가 (더불어) 급히 요청됨 아니겠는지..
하나님의 통치아래 완성될 것을 믿고서, 주님면전에 나아가도록 적극 이끌어 주실 계제 아니겠는지..
성령의 능력으로 풀고자, 온 교역자님이 먼저 베옷을 입는 심정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심이면, 주님의 양떼도 뒤따르지 않겠음인지..
2019년에 노곡동 그 넓고 그 많은 건축물을 하루 아침에 무조건 뜯어 없앤 그 하나만 가지고도 이 목회자들은 그 교회 교인들이 직접 자기 목회자에게 하나씩 따져 보고 그리고 반대편에게도 교인이 직접 물어 봐 보시면 두어번만 대화가 진행되면 그냥 다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의 이 글께 가장 가까운 길을 안내합니다.
(성경에 분쟁과 관련, 몇 구절을 나열해봄이다.)
< ‘..어리석은 변론과..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 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 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생략)..>
당시 그 터를 주님께 한마음 된 기도로 받았으며 주님의 뜻을 단일로 합하며 복음위해 즐거운 출발이었던 게 분명하면, (양떼의 눈으로 볼 진대도) 내내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마냥 뿜기어져야만함이다.
주님의 일에 네 편과 내편이 (따로) 없음이다. 오직 예수님편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 양방 간 교통이 막힌 문을 높이고 있는 사이, 애초 풍부하였던 화평이 일관으로 흐트러지고 핍곤하며, 일로의 전진이 굳게 막혀져 있었음이다.
애초에 서로 언약됨이 오랫동안 사라진 현상을 두고 생각해봄은, 양방각기의 견해가(주장이) 비록 성경말씀으로 잘 걸러진 최선적 평가(처방이)라 하여도
애초 선히, 공히, 합력된 의지가 대립으로 분열된 모습(현상)인바, (이 모습이) 결과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분쟁과 동질(동격)한 격일진대는 매우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맞을 진대는)
급기야, 주님의 몸 된 온 교회의 영적인 정체성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함이다.
(잘못 봄이면 고쳐주심 바라는 전제로서) 주님의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지체된 형제이기에 서로 소중한(귀한) 존재이다.
그럴진대, 본디 단일이었던 교단이(단일 총공회가) 이러하게(각기 선명한 총공회로) 마구 쪼개짐이 어떠한 즐거운 분립인지는 잘 모르나,
(제반 어두운 현상을 미루어 볼 적엔) 분명한 것은,
목회자님들을 위시한 양들이 뿔뿔이 (각기 우위로) 갈라선 채, 그 지속으로 굳어져있는 듯 한 양상이라 보여 짐이다.
이러한 대립의 양상과 그 지속이 결국엔 배타적인 무덤에 빠질 수도 있음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지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 이 현상의 지속은 주님의 한 몸 된 지체가 결국엔 이원화에 빠져 화석화될 수 있음이다.
성령은 분명코 하나 되게 하시며, 악령은 하나를 분리(분열)되게 함이다.
지금껏 야기된 현상들이,
정녕, 성령님의 기뻐하심에 연유됨인지,
어둠에 얽매인 우려된 형상인지에, 단연히 영적분별이 필히 요구됨이다.
이 문제만을 한정해서라도, 공히 토론을 거쳐, 그 명확한 판단 따른 지식을
주님의 양들이 구원 이룸에 공유되게 깨우쳐주실,
목회자님의 분명한 책무가 (주님 면전에서) 있으심이라 여겨봄이다.
오늘날 총공회의 현실을 직시해 볼 적에, 어떤 우려된 면도 단연(코) 없다면 성경적으로 어떠하게, 명확히 공언할 수 있음이며, 주님면전에서 명확히 자인(自認)하겠음인지..에 대한 깨우침을 얻고 싶은 심정을 지울 수 없음이다.
그런데 지금껏, 그 경영의 완전무산으로 인해 애초에 고이 품겨졌던 달란트를 (본의 아니게) 송두리째 땅에 묻어 놓은 격으로 밖에 (그) 달리 해석할 수가 있겠음인지..
또한 이 현상과 결말에 직접으로 아무 관련과 그 책임 또한 없다하여도, 총공회란 큰 울타리에 속한 모든 지체가 이에 연대적인 책임마저 피할 수 있음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칭찬과 책망과 관련한 평가가 각 교회단위임이 맞는 경우에, 그 이치적으로 해당됨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애초의 단일 된 총공회의 큰 울타리에서 이미 벗어났는데 ‘유달리 무슨 소리냐..’ 그러심일지도 모름이다.
비록 직접으로 아무 관련이 없을지나, 크게 볼 적엔 그리스도의 한 몸이며 서로 지체됨이다.
이럴진대, 주님의 양떼에게 이 (해당)구절을 본문으로 어떠하게 힘 있는 메시지를 설파할 수 있을 지며, 긴 세월 걸쳐 이(달란트)비유 관련된 설교를 주님의 양떼가 들을 적에,
이로 어떠한 긍정적 반응을 하겠으며 어떠하게 실로 은혜 받음인지를 (한편으로)생각해봄이다.
쓰지 않으면 잃어버림과 (꼭) 같음이다. 애초에 총공회가 받은 부요를 마냥 묵혀둠은 복음의 빛 강화를 약화시킬 뿐이며
그 목적된 가치에 소용없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라 심히 여겨봄이다.
애초 총공회적으로 그 엄정적인 생산적사역의 대의가 굳게 세워지고 (애초의) 동기와 목적과 규범과 존중이 응당 (단연코) 회복되어져야 함이며, 더불어, 주님의 몸 된 전 교회에 참 평안이 급히 회복 되어져야함이란 생각을 거듭해봄이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만일 서로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자신 부끄러우며)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가치관에 매여 살아가야함이다. 애초 그곳에서 ‘총공회적인 합일경영’을 하나님영광위한 복된 가치로 지녀 공히 (대대로) 시행코자했음일진대,
이 정체(停滯)의 지속은,
뭇 생명과 성화(건설)구원을 더욱 풍성히 거둠을 목적한 근실의 지속에 정반대된 현상이며, 이는 애초에 총공회적으로 지녔던 절대적 가치관의 형성과는 뚜렷이 갈림이며 (이 면에 견줄 적에) 변질된 형상(형국)이라 여겨봄이다.
이는, (본의 아니게) 최고최선을 추구하(려)는 총공회의 (품)격과 그 지향 의지와 결심에 어긋남이 아니라고 보기가 어려운, 즉, 역반향의 기현상 된 주행이며, 필시 원상 길로의 회복이 매우 합당함이란 생각을 해봄이다.
애초, 주님면전에서 서로 언약된, 총공회적으로 이룰 본래의 모습이 전혀 안보임은,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볼 적에 애초의 본질에 따라 공히, 아름답게 체질화된 합리요 합당함이겠으며, 어떠한 선한 수단 된 결정적 값어치가 되겠음인지에 의문이 생김이다.
또한, 수평적으로는 주님의 몸 된 지체들이 (본의 아니게) 서로 멀어져 형제간의 포용성과 절제의 조정이 매우 흐트러졌는바, 이는 결국 주님의 성품에 참예함이라 긍정됨이 매우 어려운 현상이다.
날로 다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가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증진에 요긴 되는, 더욱 체계적이고 보다 질 높은 (양떼의) 양육강화위해 '총공회적으로 합일화한 동력'이 (한편으로) 절실히 필요 됨이다.
(어린아이라도 배워 아는바) 시대마다 하나님의 종, 목회자님들이 달란트 격으로 잠깐 받으셨을 뿐,
단연코, 그곳 주인 됨은 주님이시다.
(몇몇 분의 헌신으로 이룬 게 아닌), 온 교회가 하나님영광위한 발견과 땀의 표출로 쌓아 주님께 바쳐졌음이
총공회(교회)의 동일한 認定일적엔 (문제가) 쉽게! 절로 풀려짐이 아니겠는지..를 생각해봄이다.
애초 명실 공히, 목회자양성위한 중추적 총본산의 모습으로 예비 된 게 정녕 맞으면,
(나름 의미 있는) 소소한 부분은 복음전파의 대의에 죄다 흡수시키며
애초처럼, 주님의 役事하심에(일하심에) 온전한 피동으로 그 본질인 생산(경영)에 절대적 긍정과 승화에 초점 둠의 집중이, 총공회적으로 여일해야함이 마땅함이라 여겨봄이다.
온 목회자님들의 애초, 그 목적된 소명의 모습을 양떼의 눈으로도 급속히 볼 수 있게 되기를 (마음으로) 그려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