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후대의 목회자님께 올리는 소견'

공회내부 발언      

'온 후대의 목회자님께 올리는 소견'

설명
교인 62 0

(총 공회에 소속된) 주님영광위한 목양의 사역으로 후대의 위치에 서신 온 목회자님에게, 한낱 (평)교인의 신분으로써 매우 외람됨을 무릅쓰고 (개인적인) 지식이 짧디짧은 소견을 올려봄입니다.


<3가지로서>


‣애초양성원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적극적인 중재(조정)의 역할을 일익 감당해주심을 심히 소망해봄입니다.


공회별로 그 대표성을 가진 목회자님들을 선정하여 각기의 견해를 심도 있게 조율함입니다.


(틀림이면 지적해 주시길 바람의 전제로, 배운 대로는) 주님께서 (주님의) 일을 하실 때에 촛대를 중심으로 일하심이라 생각함입니다. 그런데 애초 그곳에서의 역할을 누구에게 맡기셨음인지..를 생각할 적에, (아무런 이룰 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워졌을 리가 만무함일진대) 그 중심의 역할로서 오늘날에 (위임 받은) 목회자이심이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애초 그 세움이 (그 동기와 목적이) 총 공회적 기도로 응답되고 함께 이룰 그 사업과 경영이 주님과의 약속임이 분명코 맞음이면, 이로 주님께서 여전히 그 통로에서 기다리심이 아니겠습니까.


행여, 주님께서 그 촛대를 옮기신다면 결단코 총공회의 행복인 게 아니라 여겨봄입니다. (맞는다면) 다시금 총공회의 역동적인 전진이 매우 긴요 됨이며, (당대에서 그 해결이 정 어렵다면) 그 촛대의 역할을 여일히 붙들고자(감당코자), 후 세대의 온 목회자께서 (이 해결에) 일익 감당하심이 온당하지 않겠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원인된 세대에서 해결점이 정 없다면) 결국 다음세대의 목회자님들이 (문제를) 떠안을 수밖에 없음이며, 당 세대에서 기어이 함께 풀어냄에 일익 합력하심이 긴요 됨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총공회의 장자(격)인 교회를 비롯한 일부교회의 문제의 원만한 해결에 있어서도 그 중재의 역할을 일익 감당해주심을 심히 소망해봄입니다.


한 곳이 아프면 온 몸의 지체에 아픔 됨입니다. 온 교회가 서로 지체됨인데 난제들이 지체 간에 마냥 방치됨이면 주님의 교회의 마땅한 믿음 찬 전진과 성장에 어찌 도움이 되겠음인지..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어떠한 문제가 있을 적엔 서로 지체된 마음이 어찌 편할 리가 있겠으며, 결국 마귀만 좋아할 것뿐입니다. 당대에서의 해결이 정히 어렵다면 (세대적으로) 그 (사역의)바톤을 곧 이어 받을 (당시에 직접관련 되지 않은) 온 목회자분들의 그 일익 역할이 요긴 됨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양육과 성장(증진)위한 책자의 발간에 일익 감당해주심을 심히 소망해봄입니다.


(더러 인용이며, 간략으로) 기독인의 삶에 성경을 토대로 한 다양한 참고서도 (믿음과 신앙생활과 성장에) 필요 됨입니다. (가령) 이를 위해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성경의 근간을 이해하고 기독인들의 삶의 의식을 일깨우며 기독교문화를 창달하고 문서를 통한 복음전파와 교회성장과 자립에 일익 기여함입니다. 공회적으로 이미 발간된 교재는 통합으로, [백영희목사설교집]에서 성경교리별로 발췌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요긴 된 주제들을 설정하여 분야별로 그 작업을 분담함입니다.


시중에 기독교관련서적은 넘쳐나고, 총 공회의 역사가 꽤 오래인데 정작 교단 내에 다양한 참고서가 너무 없고 보면 시중에 서적을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점점 확산 되는다문화시대에, 또한 더 넓은 선교의 사역 위해 (문서를) 번역하며 (쪽지)전도지도 만들어 활용함입니다.


 


총공회의 본연의 그 옛적 같음의 지향(점)에 중심 둔 개혁의 운동을 소망해봄입니다. 믿음의 진보위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좇은 역동적인 운동이 오늘날 긴히 요청됨이라 여겨봄이며, 정체의 요소들을 절대적인 긍정의 요소로 해소함으로써, 보다 아름답게 소문난 온전한 교회의 모습이 세상에 빛의 역할 됨이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記> 관리자님께 부탁올림은, 몇 곳의 내용은 애초 양성원과 관련하여 부득이 올리게 됨이며, 이의 계속게재는 하나님께 영광과 이웃에 덕이 안 되는 사안이라 판단합니다. (홈 규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게재기한은 관리자님께 맡기며, (그 후) 전부의 삭제를 정중히 요청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서기 2025.07.21 21:25  
* 번호를 일일이 적어 주시면 어느 글을 '삭제'할지 파악해 보겠습니다.


* 이 곳의 글은 원문대로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나 다른 글이 달리지 않았을 때 첫 글이 원하면 삭제할 수 있습니다.
 - 다른 글이 적히면 다른 글 때문에 첫 글을 삭제하지 못합니다. 비실명이 보장 되어 글의 임자를 알 수도 없습니다.
    이 곳의 비실명은 실명처럼 적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 일단 번호를 적어 주시면 살피겠습니다. 첫 글과 오간 글 전체 내용상 삭제가 가능하면 공지를 해 볼 수 있습니다.
    공지를 충분히 한 뒤에 비공개로 전환하고 다시 충분한 기간이 지난 뒤에 삭제도 고려해 볼 수는 있습니다.
교인 2025.07.26 18:39  
&lt;성경지식이 짧아 그릇됨이 있는지..자신 부끄러우며 조심스럽게 또한 더러 인용으로 두서없이 써봄입니다.&gt;

그곳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된 것이 온 교회적 연보가 그 인정됨이 맞음이면 지금껏 총공회적으로 ‘그러므로’의 순리여야 함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총공회가) 그 순리로 쓸 것을 역리로 둠 현상이라 생각되며, 이것을 ‘그런데’의 모습이라 여겨볼 적엔, 두 면이 뚜렷이 대조됨입니다.
(맞음이면)
어느 면이 실(實)로 ,

복음을 마음에 두기를 더 좋아한 현상이며 주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함이겠는지, 받은 은혜에 더 상당한 보응인 것이며 영원히 찬송 받을 분이심에 보은코자하는 (빚진 자로) 섬김의 모습이겠으며, 온 지체가 주님의 몸을 거스르게 함이 아니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현상임을 증명함이겠음인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 진리로 불의를 쫓아내고 하나님의 신성을 만인에게 밝히 내보인 모습이겠으며, 하나님의 의를 실현시킴으로써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모습이겠는지,
세상에 수군거림과 비방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음이며 복음이 가려짐 된 모습이 아님이며 어둠의 엉뚱스런 형상도 아닌 것이며 허망함이거나 우매함이거나 우준함의 길도 아닌 것이겠음인지.


애초 총공회적으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좇아 선포되고 주님의 주권하심에 다스리심을 받는 영역으로써 그 규범과 질서가 세워지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시작한 곳이라 생각함입니다.
맞음이면, (그 맥락으로 볼 적에) 여태 현상이, 애초의 목적이 잃어버려진바 됨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목적에 부합되어 그 꿈이 생생히 서려있음이라 봐야함인지, 본디의 궤도를 여전 이탈하지 않고 견지된 현상인지 아니면 궤도 수정하여 주님의 본심에 초점 맞추어야할 필요성이 있음인지, 예수찬미의 존귀와 영화의 처소로 돌이켜야할 이유가 있음인지(전혀 없음인지), 

주님의 양떼가 이에 혼돈(혼동)이 없도록 오늘날 목양의 사명에 서신 온 목회자님이 적극 일깨워 주실 일로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세운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함이며 하나님의 지식과 주님의 희생을 배워 주님의 좋은 일꾼으로 양성되고 주님의 마음을 흡족히 해드리며 (주님께) 찬송 잘 드리려 세운 게 맞음이면,
(여전 정체의 지속일 뿐) 그곳에서 주님을 부르지도 찾지도 않은 결말인 게 맞음이면 주님과 주님의 일을 괴롭게 여김과 무엇이 다르겠는지(아님인지)에 대한 (영적)분별이 긴히 요구됨이란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으로, 어떠한 문제가 (원만히) 풀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지.. 오직 주님의 심판에 맡기지 아니하며, (한마디로) 서로 안 지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지. 사50:에서,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고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말씀하심대로 주님 앞에 서기위해서는 주님 앞에 눈물의 기도가 없이 응답이 있겠음인지를 (한편으로)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그러므로’의 순종이 아닌, ‘그러나(그런데)’의 삶을 살아가다가 결국엔 책망을 받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또한 계시록의 초대교회들이 각 교회(단위)로 평가됨을 볼 적에,
설령, 양편에 속한 우리와 개인적으로는 이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손치더라도 한 몸 이룬 서로지체이기에 연대적(공동의) 책임이 있지 않겠음인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 종으로 끌려간 것도 이스라엘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크게 볼 적에 ‘한 우리’에 속하였음인데 개개인도 이에 자유롭다할 수 있겠음인지.. 가정교회나 교회를 (또한 사회단체나 국가를) 그 외부(바깥)에서 볼 적에 (물론 세부적으로도 볼 수도 있으나) 그 큰 구성체를 두고 말함을 보게 되며,

여태현상이 어떠하게 진심되고 땀 흘림이겠으며, 죄 짐만 잔뜩 가져다가 주님께 맡겨버리는 엉뚱함이 없어야하고 허공을 치는 것 같이 되어져선 안 됨이기에,

이치적으로 여태현상의 지속을 크게 보아 애초 함께 출발했던 총공회적 책임 또한 있음인지(없음인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며,
주님의 몸 된 지체에 고통과 아픔과 고난을 주님께로 그 책임을 돌릴 수 없음이며, 그럼이면 온 지체의 탓임을 인정해야함인지(아님인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종에게 학자의 혀와 귀를 주셨듯이 오늘날 온 목회자님이, 주님의 양떼가 푯대를 향해 달음박질을 줄곧 향방 있게 하도록 적극 일러 주심이어야 온당하지 않겠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배운 대로는) 문제의 원인을 우선 내게서 찾으려하는 그 중심을 벗어나 환경 탓, 다른 쪽(사람)의 탓으로 전가하여서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됨이라 여겨봄입니다. 이치적으로 양방각기, 우리가 정당하다는 행위로 멈추고 내내 상대 탓으로 넘길 경우엔, 절대로 해결이 되지 못함이며 결국엔 주님으로부터 응답받지 못함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힘과 능력으로 함이며. 그런데 각기의 행위로 자꾸 돌아가, 나와 우리 쪽이 맞음인데 상대 쪽이 왜 그르냐..그럼이면 문제해결이 안 되는 것이 상식이며, 그럴진대 차라리 (문제에) 그 답답함을 더 많이 지닌 쪽이 변화되는 게 (문제해결에) 빠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결과로 긴 포로생활의 고난의 잔을 마시게 되듯, 이치적으로 오늘날 온 지체 적으로 어떠한 잔을 마시고 있음인지.. 즐거운 잔인 것이면 행복이 되는 것이며, 그 반대인 경우라면 이를 속히 벗어나야함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말씀했는데 오늘날에 목회자께서 학자의 혀와 귀 같음 하시어, 주님의 양떼가 비틀거리지 아니하며 (이에)혼돈이 없도록 적극 끌어 주심이어야 양떼가 사는 것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을 당하여 진노의 잔을 마신 긴 고난이 끝나가고 회복(해방, 자유)의 위로를 가르쳐 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게 됨입니다.
이치적으로, 그간 아무 대책 없이 흘러왔으나 이 또한 지나가게 될 것을 소망해보게 됨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나라를 이끌어갈 리더가 없었기에 굉장히 힘든 상황을 보게 됨입니다. 이치적으로 오늘날에 그 사명이 오늘에 온 목회자님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길 끝에 서 있음 같으나 소망과 위로를 주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이에 회복과 반전의 역사가 있을 것을 기회로 삼아 마침내 주님의 영광을 보도록 (주님의 온 지체를) 끌어 주셔야함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지금이 아니겠음인지.. 아무리 장마가 길어도 그칠 때가 있듯 이제 고난의 끝이 지금 되어져야함인지(아닌지)를 면밀히 살펴볼 계제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온 양떼가 믿음의 진보를 잃어버렸던 허망함이 있었음도 무엇이 소중한 것임을 아는 기회였기에 감사하며, 정체의 늪에서, 생기와 소망이 넘치게 회복을 주시려는 주님을 기대할 때가 실로지금이 아니겠는지, 그 면밀히 살피심대로 적극 이끌어 주실 때가 바로지금이라 거듭 여겨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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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記:
*발언/연구&gt;  711 [발언] 양성원-현실적으로 합리적인가 비합리적인가_평신도 (2018.12.1.)
*발언/연구&gt;  5065 애초의 양성원, 이대로가..합리인가_(평)신도(2020.10.31.)
*총공회 발언/연구&gt; 15891 ‘애초 양성원..그 복원을 소망하며’ 교인(2025.6.14.)
*총공회 발언/연구&gt; 15966 ‘애초 양성원과 관련, 질의문’ 교인(2025.7.05.)
*총공회 발언/연구&gt; 16011 ‘온 후대의 목회자님께 올리는 소견’ 교인(2025.7.21.)

(덧붙여) 삭제 원함의 이유로서, 그 해결됨이면 게재할 명분이 전혀 없음이며, 애초부터가 토론의 목적이 아닌 것이며, 이 사안자체와 그 따른 문제성이 매우 무겁고 어두운 것이며 이를 누구든 볼 수도 있기에 마냥 게재는 이를 보는 시각에 따라 자칫 시험 들게 할 염려도 있음이며, 남에겐 (구원에) 유익을 주지만 정작 자기는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며 또한 지 교회와 (넓게는) 총공회의 울타리를 떠나지 않는 한 개인적 처신에 다소 자유로울 수 있음을 십분 이해해주셨으면 함입니다.
양성원 2025.11.08 15:31  
글만 적는 분들,
지난 날을 참고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모인 공회에서
지난 날은 잊어 버리고 없애 버리고 또는 모르면서 자기의 꿈을 그려 보는 분들

성경이 아닌 신학을 쳐다 보지 않는 공회
이 노선에 주신 사명 때문에 걸어 온 길을 모르면 일단 배우기를 원하는 공회
이런 공회를 집중하는 여기에서 순서를 따라 다시 배우시고 물어 보시고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교인 2025.08.15 12:34  
&lt;이에 분별의 지식이 짧고 스스로 이해가 부족하여 같은 말을 되풀이 하게 됨입니다. 처음부터가 양방의 어느 한분이라도 읽힘을 바람으로 올린 것이며, 그간 관련된 모든 것을 삭제해주실 적에 이하내용도 삭제해 주실 것을 정중히 요청함입니다. 주제자체가 무겁고 어두운 것이기에 관련된 모든 삭제가 오히려 문제해결에 도움 되지 않겠는지를 (삭제의) 한 이유로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댓글은 삼가 해주시며 자신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혼잣말형식의 덧붙임입니다.&gt;

(모든 양들도 주님 안에 한 몸 된 지체이기에 이에 응당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음이다.)

이 문제는 목회자님끼리 해결할 사안이며 그 잘잘못(옳음, 그름)은 주님께서 심판하심이니, 가르침을 받는 위치의 양들은 이에 무단한 관여나 관심 가져선 안 됨이라..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곳 통해) 하나님을 찬송하려하며 그 목적이 이끎대로 경영을 말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올리고자 출발된 것이면, 결국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목양을 위한 곳인 셈이며 따라서 주님의 양떼도 자연히 이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됨이라 생각해봄이다.

가정교회의 부모사이가 어떠함인지에 따라 자식들의 인격과 정서와 평안과 성장에 차이가 날 수 있음이다. (흔히 영적 아버지라 일컫는) 목회자와 그 양육을 받는 양떼와는 (영적으로) 떼어질 수 없는 관계라 봄이기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이 현상에 따른 영향을 (크게 또는 작게) 받게 마련이다.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하심을 얻음이라 말씀했다.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찬송하려는 총공회의 그 본산으로써, 당시 주님께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한 나머지 지극히 선한 것으로 좋게 여기심으로 받은 게 맞음일진대, 본디의 대의와 경영의 기준이 일찍이 사라졌는바, (판단은 하지 말아야하나) 주님의 몸 된 지체로서 그 배경에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음이다.

(한 울타리에 속한 동안) 내 주관과 고집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쌓지 않으려함이며, 이 현상에 대한 바른 인식을 마음에 새기고 그릇된 지식과 진리의 규모로 이웃에 변명하여선 안 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오늘날 총공회에 명하신 지식과 진리의 규모로 주님의 선을 실로 줄곧 좇은 그 실행으로써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올림을 주님의 양떼가 (실로) 목격하며 이로 평강과 긍지를 더불어 얻게 됨이 (온 지체의) 기쁨과 행복 됨이기 때문이다.
교인 2025.08.15 15:51  
(한 시선, 한 마음)

이 해결에 있어, 총 공회의 교리와 신조의 표방함에 합당한 그 시선을 어떠하게 확립해야함인지...

(배운 대로) 어떠한 일에 상황이 어려울수록 시선을 주님께 더 고정해야함이다. (그 곳이) 하나님영광위해 세워졌음이면 (온 지체가) 그 받은 기준대로 함께 믿고 준수해야할 충분한 그 근거(이유)가 분명 있음이라봄이다. 근데 (비유로서) 여태현상이 마치, 풍랑이 이는 물결 속에 빠진 듯 느낌을 받게 됨이다.

(일시 그럴 수도 있음이나) 긴 세월 미해결의 그 결정적 한 원인이, 애초엔 주님께만 함께 시선 둠이었으나 어느 순간 각기의 견해와 견지를 같이 둠으로 인해 본래의 시선이 분산됨으로써, 본의 아니게 주변 환경의 거센 바람과 풍랑에 휩싸인 게 아니겠는지..그 책임을 상대 쪽에 전가한 그 결말로 인해 (본의 아니게) 모두가 빠져버린 현상인지(아닌지)를 생각해보게 됨이다.

외적으론 진실 된 모습이나 실제적으로 마음과 행동이 주님께 향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미흡인 것이다. 일찍이 총공회가 받은 큰 은혜를 여태껏 복원하지 못함은, (정도의 차는 있겠으나) 양방간의 의사가 팽팽한 나머지, 주님의 본심에 시선의 고정을 경히(가볍게) 여긴 탓인지 (아닌 것인지), 이에 성령께서 탄식하심이겠음인지 (결코 아닌 것인지), 

또한, (총공회적 단위로 볼 적에) 한 시선으로선 주님께 두어 애초의 대의와 목적을 공감함이며, 다른 한편으로선 내적분쟁으로 인해 양방이 견해를 각기 품어 애초 함께한 헌신이 완전히 사라진 현상이, 오늘날 (총공회를 향하신) 주님의 통치하심에 피동 된 결말이겠음인지 (또는 아닌 것인지),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또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뜻으로 온전히 합하여, 라고 말씀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환경 때문이라며..(서로) 정죄하고 미워함이 맞음이라면, 그게 어디로 좇아남인지를 심중히 생각해보게 됨이다.

(성경에)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시편기자는) 두마음을 품는 자들을 미워함이라 선언했음이다.  외적으로나마 볼 적엔, (잘 아시는 대로) 애초에 총공회적으로 품겨졌던 순전한 믿음과 진정된 주관이 사라졌음이다. 모든 기도로 함께 약속인 하나님의 영광위한 경영이 멈춰져 공히 품었던 대의와 경영이 상실된 결말이 주님의 뜻에 거스름 된 모습인지 (아닌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됨이다.

서로 간, 불신이 깊고 생각과 신뢰가 부족하여 결과적으로 본래의 하나님의 뜻을 부여잡지 못하여 애초의 의미와 일을 실현코자한 소망과 열정이 보이지 않으며, 함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소산 없이 이러히 흔들린 모습이, 두 마음을 품은 결말인 것인지(아닌 것인지)를 생각해봄이다. 

(배운 대로) 분란의 틈새로 마귀의 시험이 오고 숨어들어 그 놀이터가 되어져선 결코 안 됨이기에 이의 방치는 믿음에 큰 손해인 셈이며 총공회의 성장(발전)을 결코 기대할 수도 없음이라 생각해봄이다.
교인 2025.08.16 18:47  
(고난, 리더십, 품위)

이 현상을 두고 볼 적에, (양방 공히, 또는 어느 한쪽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인지, 아니면 (정도의 차가 있는지 모르나) 양방이든지 (그 한쪽이든) 성경말씀에 불순종한 결말인 것인지..를 생각해봄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인 게 성경말씀이다. 근데 이 현상은 세상으로부터 받는 게 아니라 주안에서 일어난 현상인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함이면 모두가 한 형제이며,
따라서 (안 당해도 될 것을) 악을 행함으로 고난당함을 두고서, 지나고 보면 고난도 유익이라 이를 함부로(가벼이) 말할 수 없음은, 그 대가로 쓰러지고 (즉, 개인은 물론 온 지체적으로 상처가 되기도 하는) 고통당하게 됨이 일쑤인 것이다.

총공회가 그간 이를 풂에 있어, 그 수준과 리더십을 여실히 보여줌이다.

총공회의 자랑이며 (그 푸는) 열쇠의 한 면으로 ‘최고의 교리신조행정’도 있음이다. 어느 쪽이 (좁게는 개인이) 옳고 그름인지에 대한 서로의 논쟁(분쟁)을 석명하게 풀고 그 문제의 턱을(정도를) 뛰어넘어야 그 수준과 리더십에 실로 걸맞음이라 여겨봄이다.

이의 책임이 모두에 있든지 (그 한 쪽이든) 여하튼, 결국으로 한 몸 이룬 형제들이 (스스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품위를(품격을) 심히 떨어뜨린 셈이다. 긴 세월 경영이 없고 마치 어두움에 휩싸인 그 결말이 (선명히) 증명됨이다.

(맞는다면) 성경말씀에 비추어, 굳이 안 당해도 될 고난을 겪고 있고 미련한 셈이며, 따라서 양떼들이 이 그물에서 급속히 벗어나야함이며,
하나님 영광위한 성장과 발전 이룸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는 총공회의 (본래의) 정신과 품위가 오늘날 절실히 요청 됨이다.
차제에 단편의 예로 짧게 함이면, (이미 다 이시다시피) 한 지붕아래에서 따로 예배하며 꾸림이 어쩐 일인지..이는 서로 간에 마음을 닫고 사랑과 신뢰가 결여된 탓이라 보며 긴 세월 반복되면 처음의 어색함도 무뎌지고 만성되어진 듯, 일상이 되고마는 것이다. 여태 직분 자를 세우지 못하고, 성찬을 통하여서 예수님과 하나 되고 한 몸임을 고백하며 연합을 체험하게 하는 예식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다. 서로 갈리고 화평이 흐려진 환경 속에서 전도가 도시 제대로 되겠음인지, (그 환경 속에서) 믿음의 뿌리가 제대로 내릴 수 있음인지, 어떠하게 주님의 칭찬과 좋은 소문남이 되겠음인지..  심각히 생각해봄이다.

여전, 총공회를 총공회 되게, 교회를 교회되게, 생명의 역사를 여실히 이루어가려는 주님위한 전진에 공동의 리더십이 오늘날 절실히 요청됨이다. 하나님 영광위해, 총공회와 주님의 교회가 서로의 견해를 대의에 흡수시켜, 기어코 주님의 선을 이루려는 공동의 관심이 절실히 요청됨이며, 이로 지체 간 안도와 신뢰와 교계에 존경을 받을 수 있음이라 생각해봄이다.
교인 2025.08.19 19:10  
(주님의 눈이 지금도 불꽃같이 보고 계심이다.)

(평소 궁금한 점은), 긴 세월 이에 해결(점)이 없는 (한) 이유로서, 여태껏 각기의 견해가 주님께 절대복종함이 되는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이 현상은, 주님 안에 형제끼리의 분쟁(다툼)으로 비롯되고 그 결말인 것이라 봄이다. 그러기에 이는 굳이 안 겪어도 될 고난인 셈이라 여겨봄이다.

그런데, 장차심판대에 섰을 적에,

형제간의 대립으로 제각기 겪은 이 고난이 정녕 (제각기) 진리를 파수코자한 즐거움과 기쁨이 되겠음인지, 또한 양방 간 대립으로 인한 그 고난이 정녕 주님 면전에 부끄럽지 않은 산 행위로서 (제각기) 참예함인 것이라면,

어떠한 확신 때문이겠는지를 생각해보게 됨이다.

(구체적으로) 각기의 견해를 조금이라도 양보하거나 (뒤로) 물러서게 됨이면,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적에 무서운 책망을 받게 됨이라 확신하기 때문인지,
즉, (제각기로) 나 자신과 나와 뜻을 같이하는 (양)무리는 마지막 때에 (이에) 책망을 면할뿐더러 상급을 받게 됨이며, (그 견해를 달리한) 다른 쪽에선 큰 책망을 받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그 정립(확립)을, 성경대로 명확히 온 양떼가 지녀야만 마귀에게 속지 않음이라 여겨봄이다.

제각기로의 이 따른 행위를 놓고서,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다하다 장차 주님의 심판대 앞에 기쁨으로 설수 있음과 이 따른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됨이면,

그 확신할 (성경적)근거로서 무엇이겠는지에 대해 적극 이해하고 싶음이다.
이런 유의가 (의미,의향,뜻이) 아니라면 어떤 기인이기에 여태껏 이런 현상인지에 대해 더 궁금함이다.

아무리 자신의 견해가(해석이) 옳다하여 (제각기) 확신이어도 성경말씀이 기준 돼야 함이 상식인 것이다. 근데 그동안 서로대립에 있어 그 (성경에) 근거된 각기의 견해를 ( 소문으로 듣기만할 뿐) 공적으로 소상히 들어 본바가 (개인적으로) 없음이다.

고난이 유익이라 하나 형제끼리 다툼으로 인한 고난인 것이 어찌 성령의 생각에 연유됨이며 존귀한 고난이겠음인지..당면한 모습들이 어둠의 현상인 게 분명함이면 이 뒤엔 마귀가 숨어있음인지를 성경말씀으로 면밀히 살필 계제로 봄이다. 마귀의 조롱과 이웃에 덕이 안 될 뿐, 실로 (형제간에) 어떤 위로와 긍정적 선한 유익 되겠음인지를 생각해보게 됨이다.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말씀했듯, 이 불미한 불씨가 과연 어디로부터 왔을 지를 생각해볼 적에 마귀의 궤휼에 휘둘려 (본의 아니게) 속고 있음인지..를 생각해보게 됨이다.
맞음이면, (온 지체가) 일제히 즉시 대적하도록 이끌어 주실 일로 봄이다.

(심판은 주님께 있으심이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한 주안에서 한 몸 된 형제들일진대 여태 이 현상으로 인해 한 지체끼리 고난을 겪고 있음이 온 지체의 본의가 아닌 것이라 여겨봄이다. 온갖 궤휼에 휘둘린 나머지 교회가 사단의 놀이터가 되어져선 결단코 안 됨이며, 여전한 방치는 미래와 성장(발전)을 결코 기대할 수가 없음이다.

(절감하시다시피) 별 크지도 않은 교단이 이러히 갈라짐이 웬 영문인지..아무리 최고의 교리신조행정임을 자처하며 (대외에) 표명할지언정, 그 실행이 없게 되면 총공회의 성장과 발전은 물론 교계가 어떠하게 신뢰함이며, 이를 자랑할 만한 것이어도 그 선용 없으면 뼈대만 앙상해지게 될 뿐임을 (매우)근심해야함이다. 이미 (그 신뢰성을) 크게 잃어가고 있음인지를 우려해보게 됨이다.

이 현상의 초래가 주님의 책임이 아니심인데, (이를 두고) 머리되신 주님께 어떠하게 밝히 변증하겠음인지, 이로 어떻게 밝은 장래사를 펼쳐나감이며, 믿음의 신세대에게 어떤 비전을 보여 줌인지..를 생각할 적에 결코 총공회적으로 가볍게 여길 사안이 결코 아닌 것임을 심각히 우려할 수밖에 없게 됨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말씀했다. 애초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만방에) 발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심을 보고자 미리 정했던 게, 여태껏 양방 각기 소견대로 마치 길 잃은 양 같이 헤매는 모습인 듯 보여져선 안 됨이다. (서로가 팽팽하게) 이러히 견줌이 과연 약한 것을 자랑하여 강해지고자 함을 좇은 방편이겠으며, 총공회의 긍지와 품격에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이로 밝은 오늘과 장래사를 기대할 수가 있음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오늘날 이 대한 온 지체의 ‘영적인식’이 절실히 필요 됨이 맞을진대, 온 목회자님의 적극 이끌어주심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라 여겨봄이다.
교인 2025.08.20 18:44  
(이 현안의 심각성과 앙망함)

(거듭으로) , 이 문제의 그  심각성에 대한 '영적인식’이 오늘날 (온 지체에) 절실히 요청됨이다. 이 현상이 어떠하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 모습’이라 실로 증명할 수 있음인지에 대한 영적분별이 절실히 필요 됨이다.

그 세움 받은 결정적 한 이유로서, 어둠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고 있는 세상에, ‘생명의 빛을 발하며 하나님의 찬송을 전파’하기 위함일진대,
긴 세월 이 현상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하신 주님의 명령에 실로 즐거워한 준행이라 볼 수 있음인지,
(누워있는 듯 앉아있는 듯 땅속에 묻어둔 듯) 모습이 바로 흑암의 권세에 휩싸인 현상인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역사하심에 기인되고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위해 일어나 빛을 발한 모습이겠는지,

주님의 명령을 힘써 이룸으로써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심이며 그 반사로서 빛을 발함일진대 도리어 어두움에 휩싸여 본래의 역할이 완전 무산 된 곳에 여호와의 영광이 어찌 임하시겠음인지,

애초 주님께 받은 은혜의 복을 입은 빚진 자의 도리이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모습이겠음인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어떠하게 경험함이며 진리로 불의를 쫓아내는 신성을 보인 현상이겠음인지,
하나님의 복음위한 은사적 지혜와 지식의 진행인 것이며 그 결말인 것인지를

(온 양떼가) 심각히 분별해보아야 할 중대한 계제로 여겨보게 됨이다.

엘리 집안이 망한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거두어 가셨기 때문이며,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면 끝장이 되고 마는 것임이다.

(마치 흩어진 뼈들이 맞춰지고 살이 붙듯), 각 사방에서 일어나 주님께로 모여 생명의 빛을 발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면 사는 길인 것이며, 비록 현실은 총공회의 장래가 심히 우려됨이라하여도 함께 일어나 그 살 길을 찾으면 필히 소성케 됨이 성경에 따른 이치인 것이라 여겨봄이며, (복음을) 믿는 자는 빛의 자녀이기에 어두움에서 기어코 벗어나 광명으로 필히 나와야만 참사는 길이라 여겨봄이다.

또한, 긴 세월 이 현상에 빠지게 된 그 결정적 (주) 원인이, 오늘날 모든 목회자님에게 있음인지, 아니면 가르침 받는 온 지체에 있음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지체들에게 (조금이라도) 있다함이어도 (양떼에게) 급속히 깨우쳐 주실 책무인 것이며,
그 (결정적) 주 원인이 목회자님들에게 있음이면, 그 연대적인 책무를 (말씀 앞에) 필시 (준)행하심으로써 (항간에) 직무유기 됨이란 일말의 오해마저도 불식해져야함이다.

이 해결위해, 주님의 면전에선, 온 지체각기의 모든 이론과 생각을 파하며 각자에 매인 멍에 메고서 주님께로 돌이켜 섬이, (성경적) 도리임이라 여겨봄이다. 이사야서 특유의 소성케 되는 회복의 말씀을 교훈으로 회복의 역사를 이루려 함께 모여일어나 빛을 발함으로써 여호와의 영광이 주님의 양무리 위에 임하심을 누림이 (온 양떼의) 큰 기쁨이며 행복인 것이라 여겨봄이다.
모든 견해를 주님 앞에 다 맡기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뜻을 구해야할 중대한 계제로 여겨봄이다. 그 심대히 큰 역할로서 (개별공회 초월한) 오늘날 후대의 목회자님들이 이 현안해결위해 一路나서실 적에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음이라 생각해봄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명실 공히) 복된 산실로서의 충족을 주님의 양떼가 급속히 목격하기를  간절히 앙망해봄이다.
교인 2025.08.21 18:21  
(어두운 현실과, 형제의 연합)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신실히 알고 전파코자 동일히 받았던 보배스런 은혜를 여태 함께 품지 못한 모습이다. 애초 총공회적으로 이루고자한 주님의 의의 도를 분명히 알고 그 받음대로 거룩한 명령을 지켜 행하고자 했음이 맞을진대,
지금까지 그 따른 흔적이 전혀 안보임은 결국, 주님과의 신뢰를 저버림이며, 서로 권하여 세운 주님위한 보증과 약속을 파기한 셈이다.
이 문제를 두고 피차의 견해가 (엇)갈려, 나와 내 쪽은 주님의 뜻과 복음을 순종함으로서 주님께 영광돌림이며 마지막 때에 책망의 심판을 면함이라면, (양방 각기로) 명확한 그 성경적인 명확한 근거가 무엇인지,
이 문제로 인해 제각기 분명 고난을 겪고 있음이며, 이는 바로, 주님위해 (형제인 상대에게) 고난을 받고 있음이 (제각기) 분명한 주장(견해)이라면, 그 성경적인 명확한 근거가 무엇인지,

믿는 자의 일상(신앙생활)이 신의 성품에 참예함이어야한다고 배움이다. 믿는 형제간 분쟁으로 피차 당한 고난이 분명코 믿음에 손해인 것이다.
이를 굳이 취함으로써 진리의 도가 훼방 받고 주님의 양떼가 이저리 시험에 들며 害를 입게 되는 현상을 두고, 신의 성품에 참예한 것이라면, 주님의 양떼가 시급히 그 소상한 설명을 밝히 듣고 분별해야함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133:1~3).
(모든 문제를 우선차치하고서라도) 그곳에서 아름다이 연합된 동거를 양떼가 실로 목격할 적에,
(양들의) 즐거움이 되고, 그 (실행하심에) 모본과 본심을 신뢰하며 뒷모습을 보고 따를 뿐더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산 거울이 됨이라 생각함이다.
기필코 복원하여 일으켜 세움이 참사는 길이라 여겨보며, 후세대 목회자님의 그 중심된  중재의 역할이 실로 있으시기를 간절히 원해봄이다.
교인 2025.08.22 18:38  
(온 공회적 기도의 선포를 바라며)

그곳이 마치, 하나님의 의가 마른잎사귀같이 시들었고 죄악의 바람에 휘말린 듯한 모습입니다. 이는 애초 (총공회가) 입은 은혜를 극구 부인(사양)함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 봄입니다.

이럴진대, 하나님을 믿는 자가 어찌해야함입니까? (배운 대로, 말씀처럼)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슬퍼하며 함께 울어야함이라 생각함입니다.

(양방 간에 줄곧), 누구 때문이라..이 저런 환경 때문이라..마냥 (서로) 상대에 전가하고만 있음이면 회개할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제각기) 다른 쪽이 반드시 속히 회개하고 돌아와야만 (이 문제가) 해결됨이란 의지는 (인간본위에서 비롯된) 상대논리에 속함이라 생각함입니다. 그 (논리와 논쟁)에 빠지는 경우, 주님 면전에서의 기도의 영역이 아니라 봄이며, 오직 심판자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간 모두가 겪은바 대로) 사람의 능력에 한계가 있(었)으니, (성경대로) 주님께 ‘기도라는 축복의 지렛대’로 (주님께) 온전히 함께 맡겨버리면 주께서 필히 역사하실 줄로 믿게 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할 적에 그 놀라우심을 드러내심이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법대로 해결해 주실 것을, (온 지체가) 함께 인정하고 그 믿음으로 (주님의 면전에) 무릎 꿇음 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도는 주님의 영역에 맡김입니다. 그 기도가운데 주님이 (영적인 눈으로) 보임이라 배웁니다. 먼저 기성세대가 그 믿음의 자세를 보여야 (믿음의) 후손들이 (그 뒷모습을 보며) 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진작 이러히 발등에 불이 붙은 듯, 지경임에도) 주님께 기도의 자리에 마저 함께 기어이 나아가지 못한다면, 아직도 시선과 그 초점을 주님께 함께 두지 않은 증거라 여겨보게 됨입니다.  &lt;다음에 이음&gt;
교인 2025.08.23 12:32  
이 현상은,  총 공회란 한 울타리에 거한 하나님의 백성들 간에 초래된, 분명히 어두움인 것입니다.
그 어두움을 마치 (해밝음처럼) 속이며 주관하는 세력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 애초 (총 공회적으로) 공히 세운 믿음을 빼앗긴 결말인 게 분명코 맞는다면,
이에서 '급속히 함께 벗어나야'함이며, 주님 앞에 진솔히 (앞서 언급한)그러함의 고백이 당연히 (함께) 있어져야함입니다.
각기의 (품은) 소견으로, 다른 한쪽이 (그 잘못을) 인정하길 바라며 맞선 그 세월이 얼마인지..
(마냥 세월만 흘러 보낼 게 아닌),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 이 혼란에 빠진 그 책임을 (온 지체 모두가) 급속히 인정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고자 그  확실한 도모로서,

'총 공회적인 기도'의 필요성이 절실하며 그 시급히 요청됨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외에는 (자기를) 구원할 자가 없음을 고백했듯이,
오늘에 총 공회적인,  ‘합심기도주간을 선포’함입니다.

다음세대의 바톤을 (이어) 받으신 목회자님들이 이 (기도)운동에 적극 앞장서시며, 그 몫(역할)을 일익 감당하여 주십사함입니다. 이 문제에 직접 무관한 목회자님들이 (이에) 비교적 자유로울 수가 있음입니다. 그 역할을 충분히 소신껏 감당할 수 있도록 온 교회가 적극밀어주심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닮은 연합으로, 주님면전에 철저히 회개로 나아갈 적에, 구원의 주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심이라 배웁니다.
그 놀라우신 방법을 들고 계신 전능의 주님 앞에 양방의 지정의를 온전히 다 내려놓으며,
함께 간절히 기도함이면, 권능의 성령께서 선순환의 길로 선명히 열어주심이라 확신해봄입니다. 

‘새삼스레..이게 무슨 소리냐? 그간 늘 기도해왔는데..‘괜스레..굳이 그럴 필요까지..’하는 (한편의) 핀잔이 귀에 웅웅거림만 같습니다. (이 진상의 급절함을 직감하여 기도함인데) 이 운동에 마저 참여를 마다하는 경우, 늘 주님의 칭찬만 받는 교회인 셈입니다.
교인 2025.11.22 20:24  
<가로 폭이 점차 짧아져 <25.11.9>의 내용에 이어, 부끄럼가지며 너절하고 두서없이 (혼잣말형식으로) 올리게 됨입니다.>
<성경 인용에 있어, 그 (말씀의) 인용이 신구약의 배경이나 문화의 양태도 살피며 (성경)저자가 의도한, 본문에서 도출된 원리에 입각하여 해당구절이 속한 전체의 맥락을 잘 이해해야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려거나 본문의 객관적인 문맥을 고려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함이며, 이 현안(현상)에 따른 적용이 본문의 넓은 문맥과 원칙에 맞고 그 원래의 의도를 광의로 인용하여 이에 반응하고자한 적용이어야 함인데, 성경과 그 신학적인 지식도 심히 부족함이며,  단지 그 내용에 관련된 부분적 (성경)단어나 구절의 함축성에 따른 적용에 생각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의 실천면에 부분적 적용의 폭을 넓혀보고자 함이며,  더러 여타의 인용으로써 단순히 비춰본 것일 뿐이며, 용어나 내용적인 반복도 더러 있음입니다.>

(개인적이며) 그 다음으로서,
강인한 심령으로, ‘총공회적 개념의 재정립(확립)과 그 진보위한 적극적인 모색’이 절실히 요청됨이다. 그 축소적 면으로써, 애초에 (그 양성원을) 세운 의미에 따른 행동의 기준을 명확히 하며, (총공회의 상위개념인 특정과 그 성질에 따른 하위개념을 정의하는) 명명적(내포적) 정의를 아울러 굳건히 확립하는(세우는), 온 공회적인 일관된 과정의 작업이 요긴 됨이라 생각해봄이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애초엔 그 주님의 뜻을 따르고 역사해주심을 믿으며 총공회적으로 예정되고 공유한 기업이 (맞음이면) 이 현상은, (상세한 내부적인 면은 모르나 외부적으로 볼 적엔)  마치, ‘뼈가 어긋난 것 같음이며 여태껏 이를 바로 잡아 맞추지 못한 형상(형국)이다. 총공회가 분산되어져 애초의 총체적인 것이 서로 어긋남을 어떠한 방법으로써, 주님께서 총공회에 그 기업을 맡기심에 대한 그 역할과 사명과 은사에 맞게 건강한 자긍(심)으로 반응해야함인지를 생각해봄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는 힘으로 밀어붙여 이루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섬김을 통해서라 생각함이다.
(일반으로) 현실에서 분명히 목격하면서도 덮고 감이, 물론 나도 죄를 지을 수 있는 똑같이 연약한 존재라 하여 스스로 피하며 또한 머리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음에서라면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됨이 아닐지..,그렇다고 반대의 극단으로서 다른 지체들을 함부로 서로 지적하고 정죄함은 율법적인 대처라 함에 굳이 휘말리지 않으려 함에 연유됨인지..,어떤지를 생각해봄이다.

그런데, 애초에 공히, 품은 그 일은, 총공회적인 기업에 보증이 되신 주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이며, 또한 이(애초)의 통일된 사업은 서로(더불어)가 아니고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이다. 따라서 각기 맡은 역할의 필요를 공히, 참예로써, 때론 주님의 지체들의 연약과 실수가 있음도 온유한 마음으로 서로 바로잡아주며 (함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함이 매우 지당함이 아니겠는지..,를 생각해봄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한 교회목양자의 사명이심도, 각 지체도 그러하듯) 다른 사람이 대신 져줄 수 없는 ‘자기의 짐(갈6:5)’도 있는 반면에,
홀로는 질 수가 없고 서로(더불어) 져야할 짐도 분명히 있음일진대,
애초에 비교할 적에,
그곳에서 함께 일궈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착하고 충성된 종’의 짐이 분명코 있으심이며, 그럴진대 그곳에서 주님의 종의 배출을 위한 정상가동을 위해선, (이는 선택이 아니며) 주님의 명령이신 오직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심의 풍요로운 관계의 설정과 그 실천이 급선무라 여겨봄이며,
그런데, 애초에 반한 이 현상은, 그곳에서 배우고자한 ‘예언의 말씀’을 멸시함(하찮게 여김의 행동)이 되고,
그곳에 임하시어 역사하실 성령의 인격을 무시함이며, 또한 그 조명하심을 소멸하는 행위이며 애초의 주님의 뜻에 불순종한 결말인 것인지 (아닌 것인지),

여태껏 현상이, 정녕 옳은 길로 향한 결말인 것이면 그 열심을 더할 수밖에 없음이며, 이게 결코 아닌 것이면 애초에 공히, 그곳 통해 이루려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이겠음인지..를 심히 찾아야함이며, 그 한편으로 이 현상에 있어, 양심을 통해 알려주시는 감화 감동을 소멸치 말아야함이 합당함인지(아닌 것인지), 또한 필시 이(현상)에서 속히 벗어나야함인지(아닌 것인지)를 또한 생각해보게 됨이며,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내내 이 현상이어도, 각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음에 따라 애초를 마다함이어도 그만인 것인지(아닌 것임인지), 또한 하나님의 영이 각기로 임하심에 그 따름이기에 이 현상에 있어, 굳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아야할 하등의 그 이유가 없음인지(아닌 것인지), 또한 이 현상을 두고서 애초의 시작과 마지막(지금)의 비교를 어떠하게 분별해야 그 성경적인 합당함인지,

이 현상이, 총공회를 통해 이 일을 이루게 하시려고 보증으로 주셨음을 믿는 모습인지(아닌 것인지), 하나님의 영이 모두의 위에 공히 임하신 그 분명한 결말이 아닌 증거가 서로 고난을 받고 있음이며,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없듯이’, 성도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한 입으로 찬양도하고 저주도 할 수 없음이며, 내(또한 우리)속의 근원이 바르다면 그곳에서 나오는 무엇이든 (또한 애초의 대의와 그 목적에 비할 적에도) 아름다운 ‘하나’여야 함이란, 생각을 해봄이다.
교인 2025.11.25 19:18  
신앙과 행위의 불일치와 문제점>
여기에서 행함(행실)이란 신앙적 행위를 의미함이며,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게 됨이다. 여태껏 그 행함이 행함 되지 않음이(그 원인됨이), '애초 세운 총공회적 대의를 하나’로 믿고 따름이 아닌 게 주요 요인이며, (맞음이면) 그 다양한 분야에서 ‘복음의 가치’부터 다지는 것이 (총공회적으로) 매우 긴급하게 해결해야할 중요한 현안이라 생각해봄이다.

<참된 신앙의 부재: 신앙은 행위를 수반해야하며 신앙과 행위가 분리 되면, 그 신앙은 진정한 것이 아니거나 피상적인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믿음을 죽은 믿음(약2:17)으로 간주함이다. 행위는 신앙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자 증거이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의 열매로 인정 될 수 없음이다.
삶의 모순과 위선: 신앙인으로써 비신앙인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거나, 오히려 더 좋지 못한 행동을 보이면 신앙의 진정성이 의심받게 됨이다. 이는 개인의 영적 혼란을 초래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독교전체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든 요인이 됨이다.
열매 없는 신앙생활: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여 성장과 변화를 이루는 데에 있다. 신앙이 행위로 이어지지 않으면 이러한 변화와 성숙이 나타나지 않으며, 이는 열매 없는 삶으로 이어짐이다.
하나님 주권의 불인정: 교회와 세상,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분리하여 신앙을 특정 영역에만 국한하는 것은 하나님 주권의 온전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이다. 신앙은 모든 영역에서 적용되어야함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신앙과 행위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신앙은 행위의 기초, 행위는 신앙의 증거), 이 둘이 일치될 때 비로소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음이다.(인용)>

애초에 단일이었던 총공회(교회)가 그(애초 된) 방향이 잘못되어 시대적으로 막대한 아픔을 겪고 있음이다. 이는 총공회의 큰 손실로 여겨봄이다. 그 한 예로서 요즘, 총공회단위의 점유로써 공유되어야할 이권(이익, 권한)이라 봄인데, 어느 특정되어진 진영의 독점적 행사로 대립각이 세워진 현상은 기존의 통념에 반대됨이라 생각함이다. 따지고 보면 각 공회(교회)도 세상 만물이 궁극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이시며 주권아래 있음이다. 
교회 내, 분란의 사이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이 끼어 있음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 중재자, 화해자, 그리고 문제해결의 중심이 되심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빌려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음이면 그 결과를 얻기 위해 사용된 방법이나 수단이 (성경과 도덕적으로라도) 그 정당화될 수 있음인지, 갈등이나 분쟁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거나 이득을 취하기 위해 예수님의 권위나 가르침을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됨이라 여겨봄이다. 이 모습이 (성경적으로)어떠한 해결책을 찾는 역발상인지, 이 행위(또는 주의)신앙이 어떠한 가치관의 이데올로기에 끼여서 나타나게 된 현상인지, 그게 아닌 것이라면 어떠하게 성경적으로 밝히 근거된, 그 정당화함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순전히 개인생각이며) 가령, (전체적)합력으로서는 (의견이 분분하여서) 도저히 진전이 안 되니 우리라도(어느 한편이라도) 그곳을 이용하여 온 교회와 교단의 성장에 기여해보고자 함이면 긍정적인 면이다. 그러나, 그에 기력과 열정을 쏟기보다는, 그 합력으로써 ‘선’을 이룸에 쏟음이 더 대의적 긍정됨이라 여겨봄이다.
(어느 쪽이) 기어코 차지할양이면, 그 양보하는 대신 (조건으로써) '주님오실 때까지' (아니면 온 공회적인 전원일치가 있을 때까지) 각 공회가 때론 합력으로써 또한 각 공회적으로 자유 껏 사용토록 함이다. 이마저 없다함이면 어디에 쓰려 그 세움인 것인지..,

이것도 안 됨이라면, 긴 세월 마냥 묵혀(묻어) 두기보다 그곳을 일괄 정리하여 나눔 받아 주님과 복음위해 각기대로 힘써 잘 선용함이며, (여전 분분함의 지속이면) '온 교회의 의사를 투표’로 물어 봄도 한 방법이라 여겨봄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을 믿는 자에 역사가 일어남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희생하고 수고한 것만 남음일진대..세월이 너무 짧음이다.

행함의 가치와 진실함으로 사랑> 신앙생활에서 어떤 행위와 그 동기가 사람의 생각과 신념에 의한 것이면 곤란해짐이다. 그것이(주관적 관점, 경험, 생각에 기반 한 의미가) 신앙생활에 적용될 때 (때론)생명의 원동력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다 아심대로) 전적으로 그것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관계 및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함이다.
살리는 역할이 예수님의 역할이시며 교회와 성도의 할 일임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1,3:15)’.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살인하는 거와 같고 마귀의 종노릇함이 되는 것이며, 사랑하고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함이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세상이 짧음이다.

‘주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오늘날 충성 되게 여기시어 그 직무를 받았음인데, 애초에 온 교회의 심비에 공히 새겨졌던 믿음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정상적인 작동’이 (여태) 되지 않음이다.

이를 두고, '(총공회란 단일교회와 개 교회를 집합에 비유’하여 볼 적에,

그 실천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며 비판하고 정죄함으로써, 애초의 그 ‘행함과 가치’를 분리시켜 말함이면, 즉, 애초의 ‘총공회란 전체집합’으로써 행함이어야할 가치가 분리됨은 그 본디에(비교하여) 위선이며 진실을 비켜남인지(그 반대인지),
각(또는 무리의) 지체된 성도는 전체 몸의 부분(지체)으로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이다. ‘각기의 정립된 규범으로써 애초를 달리함은 전체집합의 불완전한 부분집합’일 수 있음이다. 따라서 각기의 주장을 성경의 가르침과 그 맥락으로써 겸손하게 이해하려는 (성도됨의)자세가 매우 중요함이라 생각해봄이다.

고린도전서 등에서 언급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비유는, ‘전체(몸)와 부분(지체=부분집합)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잘 보여줌이라 여겨짐이다. 애초에 모든 지체가 공히, 정말 (진리에 맞는) 정의로운, 예수님 마음을 품(었)음일 진대는 ‘애초에 그 연속성’이어야 합당함이라 여겨봄이다. 그 연속성에 초점이 맞춰진 예표나 주장이 총공회 전체단위의 이익과 결정 등, 그 이익과 행복에 부합하여야하고 그 목적추구의 공공선에 맞춰져야함이다.
그게 아닌 경우엔 이기적인 투영이라 보아야함인지(아닌 것인지), 그곳을 두고, 주님의 주권과 섭리에 따라 서로 간의 이해의 한계와 교회공동체 내의 각기의 역할이 오직 믿음에 근거 된, ‘하나로 행함이라야 전체집합에 걸맞으며 그 유효'함이지 않겠는지를 생각해봄이다.

이 현상은, (비교로서) 각 공회의 소의가 총공회교회의 존재이유나 그 이룰 대의와 목적에 충돌이 됨이라 여겨봄이다. 이 문제의 지속이, (서로 간) 너무 믿음을 강조한 나머지 행함이 없음인지, 믿음은 동일인데 그 행함에 있어서 각기 의사(의견)의 불일치 때문인지.., 이는 애초를 여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믿음이 없기(또는 작기)에, 공히 이루고자한 그 생산을 위한 양보도 (서로 간) 아예 없음인지(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겠음인지),
각공회의 세계를 보전하고 청지기적 사명을 살아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옳고 정당한 명분도 갖췄다고 본다하더라도, 그러나 그 각기가 총공회교회의 존재이유나 최종목표로 포장 될 수 없다고 봄이며, 만일 그렇게 될 적엔 행위주의 신앙의 발로가 됨이 아니겠는지(아닌 것인지)를 생각해봄이다.

‘행위주의’의 비극은 자신들이 실천한 행위를 타인이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에서 나타남이다. 다른 공회를 비판하면서 우리 공회에만 초점이 놓여있고 그 행위만을 타당 시 함은 총공회교단의 정체성을 (자칫)상실하게 함인바, (행여나) 행위주의로 흘러가선 결코 안 됨이라 여겨봄이다.
(그럼일 진대는) 개 교회들을 넓힌 몸의 형성과, 온 지체의 유대감, 복음전파위한 공동사역,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교리와 신학적 노선이 일치하며 신앙의 안정성을 확보, 사역의 효율성 증대, 개교회의 성장을 돕는 등, 교단의 제반 (총)의미에 따른 조직의 필요성과 그 이룸의 명분이 무엇이겠는지.., 그 소속됨에 비협력이 됨이면 그 속할 명분이 희석되거나 없게 됨이라 생각해봄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으심’이다. 그런데 이러한 멈춤이(이런 모습의 결정적 이유로서) 주님의 후회하심 때문에 (이러히) 멈추게 된 것임인지(결코 아님이면 그 무엇인지), 그 세운 동기가, 성령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돌보고 섬기는 목회자양육을 위함이라면, ‘이에 일도 그 과정도 예수 안에서’ 해야 함이며,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함께 (이를) 굳건히 세워가야 함이 마땅함이라 여겨봄이다.

그곳에 세워진 게 우리 주님을 위함이 맞을 진대는, 주님께서 그 주인이 되시며 총교회를 통해 만들어 가심이라 여겨봄이다. 그런데, 여태 이 현상은 매우 부정적이고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음이며, 이는 실로 어두움의 모습인 것인지(아님인지),  (이로 보건대)
애초에 그 세움(총교회와  유지, 사명부여와 능력, 인도하심과 동행 등)이 성령의 개입과 역사하심에 의함인지, 즉, 성령의 주도적 이끄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피동 된 현상인 것인지, 아닌 것이면 어떤 주체의 영향력 아래 놓여 피동 됨인지,
(구체적으로) 애초를 벗어난 이 모습이, 어떤 선을 이루고자한, 성령의 역할과 역사에 따름인지, 아닌 것이면 어떠한 역사에 따른 역할인 것인지,
(반복이며) 궁극적으로 그 세우신 이도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을 위한 곳이며 주님의 은혜일진대 애초에 받은 주님의 은혜를 상실함에 대한 분별의식을 (주님의 면전에서) 깨워야함이 마땅하지 않겠음인지, 세상은 점점 악해져가고 분별의식은 무너져가는 현실 속에서, 최고의 교리를 자처(자부)하는 교단이면, (이를 마다한 그 이유로서) 무엇에 대한 행위 쌓기에 급급함이기에 여태껏 이 현상인지..,
 
이 모습이, 애초의 결과로서 행해지는 행위를 산출하여, 공히 품은(품었던) 믿음이 활동적이고 살아있음을 증명함이며 그 속에서 실천되고 있음의 증거인지, 이와 반대로 애초의 믿음과 행동이 없기에 더욱이 살아있고 활동적인 믿음이 보여주는 능력이 없으며, 살아있고 활동적인 믿음이 지탱되고 지지되고, 하나님의 영으로 무장되고 가능해져서 열매를 맺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림의 모습인지, 애초에 믿은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되고, 그리스도를 통해 의도된 열매를 맺을 때를 그 증거로 삼고자 한 행함일 적에 양떼의 마음이 혼잡케 되지 않음이라 여겨봄이다.

지금의 행위나 동기가 애초에 받은 은혜에 대한 그 합당한 반응인지를 냉철히 점검해보아야 하지 않겠는지.., 어떤 문제나 현상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 주님께 받은 은혜에 반응하며 그 합당한 행위인지를 세밀히 점검하지를 않고 무분별하게 활동할 때 교회는 ‘분열’됨이다. 서로 분열 되어 싸우는 것은 그릇된 행위(또는 주의)의 대표적인 예시이며, 각기의 의로움을 앞세워 타인을 정죄하는 행동은 (받은 주님의) 은혜가 부재한 사람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행태이라 함에 공감 됨이다.  그 행함이 (바른) 행함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애초 총공회 교회안의 대의를 하나로 믿고 따름이어야함이며, (맞음이면, 거듭하여) 그 ‘복음의 가치’부터 다지는 것이 (총공회적인) 매우 시급함이라 여겨봄이다.

각각으로 의롭다함을 앞세운 나머지 다른 양 무리를 정죄하는 행동은, 애초에 받은 은혜가 부재한 것임을 보인 현상인 것인지, 나아가 그 일을 중심하여 거룩한 ‘행실’에 따른 총공회적인 감격이 없기에 그 회복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견지하고 (그 애초 된) 공동의 목적과 이익위한 공공선(公共善, 공동선, 공익선)의 추구와 그 행함’이어야 마땅하지 않겠음인지를 (거듭)생각해봄이며,

그러하다면, 총공회의 분열과 제반 어두운 면을 어떠하게 성경으로 풀어 (문제들을) 해소해야함인지에 있어선, 오늘날 양 무리의 목양자의 위치에 서신 온 목회자님의 몫이시란 생각을 (거듭)해봄이다.
교인 2025.11.27 20:21  
소의와 대의>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서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고자함이며, (성령이 거하실 영적인 집으로 세워진) 아름다운 처소라는 생각을 해봄이며,  그 맥락으로, 교회의 갱신을 위하고 선한 유익과 그 가치를 여일 추구함에 있어,
개 공회와 총공회의 두 면이, 상호 충돌할 시엔, 어느 쪽으로의 실행이 그 우선(성)이며 필수여야 함인지, 즉, 각 공회의 부분된 가치와 유익이 총교회단위보다 우선 됨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의 영광에 충성된 총공회(단위)임을 중시하여, 그 정당성이 부여된 ‘전체규범을 선점함으로써의 시행’이어야 함인지에 그 영적분별이 필요됨이라 생각함이다.

총교회의 발전(성장)을 위해선, 때때로 개인이나 개 공회의 명분이나 이익을 크게 양보하고(희생하고서), 총교회의 도의나 이익(유익)을 우선시하여 그 목표에 집중이어야 하며, 이에, 최대 행복의 궁극적인 의미를,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서 찾음이어야함이 합당함이라 여겨봄이다.
이는, 주님의 몸 된 최대다수인 총교회(단위)의 성장과 그 존속으로써, 그 행동의 동기와 결과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인하여,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롬11:36,고전10:31) 즐거워하는데 필수적 '요소'로 간주됨이라 여겨봄이다.
단, 전체규범으로의 시행 시엔 인위적인 강제로서 선점하기보다, ‘각 공회의 가치와 규범과의 엄격한 분리는 인정’하되, ‘총공회단위(체)의 대의적 가치와 권위나 규범과 질서로 귀결된 구성이, (개 공회보다) 우위’에 있음이라 여겨봄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는 것은, (교회내의 물리적인 외침이 아니라) 모든 생각을 바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데 있음이다. 인간이 만든 복잡한 신학이론이나 교리 논쟁을 넘어서 교회 내부에 축적된 복잡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해석들을 비판하며, 본래의 단순하고 근본적인 진리로 돌아가야 함이며, 어떠한 세부규칙에 대한 이론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라는 ‘복음의 핵심 가치에 집중’해야 함이란 말에 공감됨이다.

여태껏 이런 짜임새는 애초의 모든 참예된 모습이 아닌 것이며, 이는 애초의 실재적 총 교회구조(이론,조직,성격,상호관계 등)의 ‘변화’라 여겨봄이다.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나 외부적 면으로 보건대) 이는 내부에 있는 여러 요소와의 유기적인 연관에 조화로움을 파함이기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 여겨보기 어려우며. (비유적으로) 애당초의 길 된 좌표(일의 목표와 상황, 기준의 방향성, 일의 정상적 궤도)가 뒤틀린 현상인바, 그 본래의 작용을 보게 하는 (온 지체의) 책임적 연합체로의 모습이 아닌 현상이라 여겨봄이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의 각 부분이며,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심이..’.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이 성경말씀임이다. 그런데 (잘못 봄인지..) 오직 함께 권하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함이기(히10:24~5)보다, (긴 세월에 걸친 온 지체 된) 서로가 서로에 너무 지쳐있음이라 느껴짐이다.
하나님의 사업은 ‘하나’이며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곳에서 줄곧 씨를 뿌려야하고 죽어야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남인데, 분쟁으로 인하여 총교회적으로 그 씨 뿌림도 아예 없(었)음이다. 긴 세월 이럼 가운데, 서로가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음이 아닌 것이라면, 모든 지체가 이로 어떤 영광을 얻음인지.., 애초에 하나님 영광위해 지음 받았음을 기억해야함이며, 애초의 (총교회적) 그 선한 사업이 무너졌기에 믿음에 손해가 될까를 실로 두려워해야함이라 여겨봄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아야함인데, 이 현상이 실수가 없는 것이며 능히 어두움의 굴레 씌움을 벗어난 현상이라면, 어떠하게 이에 긍정이 될 수 있음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애초 설립됨이, (사람에서 난 게 아닌) 주님의 뜻을 따라 난 것이면, (각 지체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하려하심인데) 이 모습이 어떠하게, 그 따른 믿음에 유익하려 함인지.., 이는 애초에 주님의 말씀에 따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려한 모양새와 반한 것이며, 주님으로 좇아 난 복음이 (마치)갇힌바 됨이라 여겨봄이다. 그러기에,
애초 총교회가 주님 앞에서 함께 이루길 약속했던 것이면,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됨이며,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온 지체가 ‘아멘’으로써, 함께, 그리스도안에서 견고히 해야함이라 생각함이다.

애초 총교회의 공통된 규례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확산하는 일에 동참하고 헌신하고자 한, 즉, 복음사역에 있어 귀한 짝(동역자)’함이었던 게 맞음이면, 이에 다른 비교가 없어야함이며, 문제가 있다하여도 지혜의 온유함으로 행하여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함이면 (모든 문제도) 자연 해소되지 않겠음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칭찬은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받을 때 진정한 의미가 있음이다(잠27:2). 그러나 더 중요함은 (인간이 아닌) 주님께 인정받고 칭찬을 받음이다(롬2:29).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면 그만인데, (그곳에선)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와 사명을 책임감 있게 이행하지 아니함이라면, 아무런 칭찬 받을 소지가 없게 됨이다. 이 현상이,  애초에 (모두가) 품은 주님위한 복음을 위한 대의를 업신여김 됨이며, 이는 결국, 하나님의 복음의 가치를 천대하고 무시하며 경멸함이 되는 결말이 아닌지..를 근심해봄이다.
그럴진대, 이는 (애초에) 총공회가 부요로 받았으나 그것을 뒤로 제쳐두고서, 빈궁을 (스스로) 자초한 모습됨이라 생각함이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며,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적에, 장차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착하고 충성된 종의 인정과 칭찬하심을 (저마다) 받겠음인지를 생각해보게 됨이다.
교인 2025.11.28 15:24  
은총과 계시적인 면>
(이러한 비교 자체가 무리나 잘못된 것인지 모르나), '(애초) 그 일에 사명'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날 총교회가 받은 ‘특별 은총’에 속함인지, 아니면 보편적으로 베풂 받은 ‘일반 은총’에 해당됨인지,
그 세워진 대의(옳은 명분이나 가치)나 목적(나아가야할 방향, 최종적 목표)이, 주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특별한 선택과 부르심을 받아 총교회가 마땅히 지키고 행해야할 큰 도리이며, 추구하는 크고 옳은 목표라 여겨봄이 합당함인지 (아닌 것인지),
총공회가, 주님의 주권적인 계획하심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특별하신 의지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지혜가 총공회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식), 선택으로 받음 된 것일 진대는,
그 단순한 이유를 넘어, 진리를 따라 받은 은총의 의미와 목적과 성령을 통한 내적 역사하심..에 감사와 순종으로 응답하며, 이를 통해 주님의 교회의 성장과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능력과 복을 받게 되는, 그 정당한 명분이 있음이라 여겨보며, 이게 아니라면 그 다른 근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봄이다.

(넓혀 보아)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구원의 진리를 인간의 이성이나 자연 만물로는 알 수 없는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내어 보이신 것이다.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구원의 진리를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그 ‘복음전파’는, 성경에 기록된 이 ‘특별계시의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명’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복음전파는 (복음전파자체가 새로운 특별계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주어진 특별계시(성경과 예수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핵심적인 역할’을 함이다<인용>’.

이로 볼 적에, 그 세운 대의와 목적이, (기독교신학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중 하나인),
특정한 사물, 현상 또는 상황이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과 하나님의 일반적인 의지를 알리는 일반 계시의 범주에 속함인지, 아니면 ‘특별 계시’의 범주에 속함인지,
공히 해당됨이라면, 그 목표 및 가치와 증거와 논리, 영향 및 결과, 더 시급한 상황적 요인의 면을 볼 적에, 두 면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더 두어야함인지,
애초의 총교회가, 특별 계시, 즉, 하나님의 구원의지, 죄인에 대한 특별한 구원계획 등, 그 내용의 면들을 전달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받은 사명인 게 맞음이면, ‘하나님의 복음’전파자양성위한 대의와 목적을 결코 외면시하거나 무시할 수가 없음이다. 그 핵심적인 명령이시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필수적인 부분인 복음전파를 향한 주님의 의지를 나타내기위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중차대한 소명을 실로 간과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음이라 생각함이다.

‘만민에게 예수를 전파하기위해 복음의 일군’ 되고자 이 일에 열심 낸 것이며,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헌신..’하기 위하여 출발한 게 맞음이면, 이 모습이,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 머문 모습인지를 생각해보게 됨이다.
(그 세움이)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었음이며, (이것이 사람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여김이다.  따라서 그 선물을 주심도 (영광을) 취하실 분도 주님이심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선한 일을 이루고자 받은 것이며, 이 일은(이 기업은) 주님이 예비하시어 총공회로 그 가운데서 향하게 하려 하심이 맞음이면, 총공회에 그저 주심을 감사히 받으면 될 뿐이라 여겨봄이다.

그런데, 이를 굳이, 내(공회의) 것으로 인정하려함이면, 혹여, 그 규칙이 어떠한 율법의 가르침에 따른, 구원을 위한 사역의 준수에 더 큰 중요성이 있기에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함인지,
아니면, (그 속박을 넘어) 총교회가 그리스도안에 예속되어져 (공히) 누리는 그 자유로 헌신과 순종하게 되는, 두 면 중,
어느 면에 어떠한 투명성과 합리성의 판단(평가.결정)을 근거로 제시(명시)됨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주님의 면전에서) 그곳 통해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이룰 기업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마음눈을 밝혀 보며 잡고 품는 것이어야, 그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고 넘겨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해봄이다.
다툼>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로마서에서 보듯) 본질에서 벗어난 다툼의 지속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망하게 함일뿐더러 주님의 사업을 저해함이며, 그러기에 당 짓는 것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를 두려워해야함일 적에,
애초 (그곳 통해) 총교회가 품은 복음과 그 본질이 상실되고 버린바 된 듯 현상이, 이러한 말씀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함이면, 어떠한 것에 그 확증되고 이유 됨인지,
본질은 타협하면 안 되지만,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다투기보다, 본질을 붙잡고 양보와 배려로서 (율법이 아닌) 사랑의 잣대로 서로 세워감이 성경말씀의 이치로 여겨봄이며,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그럴 리가 없겠지만) 각각으로 변론할 게 많음이어도,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게 되면 투기와 분쟁이 나며 (그 변론을) 피하지 아니하게 되면 믿음에서 벗어나게 되고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이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 말씀일진대, 애초를 변형한 이러한 규례가 ‘우리로 그리스도의 일군’ 되고자한 그 의의 직분과 그 영광이 넘치고자한 약속에 만족인 것인지를 생각해 볼 적에,
(이 현상이 주님의 기쁨이 결코 아닌 이상) 애초 규례를 결코 바꿀(변개할) 수 없음이라 여겨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복음의 진리를 주님께서 정하신 범위를 따라 나타내고자한, ‘사명자의 양성’위한 곳임이 분명 맞을 적엔,
오늘날 주님께서 총공회에게 허락하신 '본질적 사역의 분량과 한계를 존중해야(벗어나지 말아야)'함이라 여겨봄이다.  마음속에 시기와 다툼(분쟁)으로서는 그 사역의 분량과 명분이 사라질 뿐이며, 그 정해주신 영역(분량, 한계)를 벗어남이면, 주님의 부여하신 은사와 사역의 분량을 자랑할 (아무)것도 없게 됨이라 생각함이다.

(총공회가 애초에 받은 그 분량을 스스로 벗어난 모습인 이유가, 총공회가 받기엔 그 분량 밖의 것이기에 그간 자랑할 소지가 없(었)음인지, 아니면 온 교회에 그 자랑스러운 증거를 보여줘야 했음인지,

의견 충돌이 건강한 방식이면, (더 나은 관계로 인해)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발전과 성장 등에 있어 긍정적 이득을 취할 수도 있음이다. 그럴 적에 (모두가 죄 정함을 받지 않도록 섣부른 판단에 주의해야 함인데), 이에 판단(분별)이 잘못되면 주님께 징계를 받음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현상은, ‘총교회적인 행동의 한계’를 정하지 못했거나 그 정한 한계나 조건을 준수하지 못함에서 비롯됨이라 여겨봄이다.
그런데, 개 공회가 독립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결과의 ‘합’보다, 총교회의 ’합력‘이 생산 효과를 극대화하는 수단됨이다. 이로 볼진대, (총교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불편한 감정만 남긴 소모적인 논쟁과 무 존중의 감정과 대립은, (성경대로) 주님의 경고하심의 판단 받음이 됨인지 (아닌 것인지), 애초 '총공회에 주어진 분량의 기준이 되는 규정이어야' 옳음인지 (아니면 그 무엇이겠음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이 현상이, (시기와 다툼으로 세상 적이며 정욕적인 게  아닌), 위로부터 난 지혜에 의거된 결말이라야 그 합당함이다. 서로 간에 쌓인 불목으로,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아야함이며, ‘오늘에 하늘로 좇아 경고하시는 말씀’이 분명히 있음에도 굳이 피하게 됨이면
(그 경고하신 주님을) 배반함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주님의 은혜를 받음대로, 주님을 기쁘시게 섬겨야함이 마땅함인지 (아닌 것인지)를 생각해봄이다.

그곳이, 영원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위해 세워진 게 맞음이면,
이 모습은 건축자의 지어 놓은 것을 허무는 듯 한 모습으로 보여 짐이다. 이러히 어두운 형상이, 애초 총공회가 주님께서 그곳에 분량을 정하심대로 받은 것과 걸맞음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봄이다.
주님과 말씀에 대한 순복(순종)의 본질적인 성질은, (단순히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자발적인 표현이라 볼진대 이 모습은, 애초에 주님과 말씀에 대한 순복(순종)의 정함에 그 분량의 본질적 성질 됨이라 보기엔 어려움이 있음이라 생각함이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주님은 우리의 다툼과 분열을 통해 일하심이 아니며, 또한, 주님의 관심은 썩어 없어질 것에 있지 않으심이 말씀대로의 이치로 봄이며,
지금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으로 주님께 두 손 들고 나아갈 때이며, 관계의 회복과 변화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풍요의 약속 이행을 위해,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할 때라’, 생각해봄이다.
교인 2025.12.01 20:15  
‘복음의 일군’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함이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거룩과 진실로써 행해야 함이 성경말씀인바, 이곳이(그 터가) ‘주님에게서 남이며 권세아래 있는 표’임이 정녕 맞을진대,
이러한 멈춤이, ‘그 권세의 표’를 사람에게서 난 것 같은 의문(점)이 되어져선 결코 안 됨이라 생각함이다.
주님께서 애초에 그 인치심을 보증으로 총교회의 마음에 받았음이면, (모든 게) '선'한 것이 됨이다. 따라서 '하나님 영광위해 그 줄기찬 선행'이어야 그 합당함이다. 그러기위해선 장차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랑이 되고자 ‘본디대로의 다시 세움을 입어야’ 마땅함이라 생각됨이다.
그러기위해선, ‘신앙의 반석’이 튼튼해야함이다. ‘온 교회가 그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골1:23)’, 복음위한 애초 된 소망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아니하여야함이라 여겨봄이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강조되는 개념인, 육체를 따라서의 경영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고차원적인 가치와 영적인 원칙에 따른 '생산적 경영'이어야, 주님의 날에 자랑과 서로의 자랑이며,
그럴진대, ‘예’로써 하나님께 영광의 고백이 되어져야 마땅함이라 생각함이다.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함께 수고하심이(골1:29)’ 매우 지당함이며, 이는 주님위해 지음 받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총공회에 이른 것이며 그 대한 신령한 것을 앎이 되는 것이기도 함이라 생각함이다.
(맞음이면), (악한 자는 선한 행실을 더럽히기에,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은혜로 행함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양심과 순종의 증거이며, ‘오늘에 총 교회’가 받은 은혜를 입음대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양심과 순종으로 행하여야 또한 그 증거가 됨이다. 주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하심인데, 이 현상은 초심을 잃은 모습이며, 애초 총교회가 그 믿음에 서서 주님과 그리고 양 무리의 기쁨을 위한 확신이 부재함이다.

여기서의 ‘총교회’라 함은, 애초의 단일 된 온 교회를 일컬음이며, 특히, (여기를 두고) 온 공회 중, 그 일부만의 이해관계로 독점하려한다면, 주님의 면전에서 공히, 출발했던 '애초의 단일에 위반'인 것이며, 따라서 그 신중함은 매우 중요한 태도이며, 순수한 그 참예의 의지가 있는 경우엔, 이를 거절할 하등의 이유나 권한이 (사람 편에선 모르나) 주님의 면전에선 어떠하게 있음인지.., 미워도 고와도 한 성령 안에서 온전한 한 몸일 진대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덕목으로써 '그 함께 세움'이라야함이며, 이럼이 서로 지체된 관계의 필연이며, 주님의 면전에서 (아무도) 그 책임이나 의무를 회피하거나 거부할 수도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여겨봄이다.

‘이 직책’이 마귀에게 훼방 받지 않게 하려면, 무엇에든지 (그 정당성이)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해야 함인데, (이 현상은) 성령의 감화를 입은 자비와 상관한 오래 참음이 된 모습이 아님이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자 한, '애초 함께 그 집중으로써 멍에'를 같이해야함인데 (서로의 마음이) 조화 되지 못하고 분열된 결과는 (마음이 서로) 편치 못하며, (모든 지체가)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서로 마음을 넓혀 (주님께) 보답함이어야하는데,
도리어(사람 편에서) 좌우된 모습이 맞을 진대는, 서로에게(지체 간에) 모욕과 누를 끼침이며 명예를 실추시킴이 되는 것이라 생각해봄이다.
그러기에,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한자리에 모일 수밖에 없음’이 그 마땅함이라 여겨봄이며, 또한 나아가, 온 지체가 '옛 죄를 깨끗케 하려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갈 적에, 주님께서 일하심이라 여겨봄이다. 그 열매를 얻고자함이어도 (성경적인 수순도 없이) 진행의 과정부터 (먼저) 밟음은 성경의 이치적으로나 주님의 양 무리의 보기에 그 흡족 된 모본된 모습이라 생각되지가 않음이다.

애초의 대의가 (불법의 발로가 결코 아닌) 의의 발로일진대, 이 현상은 의의 적법(성)에 따른 모습이라 보기 어려우며, 그 후의 모든 진행(과정)도 총교회의 공익성, 책임성, 공정성의 복합적 목적의 부합성에 적법 된 기준에 따름이어야 합당함이며, 빛과 어두움이 일치할 수 없기에, 빛(진리)과 사귐 된 모습이어야만 함이라 여겨봄이며, (여전한) 특정 생산의 부재는 어두움의 그림자만 드리운 뿐이라 생각해보게 됨이다.
교인 2025.12.25 19:26  
그 곳의 설립목적이 (한마디로) 하나님의 진리 전파임이 맞을진대,
(외모로 볼 적엔) 지금껏, 애초처럼 공히, 행함이 없음이다.
그 (이 후로) 변개된 체계(체제)가,
어떠한 성경적인 질서에 의함인지,
과연, 선하신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이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름이라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오늘에 목회자님들을 통해 실로 듣고 싶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하라’.

진리는 일종의 규칙과 원칙을 제공하며 그 안에서의 자유는 (구속 없는 무질서의 체계가 아니라) 진정한 질서를 얻음이다. 기독자로서 복음전파위한 ‘공동의 자유는 기독교신앙의 본질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함이며, 애초엔 ‘단일체계로써 그 복음전파의 공동의 자유를 그리스도를 통해 보장'받았음이라 여겨봄이다.
(개인적 생각으로써),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음인데, 주님의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애초를 벗어난 비합리적인 제재는(또는 이를 제한하는 경우), 애초 총 공회가 받은 '성경적 명령인 복음을 전파'할 사명과 (기독교신앙의 핵심 사명인 복음전파의) 그 목적과 방향성에 따른 공동의 자유와 또한 주안에서 받은 영적 자유의 중요성을 위협함(또는 약화시킴)이다.

애초에 공히 정한 공동된 약속과 책임을 사람편의주의의 요인이나 그 판단으로써 제한하(려)는 체계는,
(당시 주님의 면전에서)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고자한, '하나님나라 일의 값어치와 그 조화와 균형의 구속력이 있는 합의에 위반'되며, 그 동등으로 받은 사명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굳게 (공히)지킴이 되는 것이라 생각이 되지 않음이다.

이러한 모습은, ‘애초의 공동된 자유를 제한’함이라 보며, 따라서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 것이며, 또한 진정한 의미의 (성경적)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식이라면 의문의 여지가 있음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나며, 주님께 받은 은혜를 진리 안에서 그 자유를 누리는 (바른)확신을 가질 수 있는 현상인지에 의문의 여지가 있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 전할 자유가 인위적 규범(구속)에 매임은, 죄의 종의 멍에에 매인 것이 되며, 그러기에 주님을 따르는 멍에가 진정한 영적 자유를 가져다줌이다.
개인이나 구조적 차원의 행위로서, ‘복음전파의 공동 사명’을 억압하는 행위적 적용은, 교회(전체)의 전도와 선교적 역량을 약화시키며 참 자유를 주는 원리에 실로 부합된 모습도 아닌 것이며, 주님의 양떼에 모본 끼침이 되어져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함에 합당함인지에 의문의 여지가 있음이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이는 본질적으로 정반대이다. 함께 조화를 이루거나 일치하거나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며, 믿는 자는 세상과 교제하거나 멍에를 같이할 수 없음이다.
그런데, '주안에 있으면 한 형제이며 본질적으로 주님의 의와 빛에 거하고 멍에를 같이'해야함인데 지금껏 현상에 있어 성경적인 그 합당함을 어찌 이해해야함이며, 총 공회의 독자적인 신학과 교리 유지의 노선에 있어서도 걸맞음인지에 의문의 여지가 있음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의 몸 된 총 공회(단위)가, 애초에 (성령의 소욕으로써) 원했던 바를 여실히 이행하지 못하는 그 결정적인 증거가(그 원인이) 무엇인지..,
분쟁으로써 주님의 종 된 멍에를 같이 아니하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지 아니하여 갈려지고 담을 쌓는 그 속에, 어떠한 모양으로 ‘예수의 흔적이 가짐’ 됨을 찾아 볼 수 있음인지..,

이 현상은, 애초 된 그 목적과 수고가 헛됨을 여실히 보여줌이다. 이로 인해 오히려 억지로 피곤하여 낙심할 수밖에 없음이며, 따라서 (이 모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서로)면하려함이라 보기 어려우며, 긍정적으로 애초의 대의에 따른 어떠한 선을 행하여 그 거둠인지에 이해가 잘 안 됨이다.
그 이유로서,
그곳을 중심하여 진리의 말씀을 배우며 귀히 쓰임 받는 그릇 되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고자한 목적이 송두리째 사라졌음이다.
그 설립이,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하려 함에 같은 믿음의 마음을 지니고 (함께)출발했던 게 맞을진대,
이 모습은, (믿는 자로서) 온 교회가 자족할 모습이라 여겨지지가 않음이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함이 아닐진대, 비록 애초에 함께 인침 되어져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나 애초의 믿음에서 떠난 게 맞음이면 이는 애초를 무너뜨림이 되는 것이다.
(각 공회로서 선을 행하고자한 명분이 매우 크다 하여도) 애초에 총교회적으로 받은 감사를 멀리한 이러한 분리는, 애초의 동기와 과정에 결코 부합하지 않으며, 또한 (서로가 기뻐할) 즐거운 분립도 아닌 것이다.

애초에 (총교회적으로) 썩지 아니할 ‘유업’을 감사함으로 받은 게 분명함이면, 하늘에 속한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이 하늘에 속한 영광위한 형체인지 땅에 속한 형체의 모습인지, 하늘에 속한 영광 위함이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견고하며 흔들리거나 헛되지 아니하게 하여야함이며,
따라서, 총공회적으로 주님의 일(사업)에 소홀해진 이유를 냉철하게 살펴봄은 (총 공회적으로 영적 잠재력을 여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 여겨봄이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이 문제를 푸는 하나의 실제적용으로써, 애초에 공히 받은 은혜를 따라 모든 착한 일로 넘치게 하고자 온 공회가 동일한 '원'(공유)에 거하며, 또한 그 ‘수고가 주님 앞에 증거 되도록 일로동행’이어야만 마땅한 도리라 여겨봄이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이 현상이, 사람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함과 그 수고의 결말인지에 강하게 의문시 됨이다. 주님위한 자랑인 그 선한 일을 서로 권면하며 격동시켜 즐겨 행함으로 인해,
주님의 면전에 그 ‘자랑의 증거’를  여실히 보여야함이며, 그러기 위해 (주님 면전에서 뿐 아니라) 형제간에 서로 훼방하지 않도록 조심하려함이 매우 합당함이라 여겨봄이다.

(애초에 세움 된 게)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좇아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면, 그 은혜대로 성취코자 (주님의 백성 된) 자신과 그 행위를,
‘총 공회’ 즉, '교회지체의 집합으로써 주님께 드림'이어야 마땅함이다.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심을 입어 행하려했던 이 일이 맞음이면, 그 시작이(또한 과정이) 은혜인 것이며, 이로써 서로위로와 기쁨이 더하게 되고 이에 온 무리가 안심함을 얻음이어야 마땅함이다.

그 세움이, (사람의 뜻을 따라 난 것도 아니며 사람에게서 받음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나타내고자함’이 정녕 맞음이면, 주님을 기쁘시게 함이 마땅하며, 이는 사람들에게 좋게 하거나 기쁨을 구함도 아닌 것이다.
‘복음위해 그리스도의 종을 세우고자’ 한 게 맞음이면, 그 간절함을 지니고 하나님과 그 복음위한 사랑의 진실함을 밝히 증명코자 받은 은혜에 풍성하게 함이 온당하며, 이 시행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어야 마땅함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말씀했는데, 이 현상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게 된 헛된 결말이어선 결단코 안 됨이라 근심해봄이다.
사람의 교훈의 풍조에 밀리면 요동하기 마련이며,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말씀했는데,
온 지체가 긴 세월 이러히 ‘시험’된 게 어떠한 것에 피동 됨인지, 애초의 정상궤도를 벗어난 이 모습이, 장래 심판(대)에서 (각각으로) 어떠한 칭찬의(또는 책망의) 단초가 되겠는지를 근심해봄이다.
부공 2025.12.25 19:42  
서부교인이라면 서부교회에 단 한 말씀이라도 해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부공2 소속이면 부공2 수많은 목회자 한 분에게라도 적어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평양의 인권은 평생 한번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남한의 인권만 말하는 세력은 의도와 상관 없이 역사의 역적입니다.
교인 01.01 18:40  
(차제에 세상법정에 송사와 관련해 덧붙여), 교회 내 문제해결의 방식에 있어선 세상과 구별해야함이다. 즉,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달라야함이다. 고린도교회에 다툼이 있을 때 성도 간의 일을 이방인의 법정에서 송사하는 방식을 취했고,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강하게 책망했음이다. 믿는 자들끼리는 성령 안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정죄가 있다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거나 속는 편이 낫다고 가르쳤음이다.
성경적인 해결은, 성경말씀을 기준하여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회개와 용서와 화해로써 진정한 화평 가운데 문제를 해결함이란 말에 공감됨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누군가를 세상법정까지 끌고 감은 내가(우리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너를(상대를) 이기고야 말겠다는 결단이 서야함인데, 이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교회의 거룩함을 잃게 하는 행동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를 통한 궁극적인 영적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봄이다.
(세상)재판이 사회에 필요한 역할을 하지만, 본질적인 인간의 문제의 해결을 보장해 줄 수 없으며, 결국,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의 근본적인 문제와 궁극적인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해결 될 수 있으며,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에도 제한 받지 아니하심이다. 그 ‘복음전파의 사명’은 예수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지상 명령이자 삶의 목적이며, 말과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중대한 의무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선포했음이다.
그런데, 지금 현상은, 본디의 효율적 기대치의 증대에 매우 요긴 된 그 '기능과 그 역할'이 분명 상실됨이다. 당시, 하나님의 복음 전파 위한 주님의 일꾼 양성을 위해, 온 교회적으로 (그 사명됨을) 선포했음에도, 그 실행과 순종의 중요성이 상실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지도, 또한 (그 실천과 순종에 따른) 말씀의 효력을(열매) 기대할 수 없었음이다.

여태껏 모습이, 성경에 입각하여진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늘 깨어 주님께 사로잡힌바 되고 애초의 뜻을 여일 좇음에 허물이 없어야함인데, 그간 현상은 애초에 형성된 가치관이나 그 일의 과정에서 이룰 믿음의 분량 됨이라 보기 어려우며,
이는 마치, 무엇에 엉뚱하게 얽매임 되고 갇힌 형상인 듯 여겨짐이다. 서로 비방하며 각기로 흩어지고 팽배하게 맞섬으로 인해 외부교단과(교회들)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본래 의도했던 (총공회의) 일의 본질이 훼손됨은 무엇에 빼앗긴 듯한 공허감을 느끼게 함이다.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말씀했는데, 분쟁으로 헤어지고 허망한데에 굳어짐은 애초의 총 교회에 대한 그 부르심을 굳게 한 증거가 아니며, 마치 (서로)원수 맺는 것 같음 되어 정칙의 길을 벗어난 실족의 모습으로 여겨짐이다.
이러한 변형은 그 효용 면에의 합리적 기대와 긍정적인 요소가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위한 목적과 그 기대가치에 적격이라 생각되지가 않음이다.

호세아를 통하여, 마음이 분열된 백성들을 애타게 돌아오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봄이다. 하나님보다 인간적인 면이 더 드러나게 되면 위선적인 교회로 전락하게 됨이란 지적은, 교회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음이다.
긴 세월, 애초(규정)대로 주님의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음은, (애초에 그 순수한 세움이) 낡아지고 쇠하여 없어져가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지..,애초를 이은 유업을 얻지 못한 지금의 모습이 십자가의 거침인지(아닌지)를 살펴야함이며, ( 이현상이) 애초의 목회자양성위해 함께 인침이 되고 그 행하고자 난 것이 아니라 여겨지기에 주 안에서 그 확신됨이라는 생각을 얻지 못함이다.
이러한 분리로 인해 (그곳에선) ‘함께 이룰 사업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셈이며, 주님께서 베푸신, 공히 받은 은혜가 안 보임은 (그 분부를) 업신여김이 되며 어지럽게 하여 결국은 그 은혜에서 떨어짐이며, 애초에 함께 부르심을 받아 진리를 따라 행할 순종이 막힘이 되고,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달음질 잘하기를 멈춤은 (함께) 품은 의의 소망이 아니라 생각하며,

따라서, 애초에 주님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해야 함이며, 그곳에서 다시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데에 ‘모두 하나’되어져 서로 종노릇하시며 해산하는 (주님위한) 수고를 더불어 해야 함이라 여겨봄이다.

애초대로면, 하나님의 사업과 그 운영에 있어 특정 인물이나 어느 공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이에) 너나가 따로 없는 오직 ‘총공회단위’일뿐이며, 따라서
그 영역에서의 온 지체가 동등한 위치를 가지며, 그 주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 각 공회의 지위나 역할의 경중을 따질 수 없음이라 생각함이다.

‘땅과..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니라(시24:1’)라 말씀했듯, 총 공회도 그곳도 주님의 것이며, 따라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되, ‘이 중차대한 주님의 일엔 힘을 합쳐야’만 주님의 크신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기에 ‘애초대로의 합일운영’이어야하며, (그럴 적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돌아보심이라 굳게 여겨봄이다.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라 말씀했는데, '함께'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행하며 '그리스도를 향해 함께', 성장하며 교회를 굳게 세우고자한 ‘통합으로의 운영’이 지극히 합당함이라 여겨봄이다.

어떠한 능동적인 환경은 단순히 그 환경에 의존함이 아닌 것이다. 적극적으로 그 환경을 인지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의미함이다. (그런 맥락으로 보건대) 이 퇴행(퇴보)적 모습의 이면엔, 그 환경 면에 부정적인 요인이(요소가) 있다고 봄이다. (애초 양성원의) 본디를 인지하고 그 진보에 걸맞은 성격(격식과 체계)과 행동을 그 환경에 적용시키며 긍정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함과 일상적 실천으로써 발전시키는 보편적(공통적)인 태도와는 분명한 궤리가 있음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안에 거하시나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서로 간의 불화는 교회의 본질적 속성과 교회다움에 상반됨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음인데 이 현상으로써 온 지체 간에 그 입은 화목이 어찌 있음인지..,
성령과의 사귐은 이 땅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동행과 변화를 가져 오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온전한 복을 누리는 영광스러운 결말을 맺음이라는 말에 공감함이다. (이에 비추어서) ‘주님위해 아름다운 직분’을 얻고자 함께 세웠음인데, 오랜 기간 동안 그 원칙과 기준이 무시되고 지켜지지 않으며 사랑과 화목이 깨어지도록 내버려 둔 나머지,
부정적인 현상만 초래되는 결과를 미처 예상치 못했음인지.., 이 현상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 당연한 것이 아니라면 그 '원만한 복원'이 있도록 (성경에 비추어) 냉철히 돌아보아야함이라 여겨봄이다.

여전한 충돌로 인하여 주님의 거하실 처소가 침해 되거나 일로의 전진이 저해되지 아니하여야함이며, 한 성령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성령 안에서 화목 되며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야 함이 성도된 도리라 여겨봄이다.
‘오늘에 주님께서 주신 그 답’을 알고도 행치 못함이면,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함이 되는 것이며, 본디의 일들을 활력 차게, 주님의 은혜로 된 ‘주님위한 산실로서의 지대한 역할에 함께 전력을 경주‘해야 함이 (주님의 교회의)마땅함이라 여겨봄이다.

또한, 주님의 뜻을 행한 후에 복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애초대로의) 인내가 적극 필요함이라 여겨봄이다. 주님위한 한 소망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져, 복음전파의 소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종의 일꾼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함과 총 공회에 놓인 그 즐거움을 위하여, 의로운 인내로 그 경주를 경주하심이 실로 마땅함이라 생각하며,
애초의 대의를 마다한 뜻밖의 온 교회 내 파당은 교회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매력 없게 만들며,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 그 원인은, 목회자와 일반 교인 모두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봄이다.
부공3 01.01 20:18  
원고로 고소한 서부교회와 서영호 목사님과 부공2 목사님들이 주변에 계십니다. 그 분들에게 이 말씀을 외치면 좋겠습니다. 이 곳은 피고측입니다. 재판부에게 윗글에 적은 취지로 제출하면서 원고와 피고는 소송 절대 금지 교단이니 이 소송을 중단하거나 당사자 대화로 돌려 주시도록 조처해 달라 했습니다. 그리고 피고인 이 곳은 변호사 선임도 하지 않고 또 법적으로 무조건 제출해야 하는 답변서나 준비서면조차 내지 않고 6개월을 버티고 있습니다. 민사 소송은 피고가 답변하지 않으면 무조건 패소합니다. 이 번 고소는 형사건과 묶어서 제기했으니 피고가 상대할 수 있지만 패소의 위험을 안고 윗글 교인의 취지를 재판부에 수차례 제출했습니다.

부디 윗글을 적은 교인은 현재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 주변, 지도자들께 윗글을 전해야 비로소 간언이든 충언이든 고언이든 말씀한 것이 됩니다. 원고측은 이 사이트 출입 자체를 금지해놓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지켜보며 01.02 11:59  
교인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곳 연구소 홈페이지를 아끼며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
​지난 반년 가까이 교인님께서 올리신 글들을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올라오는 글들은 초기에 작성하셨던 내용과 거의 동일한 내용 형식이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현재 교인님의 글은 현실적인 적용점이 부족해 보이며, 본의 아니게 이곳의 본질적인 논의 흐름을 흐리고 계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동일한 내용을 기계적으로 반복하여 게시하는 것은, 읽는 이들에게 설득이 아닌 무언의 압박이나 강요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교인님의 글이 올라올 때마다 게시판의 소모적인 에너지가 발생하고, 생산적인 논의가 끊기는 것을 보며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연구소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이곳을 아끼는 분들이 지쳐서 떠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까 심히 염려됩니다.
​같은 교인으로서, 그리고 연구소를 사랑하는 제3자의 입장에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반복되는 글을 올리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인 01.29 19:10  
(온 후대의 목회자님에게 올린 내용 중,)  ‘서O교회’의 묵은 난제와 관련하여 (더러 인용하며) 덧붙임은,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야하는 이유는, 교회가 (살아있는) 유기체적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유기체란 모든 부분이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며 통합된 전체로서 기능하는 생명체를 의미함이다.
교회가 유기체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에서 찾을 수 있음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성도들은 그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각 지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연결되고 협력하여 전체의 기능을 유지함이다. 성경에서는 이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음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교회가 유기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각 지체가 서로에게 필수적이며, 함께 성장하고 변화하며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각 지체는 서로 연결되고 협력하여 전체의 기능을 유지하며 영적 성장과 사역의 지속이 가능함이다.

이러한 연결이 깨지면 분쟁과 갈등이 늘고, 교회가 세상에서 ’아름다운 이름‘으로 전해지기 어렵다.
교회에 분쟁이 있으면, 그 본연의 영적권위를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고 교회의 신뢰가 크게 위협받음이다.
목회자와 성도 간, 성도상호간의 분쟁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복음전파와 영적 성장을 심각하게 저해함이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한 몸 된 건강한 관계가 진영 논리에 갇히는 순간, 교회는 스스로 생명력이 저하됨이다.

‘(부분인용).....우리서부교회가 사정상 30년 가까이 성찬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제가 얼마 전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우리교회 중간반 학생가운데 한 학생이 성찬 그거하면 이단 아닙니까 라는 말을 하는 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너무 오랫동안 성찬을 안 하니깐 성찬하면 이단 아니냐고.....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교회가 성찬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건 엄밀히 말해서 우리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여러분이 이 문제를 두고 우리교회가 오랫동안 안했으니깐 이게 뭐 대수가 하고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우리교회의 이 성찬문제를 두고 진짜진짜진짜(울먹이며)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정말 간절히 기도하셔야합니다..(26.1.24.토새 설교에서)‘

긴 세월, 교회 내의 난제로 인해,  그리스도와 연합인 의미의 성찬예식이 없음이다. 교회의 본질에 충실함으로써 그 고유한 기능들이 활력 있게 작동되어져야함이 (개인적으로) 심히 공감됨이다.

하나님을 보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이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한 예로서, 본의가 아니어도) 형제간의 화평이 깨어진 이유로 각기 (성탄)축하함이 어떠한 명분으로 합리화될 수 있음인지. 어린세대들마저 (어른들의 이해에 따라) 떼어놓으며 한 몸 된 관계를 끊어 놓는 이러한 소치는 영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혼동됨은 물론, 영적인 무감각으로 누적되고 화석화될 수 있음을 심각히 우려해야할 사안이라 생각해봄이다.

(자신 부끄러우며) 예물을 가지고 제단에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셨다. 더구나 형제와 오랫동안 불화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어떠하게 힘 있게 고백할 수 있음인지.., 복음 안에서 성도들 간에 화평이 하나님 나라의 ‘실제’로 연결 되어야하지 않겠는지..,
하나님과의 화평을 말하면서도 사람과의(형제간) 화평이 바로 되지 않으면 주님과의 진정한 화평을 누림이 아닌 것이며, 화평은 성도의 선택사항이 아닌 (성도의) 의무이며(롬12:18), 평화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거룩한 결과물이다.
(배운 대로) 예수님은 자기희생을 통한 평화를 새 삶의 원리로 제시하셨음이다. 갈등과 분열의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가,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고 적극적으로 화평을 심는 용기가 '함께 시급히 요청'됨이다.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화목제물) 양보했을 때 갈등은 종식되며, 그러지 않고 덮어두는 형식은 위장된 평화이며 ‘진정한 화평의 무게’가 될 수 없다는 말이 공감됨이다.

마5:21-26에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자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윤리가 바로 형제와의 ‘화목’에 있음을 강조함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야하는 예배자의 절대조건을 말씀하고 있음이다. 그 책임이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심정으로 서로 용서를 빌고 용서함과 주님께 용서를 빌고 용서 받는 자가 될 것을 가르쳐 주심이다.

이 난제의 해결에 있어서,

> 다른 한쪽이 잘못을 인정 또는 양보하기까지 당대는 물론 후손대대로 각기의 견해를 고수해야함인지,
> 서로 간, 양보로서 애초의 규정대로 투표해야함인지,
> 양방 또는 한쪽의 일정한 양보로써, (투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회복의 길을 찾아보아야함인지..
 
성경적인 ‘양보’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아 겸손과 사랑에 기반하여 형제를 배려하고 주님의 뜻을 받드는 교회의 대의를 말함이다. 힘이 없거나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강제적 행위가 아니며, 영원한 가치의 추구와 사랑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자아) 기꺼이 내려놓는 희생적 태도와 믿음의 행위로서 단순히 손해를 감수하는 것을 넘어섬이다.

양보는, 비본질적인 선호를 기꺼이 포기함으로써 형제간의 사랑과 화평을 이루고 (형제의) 유익을 구하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과 섬김과 겸손의 동기에서 비롯된 (옛사람)자기 부인이며,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관계의 회복과 일치를 목표로 함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타협과 양보는 적용되는 영역과 지향하는바에 따라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봄이다. (요약으로서) 타협은 무엇을 위해(대상)하느냐의 문제에 집중하며, 양보는 어떻게(동기)행동하느냐의 문제이다.

(해당)교회가 이전대로 함께 예배하고 관련부서의 단일화와 모든 행사에 연합하며 (공적인) 세례식과 성찬예식은 물론, 직분 자를 세우며, 총 공회 또한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하여 진정한 성숙을 이루기 위한 그 실천적 대안들이 강구되어야할 시급한 과제로 봄이다.
그 유익을 위한 도출의 지혜가 오늘에 절실히 요구됨이며, 그 해결의 실마리를 '성경과 제도적인 두 축의 토대 위에서 동시에 찾아야'함이라는 생각을 해보게됨 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 제도나 문화에 익숙해진 신앙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서 흔들릴 때 분쟁(다툼)이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있음이다. 교회의 분쟁의 큰 원인은 교만함과 미련함이며 주님 안에서 한(같은) 마음과 한(같은)사랑과 한(같은)뜻을 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엔 지체 간에 깊고 오랜 상처를 입고 교회적으로는 이 세상에 본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됨이란 말이 공감됨이다.

그러나, 분쟁은 우리를 더 큰 평화로 이끄는 길목이며 결국 참된 화해와 자유를 위한 과정이며, 그 회복이 있을 것을 긍정적으로  절실히 소망해봄이다.  '마음과 뜻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예배자의 그 본연의 위치로 회복‘해야 함이다. (하나님의 성실하심대로) ‘성실’이 강조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구별된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시급히 회복해야함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큰 믿음으로 ‘함께 손’을 내밀 적에, (지는 게 아닌) ‘함께 승리’ 됨이라 굳게 여겨봄이다. 비온 뒤에 땅은 더 단단해지듯, 이 같은 시련이 (믿는 자의) 끝이 아닌, 나은 미래로 도약하기 위한 절호의 터닝 포인트로 삼는 계기가 되길 심히 소망해봄이다.

교회내적으론 그 원만한 해결이 도저히 어렵다면, 그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는 중재자의 역할을 오늘에 후대 목회자님들에게 기대해봄이다.
외부에서 지켜보며 01.30 14:40  
선생님, 그동안 올려주신 많은 글들을 통해 전하고자 하시는 바는 충분히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동일한 내용의 글이 반복해서 게시되다 보니 게시판을 이용하는 다른 분들께서 소식을 접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이용자들을 위해 반복되는 글은 이제 그만 갈무리해 주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교인 2025.08.23 18:42  
에베소 교회는 칭찬도 받았으나 첫사랑을 버렸기에 책망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신 말씀을 오늘에 그 적용으로써,
이 양성원과 별개의 말씀으로 보아야함인지..지금도 여전히 그(애초의) 촛대를 붙잡고 있음인지, 이미 잃었음인지,.

회개의 기도가 우선인 것입니다. 회개해야할 것을 덮어두고 (교회의) 부흥을 내세움은 (성경적으로) 앞뒤 순서가 맞지 않으며,
‘전 공회가 연대한, 합심기도’의 운동을 오늘에 급속히 일으켜 주시기를 앙망함입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함입니다. 온 교회가 이 문제에 엉킨 나머지, 주님의 백성이 호리라도 광풍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불의의 삯을 사랑하지 않도록, 믿음에 손해를 입지 않도록, 헛된 길을 걷지 않도록, 흑암에 얽매이지 않도록, 장래 칭찬만 받으며 책망은 받지 않도록,

주님위한 목양의 헌신어린 책무가, 오늘날 온 목회자님들에게 분명코 있으심이라 보는 것입니다.

오늘을 놓치게 되면 미래를 놓칠 수도 있음입니다. 장차, 훌륭한 인재들이 (내내 어두운) 현상을 보며 회의를 느낀 나머지, 총 공회의 울타리마저 하나둘 떠나감을 예사로 보아선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후손들의 건실한 신앙의 정립과 총공회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정체(正體)성에 혼돈을 주어선 안 되는 것이며, 기성세대가 이를 근심하며 심각한 각성과 관심이 요청됨입니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주님께 받은 것을 늘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사람이 천국에서도 여전 그러할 수 있음이라 배웁니다. 지엄하신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곳을 활짝 열어주셨음을 실로,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용했으며, 여호와를 찬양했음인지를 낱낱이 심판하실 적에 (개인이나) 총 공회(온 교회)가 잘했다는 칭찬을 받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차제에 짧게 덧붙여, ‘총 공회의 그 부동산’을 놓고 분분함인데..총공회란 배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음인지..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울 뿐이며, 이게 (그 고소함이) 성경적이 아닐 진대는 이에 직접 무관하여도 이를 적극말리지 않는 (공회단위의) 연대적 책임이 분명히 있다 봄이며, 이러히 관습으로 굳어질 경우, 총 공회는 물론, 앞으로 신도들의 정체성에도 상당히 혼란을 초래함이라 생각합니다.

기도가 믿어져야 기도함입니다.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기도를) 안 하게 됨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위해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여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백성을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날 총공회(교회)에 역사해 주실 것을 온 목회자님이 믿음으로 선포하며,
온 교회가 그 뒤를 따라 집중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 애통의 기도를 함입니다.

‘총공회산하, 합심기도의 주간을 선포’해 주시기를 거듭 앙망함입니다. 다음세대의 목회자님들이 그 역할을 주도적으로 (주님위해) 헌신해 주실 것을 간곡히 원합니다.
온 교회가 주님의 면전에 일제히 엎드려 (무거운 제목들을 안고) 통회의 눈물로 기도하도록 적극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앞길이 매우 혼탁한 현실에서 다음시대의 바톤을 이어받은 목회자님들의 그 헌신적인 역할을 기대함입니다. 이 현상으로 희미한 분기점에 머물고 있는 총 공회의 속성을 일시에 일깨우는 역할을 자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찬양함이 충만한 곳으로 반드시 복원 되어져야함입니다.
당시 총공회적으로 받은 주님의 첫사랑에 대한 최고의 감사가 반드시 복원 되어져야함입니다.
존귀한 진리를 드높이는 터의 중심적 역할을 여실히 감당하며 온 지체에 평강이 반드시 회복 되어져야함입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각각으로 나타나는 그날에 그릇 판단으로 임할 진노를 절대로 쌓지 말아야함입니다.

(당 세대와 그 아래세대의) 나들목에 이미 서신 오늘에 목회자님들이 적극 (이 운동에) 그 몫(헌신)을 일익 감당하여 주시기를 거듭 간절히 요망함입니다. 당 세대에 직접 관여치 않은, 다음세대의 목회자님들이 이에 비교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음입니다. 이를 위해 총공회 산하의 모든 교회에서 (이를) 소신껏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 밀어주심이 심히 필요 됨입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릴 찾으시며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심히 기대하고 계심입니다. ‘(너가) 이를 어찌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성경말씀에 따른 이치라 생각함입니다. ‘괜스레..그리 안하여도 충분히 될(이룰)수 있음이라..’ 그러신다면, (이럼이) 주님의 백성 된 우선도리인 것이라 목회자님으로부터 성경의 제시로 수없이 듣게 됨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보듯) 학자의 귀와 혀같이, 이 해결위한 그 구심점역할로서 (하나님영광위한) 헌신된 모습을, 온 양떼의 눈으로 시급히 보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
追記: 애초, 이 양성원에 있어 깊이 관여된 양방의 단 한분이라도 읽혀지길 간절히 바라면서 올린 것이며,  너절한 글, 끝까지 읽어주심과 이 내용취지에 따라 댓글을 삼가 해주시며 이 게재의 배려를 주신 홈 관리자께 감사드립니다.
담당 2025.08.23 21:11  
늘 정신이 번쩍 들게 일깨워 주시는 말씀들을 적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의 임자가 적는 글은 조용히 지켜 보며 심령의 깊은 곳에서 부터 고요히 끌어 올린 샘물처럼 신선하게 깨끗하게 적기 때문에 모두가 진지하게 감안한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대로 또는 지적하는 대로 다 시행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일단 담겨 있다 보면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라도 반영이 될 듯합니다. 이렇게 지켜 보는 분이 부공2 교인이신 듯하고 또 서부교인으로 보이니 부공2와 서부교회 관련인들도 이 곳처럼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실 듯합니다.
교인 2025.09.11 18:53  
주님께서 이 현상을 (이미) 다 보고 계십니다.

당시 총공회적으로 하나님영광위해 온전히 받았던 분깃인 게 분명히 맞음이면, 그 역동적인 운동이 여실히 증명되어져야함입니다.  그런데 여태껏 어두운 모습은 애초 (총공회적으로) 공히 품었던 주님과의 언약과 대의를 스스로 파(破)하고 거룩이 상실된 결말이라 생각됩니다.

이 문제에 있어 각기의 견해가(주장이) 아무리 또렷하고 충분한 근거가 있다하여도, 현실적으로 어두운 현상임이 분명할 진대는 결단코 성경적으로 기쁨 된 게 아닌 것입니다. 이 대한 각기의 변증이 주님의 면전에서 명확하지가 않을 적엔, 주님의 진노하심과 범죄 함을 쌓고 있음이며, 주님의 몸 된 온 지체의 큰 충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밖에서 볼 적엔), 이는 총 공회에 대한 무 신뢰인 것입니다. (일반으로) 외부에선, (그 내부적으로, 누가 어느 쪽이 잘하고 못했는지를 따지기보다) ‘총 공회 교단이란 자체’를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저 교단은 분명히 (성경적) 푯대에 대한 방향감각을 잃었고, 그토록 내세운 ‘교리와 신조와 행정의 가치와 기준’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무너뜨리고 지켜내지도 못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비쳐지지 않겠는지에 심히 우려됨이 (한낱) 기우이겠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인 2025.09.12 18:57  
그간 ‘양성원’이란 겉모양새만 (서)있었을 뿐, 전혀 생기가 없어 다 말라빠진 마른 뼈와 같으며 힘줄과 살이 붙어 있는지가 의심됨입니다.
건강하고 생산적인 토론의 그 필요성과 이유와 자체는 (모든) 인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지체된) 모두가 결코 원치 않음에도 여전 이 지속의 이유가, (한 마디로) 각기의 견해가 좁혀지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내면적으로 볼 적에), 그간 이 문제를 해소코자 그 충분하고 신중한 답을 얻음에 있어 그 비중을,

성경말씀에 더 치중하여서 찾고자했음인지,
각기로 연구된 논리에 더 치중하여 찾고자했음인지.

여전히 분쟁지속의 이유가 각기로 어느 면에 더 치중 되었기에 (여태껏) 대립현상인지를 생각해봄입니다.

긴 세월 끌어온 이 문제에 있어,
각기로 내세운 논리적인 근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각기 제시된 성경말씀을 좇은 근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논리적인 사고도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난제들을 쉽게 풀고자함에 있어선,
‘각기의 독점적 논리에만 한정할 게 결코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적극모색의 한 방편으로서, 그  논리에 치우쳐 풀려다 헬레니즘적인 사고에 빠지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기어이 안 풀린 적엔, 그 결정적으로, 우주만물의 독재이시며 귀속권을 지니신 '하나님께 절대적 순종과 그 예언된 말씀을 좇은 영적교감'으로써, 즉, 헤브라이즘적인 관점으로 풀어야 함이라 생각이 듭니다.

공히, 모든 분쟁이 속히 해결되길 바람이 분명할 진대는, 여전 이 모양새의 해태가 과연 무엇을 간과한 때문일지를 (총 공회적으로) 심각히 돌이켜 보아야할 계제라 생각이 듭니다.

각기로 정립된 관점에 의거된 주장을 내내 강화하여 상대를 통제로 풀려는 의지는 결코 온 지체의 의로운 경험이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체들 간의) 분쟁은 분명 교회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왜 일어남인지? (별별의 이유가 있을지나 성경을 볼 적엔 한마디로) 우리 속에 있는 정욕 때문인 것입니다. 정욕으로 좇아 난 잘못된 욕심 때문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약4:1).
그 양성원과 기도원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머리 되신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야함이 온 지체된 마땅한 도리라 여겨봄입니다.
이견만 부각된 (팽팽한) 대립은, (크고 작은 잘잘못의 차이는 있을 지언 정) 개인이나 각기의 주장이 주님의 뜻보다 커졌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교인 2025.09.13 18:33  
양방의 견해가 끝내 좁혀지지 않으면, (말씀의) 법도에 따라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께 온전히 맡김이 상책이라 보는 것입니다.
양방의 이견만 크게 부각되고, (성경)말씀을 가벼이 여기면 내 견해가 세상에 묶여버려 그 주인 행세를 하기가 쉽습니다.  (근래 일련의 ‘소송’ 건에 있어..다 주님의 것임에도 그리 분분한지..참으로 어지럽기만 합니다.)

종은 종일 따름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바쳐졌고 그리고 교회를 온전히 섬기고자한 산실(産室)’이 여전 이 현상은, 온전한 종 됨과 믿음의 연고가 아님이라 생각합니다. (잘잘못에 앞서) 결과적으로 애초의 목적이 무너졌고 하나님의 영광위한 그 본질과 정도를 떠남은 처음의 언약조건에 위배이며, (이는 바로) 주님 앞에 불순종을 의미함이라 생각합니다.
그 주님위한 행함이 줄곧 편벽(偏僻)되어 엉뚱한 데에 힘을 쏟고 세월만 허송하며 (총 공회적으로) 받은 애초의 은혜를 마다하며 세상의 조롱거리로 치부된 모습이, 어떠하게 주님의 선한 일로 기억되겠으며 하늘에 사무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인지..,
(이를) 급속히 청산해야만할 사안이 아니라면, 주님의 양떼가 지혜의 눈으로 명확히 분별코자, 각기의 변증을 공적으로 듣는 기회가 있어져야함입니다.

그 양성원은 주님께 드려진 것일진대, 그곳 통해 주님이 늘 함께하심을 입으려면 주님 뜻에 그 복종이 요구됨입니다.
(성경에서) 한사람의 죄 때문에 온 인류가, 또한 이스라엘 전체가, 무리와 가족들까지 해(害)를 입고 무너져 내리는 결말을 보게 됩니다. 행여 오늘날 교회에 있어, 한사람이 잘못했음에도 전체와 사역과 영적 분위기를 흐리게 하고 해(害)를 입게 되는 한 이유로서,
(직접 잘못이 없다하여도) '동참의 죄'가 있게 되어 (작게, 크게) 위기에 봉착할 수 있음을 오늘날에 '경고'로 받으며, 주님의 면전에서 (온 지체가) 떨어야함이 (주님의 백성 된) 도리라 여겨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는 자는) 주님 안에 한 몸 됨인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넓게 볼 적에) 모두가 이 어두운 현상에 머물러있기에 이에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음을 인정해야함이라 보는 것입니다. 이 견해가 다름이면, 이 또한 (공적으로) 각기의 변증을 명확히 듣는 기회가 있어져야함입니다.

야고보서는 기도로 연결되었음입니다. 여전 서로 다툼은 주님 앞에 그동안 절절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기도해도 얻지 못함은 여전히 정욕으로 쓰려고 구했기 때문인지를 심각히 살펴볼 계제로 봄입니다.
(서로대립에 치우친 나머지) 주님의 지체들을 혼돈 속에 몰아넣고 삼키려는 어두움의 권세에 능히 맞서지도 못하고 있지 않음인지..또한 어찌 이러히 긴 세월을 고통으로 허락하심인지를 생각해 볼 적에,
이는 (성경)말씀을 가벼이 여기고 주님께 간절한 기도가 부족한 탓이 아니겠는지..

(서로대립 함에서) 돌이켜 순전히 말씀만 의지하고 (여호수아처럼, 자신의 옷을 찢는 심정으로) 주님 앞에 온전히 엎드려 토로하여 지혜를 구함이 긴요 됨입니다.

율법을 읽을 때에(느8:) 모든 백성들이 일어나 다 울었다했습니다. 이로 볼 적에 주님 앞에 모두가 무조건 항복하여 뜨거운 심정으로 주님의 뜻을 물으며 회개해야함이라 생각합니다. (온 지체가) 애초에 품었던 고귀한 믿음에 대한 결핍증을 반드시 치료해야함입니다.
(배운 대로) 주님께서는 영적으로 침체 되고 무기력에 빠져있는 주님의 백성을 그냥 두시지 만무하심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총공회가 거룩을 회복하고 귀히 쓰임 받기위해 (주님의 온 양떼가) 크게 부르짖어야할 과제인 것이며,
그 중심된 역할을, 후대의 목회자께서 감당해 주십사함입니다. (교회들의) 참여가 적으면 어쩌지..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수가 많았음입니까..주님께서는 진실로 간절히 주님을 찾는 자를 통해 역사하심이 아니겠는지..

그 해결책으로,  회복위한 기도의 제목을 공히 올려 전심으로 주님을 향함으로써(대하16:9)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 되고, 어긋난 형제와의 불미스런 관계가 제거되며 급속히 (총공회적) 건강이 경험되어져야함입니다.

윗대가 주님 앞에서 많이 울어야 후손들이 울 일이 적은 법이라 했습니다. 이 어두운 현상들을 그대로두면 후대들이 고스란히 슬프게 덮어쓰게 마련인 것입니다. 
후대의 위치에 서신 목회자님들이시여_, 온 지체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함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처럼(민6:), 오늘에 주님의 빛 된 과정으로써, 내일이라도 당장, (총공회에) 아름답고 놀라운 기쁜 기별을 얻도록  적극 앞장 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혹, 위 내용들에 부연 또는 이의가 있을 적엔 (본란 아닌) 별도의 주제로 하시기를 양해바랍니다.)
교인 2025.09.15 19:36  
당시 (총 공회가) 주님께 모든 기도의 응답으로 세운 게 분명함이면, 그곳이 하나님의 영광위한 본위(本位)이며, 마땅히 그 성취 위한 활발한 운영이어야 마땅함입니다.
그런데, 여태껏 방치로 그 본디의 진실이 무너짐은 결국 ‘인간본위’로 세웠음이란 오해를 줄 수 있음입니다. 주님위한 대의를 이룰 부담이 사명이 되지 못하고 (이를) 경홀히 여김은, 주님의 책망을 면함이라 볼 수 없으며 온 지체의 근심이 되고 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가 잘 안 풀리는 한 이유로서, ‘서로가, 주님이 내 편’이라는 인식과 자긍(심)에서 비롯됨이 아닐지.., 예로, 이 문제에 있어 각기 서로, 성경을 더 잘 해석하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더 입고, (이성적) 논리로서도 더 합리(합당)함이라.., 결과가 어찌든, (복이 안 되면 벌이 되는 셈이며),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는 게 최고의 가치와 복의 자리이며 허사가 아님이라 생각합니다.

이 어두운 현상은, 그곳이 주님이 거하실 분명한 처소임을 부인한 결말이 되는 것이며, (그럴진대) 총공회적으로 주님의 부인하심을 받을까 근심할 계제인 것입니다. 심지어 참새 한 마리도 간섭하심일진대, 애초 그곳을 잊지 않으심이며, 당시 그곳이 주님의 뜻과 계획이셨음이 정녕 맞을 적엔,
이 현상은 주님의 뜻과 계획하심을 (본의 아니게) 모독함이 되는 게 아니겠는지,,, 이에 모두의 회개와 돌이킴이 없다면 사하심을 받지 못하게 됨인지(아닌지)를 근심하게 됩니다.
그동안, 총 공회가 그곳에서, 서로 간 신뢰를 부여하며 주님의 양떼의 성숙과 주님위한 교단의 발전을 위해 피차 기꺼이 희생으로써 주님과 주님의 양떼를 섬길 방법을 찾으시며, 성령께서 밀어내심을 따라 '어떤 소산의 마일리지'를 쌓아 왔음인지를 (주님의 면전에서) 냉철히 돌이켜 볼 계제라 생각합니다.

결국으로, ‘총 공회도 주님의 것’임을 서로와 만민 앞에 명쾌한 그 '시인'이 문제해결의 그 우선이라 보며,

장차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임이 모두의 고백일진대, (온 지체가) 그 연습을 지금 살아있을 때에 잘하여 반가이 대하도록, 적극 이끌어 주실 계제라 보는 것입니다.
교인 2025.09.17 18:53  
그곳에서 이룬 소산이 없기에, 하나님 영광의 향기가 날 리 만무합니다. 그럴진대, '이 이유가 어디서부터 초래'됨인지를 영적인 눈으로 읽고 울어야할 사안이 아니겠습니까..
긴 세월 왠지, 이 현상에 온 지체의 염려와 (주님 면전에서) 눈물의 기도도 보여 지지가 않는 아주 기현상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애초와 달리) 이 역기능적 현상은, (성경의 비유로)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릴 적에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림과 같은 모양새(모습이)‘가 아닌 것입니다. 분명, 그곳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서 그 문을 두드리신다면, 언제든 기쁘게 열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져야,
‘주님의 종 된 진정한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말씀했는데, 마치, 줄곧, 자는 모양(새)인 모습을 (주인이 볼 적에) 얼마나 답답해할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긴 세월 (그곳에) 왕래가 없고 적막함이 어찌 (온 지체의) 자긍이며, 또한 이 현상이, '무엇이 도적같이 뚫고 들어오게' 함인지를 생각해봄입니다.

(그 터에서 공히 이룰)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의 충실한 사명’을 당시 총 공회가 받은 게 확실하다면, 공히, 즐겁게 감당하심이 온 지체의 복이며 기쁨 됨이 아니겠습니까.

내내 이 현상을 언제까지 유지해야함인지..., 이러다가 생각지 않은 날 (때론 내 생명이 다하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주인이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은 율에 처함 받으리라’하신 말씀이, 이 현상과는 전혀 예외인 것입니까.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함이 없이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음이라, 많이 받은 자에겐 많이 찾는다 했으며 많이 맡은 자에겐 많이 달라할 것이라 하심’도, 이 현상과는 전혀 무관한 말씀입니까.

이 현상이, (본의 아니게) 외식에 빠진 모습인지, 아니면 분명 옳은 판단에 따라 거한, 여태 현상인지에 대해 (주님의 양떼가) 명쾌히 분변하여, 언제나 은혜의 보좌 앞에 믿음으로 머물도록 일깨워 주셔야함이며, 주님께 묻지도 찾지도 않는 (두루뭉술한) 자세는 그 온전에 믿음 된 반응이 아니라 여겨봄입니다.
교인 2025.10.02 20:51  
(거듭 생각해보아도) 이 현상이 분명코, 당시 총 공회가 작정한 규례를 지킨 모습이라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애초의 공동된 믿음이 더 굳어지기보다, 오히려 그 운동이 단절됨은  그 행함이 없기에 죽은 믿음의 모습이라 생각이 됩니다.
이를 보며 한 생각으로서,
이번 총 공회의 모임기회에, 당시 양성원에 있어, 두 면을, 매듭지어야함이란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보게 됩니다.

하나는, 당시 그 세움이, ‘예수의 영’이 허락하심에 철저히 순종된 산물인지, 아니면 사람(편)의 생각으로 세웠음인지에 대해, 심각한 토론(과정)을 거쳐서라도 (이를) 명확히 해야 함이라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당시, 주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심인데 사람의 지정의로써 기도의 응답이라 (공동의)인정으로 지은 게 확증된 결론이면, (부득이) 그 청산(처분)을 중지로서 주님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으며,

(그게 아닌) 주님을 위한 것이 확증된 결론이면, 무조건 (주님 앞에) 총 공회적 회개와 아울러 (애초대로) 복원의 결단이 있어져야함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보기엔 분명 바른 것 같으나 사망의 길도 있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밝으면 잘 보이는 법인데, 여태껏, 애초와 정반대인 이 현상이 당초에 주님과의 언약을 사람 편에서 깨어버린 것인지(아닌 것인지)를 적극 살핌이 중요하다고 봄입니다. 애초 지은 게, 행여,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리 만무하심에 따라) 신중히 청산을 해야 함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입으로 쓴물과 단물을 낼 수도 있음이나) 주님께서는 식언치 아니하시며 약속에 신실하심입니다. 따라서, 당시 주님의 마음을 흡족케 해 드릴 소원을 지니고 모든 기도의 응답인 게 확증이면, 그 원인이 (크게 보아) 총 공회의 잘못이란 결론에 이름이라 생각해봄입니다.


다른 데(교단에)선 이러한 시설이 없어서 소원인데 이게 어찌된 현상인 것인지...  그 주님 위한 산업일진대 경영으로 여일 일구지 못하고 허송으로 보낸 세월이 얼마인지...그곳이 정녕, 후손대대로 그 모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고자 한 게 아니라면, (거듭으로) 너무나 이상스럽습니다.
그곳이 어느 한 공회의 것이(소유가) 아니라 분명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양떼가 주님으로부터 위탁 받은 곳입니다. 여전 이 현상에 대해, 주님의 양 무리가 그 이유를 밝히 듣고서, (영적으로 또한 현상적으로) 이에 혼동이 없게 적극 깨우쳐 주실 그 책무가 있으심입니다.

하나님께 모두가 기도하여 그 '주시마한 처소'로서 응답인 게 맞음이면, 모두가 즐겨 받은 대로 (크든 작든지) 그 선하신 뜻을 좇아 힘써 이루어가야 합당함이라 생각합니다.
이 어두움의 이유(근거)가 주님 면전에서 밝히 변증되지 않음이면, 분명코 주님의 뜻을 어긴 죄가 됨이라 (거듭)생각해봄입니다.

마귀는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지금껏, 총 공회의 가장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살펴야하고, 그러기위해 주님의 면전에서 한마음의 신앙고백이 있어져야함이며, 공히, 흑암의 세력을 대적하고 마침내 어두움을 말끔히 걷어 내야만하는 (총 공회의)시급한 사안이라 생각합니다.

사지백체의 한곳만 아파도 온 몸이  아픕니다. 주님의 지체들이 총 공회에 쌓인 현상들에 있어 서로 간 아픔과 고통을 못 느낀다면 분명 (영적, 육적으로 감각이) 무딘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총 공회가 이를 두고 무슨 운동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은 뻔하며 그 공통된 답을 주님의 면전에서 확정지으심이 마땅함이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간 멀리 반대로 간 역행을 본디대로 돌이킴이어야 (주님의 양떼가) 실로 복됨이라 생각합니다.

그곳이 다시금 (영적으로) 숨을 쉬는 곳이 되어져야함입니다. 이로 볼 적에, (애초) 양성원에 있어 최우선 과제가 애초대로의 복원이라 생각이듭니다.
(한마디로) 그곳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기로 모두의 작정된 터인 것입니다. 이번 모임에서, (성경말씀처럼)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모두가 승리하는 의논 있으시기를 심히 원합니다.
(총 공회의) 희망의 큰 불씨를 보기 원합니다. 그 숙의를 소홀히 또는 내내 방관함은, (크게는) 총 공회와 서로지체에 대한 사랑이 식어진 모습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서로 다투면 자식들이 고통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다투게 되면 서로 고통을 당하는 법이며, (서로 지체에 화목 없고서) 실로 믿음의 진보와 발전과 부흥이 있는지에 의문이 됩니다. 주님의 양떼들의 근심과 눈물을 닦아 줄 책무가 오늘날 목회자님들에게 있으심입니다. 주님의 양 무리가 더 이상, 분쟁의 소용돌이에 머물러 지체 간에 불신과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먼저, 목회자님 간에 놀라운 화해와 이로 환한 밝은 빛이 그곳에서 (놀랍게) 비쳐지길 고대함입니다.
‘그러나’보다, ‘그러므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모습을 양 무리가 실로 보며, 여일한 신뢰와 안심으로 뒤따를 수 있게 되기를 실로 원합니다.
교인 2025.10.03 18:46  
&lt;근래, 어느 목회자님의 글을 (적극)인용해봄입니다.&gt;

(애초 그 세움이, 단순한 모임을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진 (엡2:22)’, 주님이 거하실 아름다운 처소라 여겨봄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자 모두가 순수한 의지로 출발했으나, 그간(그곳에선) 아무런 성장이 없음은, (좁혀볼진대) 하나님께서 교단과 교회에 함께 하시지 않은 증거라 여겨봄입니다.

함께 지어져 가야할 이유가, ‘이에 외인도 아니며 손도 아니며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엡2:19)인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말씀했습니다. 함께하는 그 자체가 아름답고 선한 일이며, 혼자보다 둘이 낫고, 함께할 때 승리할 수 있다(전4:), 교회가 연합할 때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말에 전적 공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생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기초와 기준이 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아야합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는 성전을 이루는 작은 돌들이며, 모두가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 비로소 교회는 든든히 세워지고, 삶속에서 예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둘째,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합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하심이라(엡2:18). 인간의 힘으로는 갈등을 해결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며, 견해의 차이와 방법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성령을 의지할 때 교회는 하나 되어 상생할 수 있습니다.

셋째, 겸손과 희생, 연합의 신앙전통을 회복해야합니다.(이하생략)

정녕 (그곳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헌신과 상생의 신앙전통을 오늘 우리가 이어받아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가는 상생의 운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인 2025.10.04 19:18  
그곳을 볼 적에_

생명이 없으면 미래도 없고 죽은 것입니다. 여태껏, 그 복음운동이 없기에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행위가 죽은 (교회의)모습입니다. 주님을 향한 처음사랑과 그 공동된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이 무너진 현상입니다.
당시 총 공회가 주님 께 기도하며 생각하고 (영감으로) 듣고 받았음일진대, '거룩과 진실로 이를 지켜 행함'이 매우 합당함이라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신 문을, 종 된 신분으로서 임의로 닫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그 세움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자 함이 정녕 맞음이면, 때론 힘들어도 그 약속을 인내와 능력대로 주님의 뜻을 충성되게 그 시행일뿐, 사람 편에서 임의로 함은 (성경을 볼 적에) ‘주님의 이름을 배반’함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현상이, (성경말씀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져야함인지',
 ‘회개치 아니하면..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말씀 했는데 애초대로 그 촛대를 굳게 잡고 있으심인지,
큰 부요를 입었음에도 어느 교훈을 받고 지켜 행한 나머지, 궁핍 된 현상인지,
줄곧 환난에 처한 현상이, 마치 질그릇 깨어짐 같고 곤고와 가련함과 가난한 것 같고 눈먼 것과 같으며 벌거벗은 것과 같음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깊은 시험을 능히 대적하지 못한 나머지,
애초에 주님의 증인되고 충성하고자 받은 권위와 권세를 굳게 잡지 못한 결말인지..를,

주님의 면전에서 온 지체가 매우 근심해야할, 절실하고 시급한 과제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총 공회의 절대적 한계가 결코 아니라 봄입니다. 행위의 온전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날 총 공회 교회들에게 '성령이 하시는 경고'의 말씀에 대해 온전히 귀기울림이 절실히 요구됨이라 보는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3:)

주님의 양떼가 이러한 복을 받아 살도록, 적극 이끌어 주실  중차대한 책무가 오늘날 목회자님의 소관이시라 굳게 여겨봄입니다.
교인 2025.10.18 18:55  
성경을 보며 (개인적으로) 생각해봄이다.

여태 현상으로 총 공회와 온 교회가, 마치 옆구리에 채찍이, 몸에 가시가 되고 발목이 잡힌 듯 모습이다. (맞을진대) 이 현상이 어느 한쪽에 국한된 게 아니며, ‘오늘날 그 양성원을 향하신 주님의 뜻을 총 공회소속의 온 교회가 실로 목도하고 오늘에 경고의 음성’을 들어야 마땅함이다.
(총 공회와 온 교회가) 어떻게 변해야할 지에 대한 ‘믿음과 생각과 행동이 새롭게 작동’되어야하고, (놓은) 촛대를 굳게 붙잡아야만 참 사는 길이라 여겨봄이다.

긴 세월 그곳에서의 경영이 끊어지고 주님과 그 몸 된 교회 간의 약속이 깨어진 그 결정적인 이유와 근거가 무엇인지..
여태껏 현상이, 모든 지체가, 하나님과 삶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함이라면, 주님 앞에 도무지 죄를 범치 아니한 결말인 것이며 긴 세월 이 모든 과정에서 (서로가) 옳지 않은 게 없다함이면, 그 대한 명확한 견해가(주장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최고최선을 추구하는 총 공회의 속성상, 분명 그 대한 병증(변명)의 이유와 근거가 있다 봄이다. 이에 대한 양방의 공적인 견해를(주장을) 주님의 양 무리가 듣고 명쾌히 분별함이 적극 요구 됨이다.

주님의 면전에 나아가 온 지체가 바짝 엎드려 (잘못을)토설하며 그 절대 긍정으로써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은혜로 채워 주님의 뜻을 기어코 세워 (죽은) 양성원을 되살리고 큰 활력을 적극 도모해야함이다. 그 한 이유로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세움 입은 터이며, 그 공동된 책무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일군으로 부르심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어 헌신코자 인정된 곳이라 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전파자의 사명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순종으로 감당하고자 설립함이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모두의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총 공회의 증인’이 되심이라 여겨봄이다. 그럴진대, 주님 안에 형제들의 서로가 이 현상을 결코 원치 아니함이라 보는 이유 중 하나로서, 지금까지 애초의 길이 막힌 나머지 아무런 선한 열매가 맺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다면 그 받은 신령한 은사를 견고케 해야 주님 앞에 마땅한 도리이며,  그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이 되는 것이다. 여전 분쟁의 지속으로써 전진과 안위를 얻는다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상식의 이치에도 어긋남이다.
교인 2025.10.20 19:33  
당시 총 공회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공히) 가고자한 좋은 길이 줄곧 막혔음이다. 즉, 시초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쁘게 받은 신령한 은사가 (온통 땅에 묻어 놓은 듯) 상실되고, 그곳에서 공히 주님의 선한 일을 이룸에 따른, 주님께 감사와 간증꺼리가 아예 없음이다.

줄곧 어두움의 모습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여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며 감사함이 넘치게 한 결말인지 (아님인지),
복음을 부끄러워한바와 다름없는 결말인 것인지 (아님인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하신 말씀에 부합함인지 (아님인지),

본디 그곳에서 공히 좇고자했던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 편의) 불의로 결코 막지 않음이며, 오히려 경건함을 좇은 결말인 것인지 (아님인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여 알게 해야 함을 (인간 편에서)저해한 결말인 것인지 (아님인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된 결말로서 주님의 책망이 있으심이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 아닐진대, 그 주님의 책망을 자초(자인)한 결말인지 (아닌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말씀했는데, 양방각기의 증거로써 다른 한쪽의 생각들을 (서로)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오늘까지의 이 모습이 어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자랑한 증거 됨인지 (아닌 것인지),                             

온 교회가 주님께 빚진 자의 참 모습인 결말인지 (아닌 것인지),
최고로 자처하는(여기는) 총 공회의 교리신조행정에 부합함인지 (아님인지),

애초 (주님과 또한 지체간의) 약조를 벗어나 그 공히 지녔던 선한 동기와 생각이 허망하여진 현상이, (성경에) ‘두마음을 품은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진 결말인 것인지 (결단코 아닐진대 무엇에 연유됨인지),                             
                                                                                                                                                                                              &lt;다음에 이음&gt;
교인 2025.10.21 19:05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세상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말씀했다.
서로의 주장과 분쟁으로 인해,
이미 그곳에선 하나님의 참되심이 풍성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어도,
하나님의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지고 실로 어둠을 걷어내지 못하여도,
모두의 산 행위로써 의로 여기신바 됨이 없으며 주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을만한 자랑이 없어도 온 지체의 행복 됨인지,

애초를 벗어난 이 현상이 어떠하게_,

예수그리스도의 신령함에 따름인바 결코 의문에 있지 않으며, 또한 이로 칭찬일진대 사람에게서가 아니며, 서로의 견해가(주장이) 상대 쪽보다 더 나음이라면 무엇이겠으며 그로 (얻는) 유익이 무엇이겠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옳게 행함인 것이며,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지 않음이며, 주의 말씀에 따라 의롭다하심을 받고 판단 받으실 때에 (상대의 지체들을) 이김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인한 것임을 변증할 수 있음인지,

서로 주장이 하나님의 의를 실로 드러나게 한 것이라 선언함이 정녕 맞는다면, 각기로 치우친 나머지 함께 이룰 터가 무익하게 되고 공회가 산산이 갈라지고 형제간 고생의 길을 가고 평강이 없어도 나와 뜻이 같은 무리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도 없으며,
그곳에서 함께 이룰 주님을 위한 선이 하나도 없어도, 그로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없으며 이로 정죄 받음과 심판도 없게 됨인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타낸 지극히 선한 것일 따름이며 그 굳게 세움인지,
애초의 약정을 폐함도 아니며, 주님위한 그 믿음의 연고일 뿐 헛일도 아니며 주님의 의를 이룬 표(상)인 것인지,

형제간에 더불어 화평이 깨어져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이 있는 표(상)인 것인지,
주님의 의를 순종한 행위로써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고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결말로서 뭇 이웃의 표(상)됨인지,

여태껏 애초의 공동된 소망이 끊어져도 (주님의 몸 된 온 지체로서)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결말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양방의 마음에 부으심 되고, 이를 좋게 여긴 인정의 것인지,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결말인 것이며, 이로 후손들이 선대의 믿음의 자취를 좇게 하여 은혜의 후사로 굳게 함이며, 실로 모본 되어 믿음의 후손들이 주님의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함인지,
여태껏 양방각기로 당한 환난이 실로 죄를 짓지 아니한 연고의 환난인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로 받은 흡족과 넘침인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각기 즐거워한 결말인 것인지,

(이 현상이) 피차 주님의 책망을 동시에 받음이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있음인지,
애초의 믿음에 따라 여전 견고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림을 확신함인지.
서로 욕되게 함이 아니며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 편에서 가리운 게 아니라 더 위함이며 더 섬김이며, 영원히 찬송을 받으시는 주님 위함인지,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바꾼 부끄러운 욕심이 아니라 애초의 주님의 선한 뜻을 두기를 좋아한 (불일 듯) 선한 욕심의 결말인 것인지,

양방의 견해가 갈려 각기로 행할 뿐 아니라 내내 나와 내 쪽이 옳다함이면 애초의 ‘하나님의 정하심이란 그 공동된 믿음‘이 어찌 필요했음인지,

(본의 아니게) 서로를 판단하는 것으로 이미 스스로를 정죄함이며 또한 서로가 그 같은 일을 행함인지 (아닌 것인지), 그게 아닌 것이면 진리대로 하나님의 판단하심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음인지를 생각해봄이다.
공회원 2025.10.22 18:03  
'서로의 주장과 분쟁으로 인해'
&gt; 이미 사실 관계와 상황 판단은 끝나지 않았을까요? 한 쪽은 명확히 잘못된 것이 나왔다고 보입니다.
&gt; 한 쪽은 대화와 협의를 요청하고, 한 쪽은 무조건 법원으로 무조건 처단으로 달려 가고 있습니다.




견해가(주장이) 상대 쪽보다 더 나음이라면 무엇이겠으며 그로 (얻는) 유익이 무엇이겠는지,
&gt; 예수님의 처형을 두고 왜 타협하지 않았느냐고 양쪽을 비판하면 곤란해 보입니다.
&gt; 한 쪽은 그러지 말자는 이야기만 처음부터 30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양비론은 참 곤란해 보입니다.

 


공회가 산산이 갈라지고 형제간 고생의 길을 가고 평강이 없어도
 &gt; 그러지 말자는 말만 하는 쪽에게 양비론처럼 말씀하시면 공격하는 쪽에 서는 것이 됩니다.




형제간에 더불어 화평이 깨어져도
&gt; 지금 이 곳이 윗글을 적은 분의 마음입니다. 이미 양쪽의 입장은 있는 그대로 다 공개 되었습니다.
&gt; 출석하는 교회와 소속 공회에게도 이런 글과 말씀을 내부에서 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양방의 견해가 갈려 각기로 행할 뿐 아니라 내내 나와 내 쪽이 옳다함이면
&gt; 천주교로부터 5백년 기독교가 새로 출발할 때 이런 글을 적을 수 있었을까요?
&gt; 고신에게 제명 당해 밀려 나는 공회를 따라 오며 돌을 던지며 화합을 주장할 수 있는지요?
교인 2025.10.22 18:42  
교회에나 각 지체 간, (부정적으로) 안 좋은 거 시끄러운 거 나쁜 거..를 눈에 담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은혜에 시선을 둠이 매우 지당함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문제는, (예로) 총 공회의 발전과 바른 믿음의 정체성의 정립을 위해서라도 필히 짚고 급속히 선결해야할 매우 심각한 문제인 것이라 생각해봄이다.

애초대로면 그곳에서 (총 공회가) 주님의 선을 줄곧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줄곧 일구어야함이다. 그런데 (아심 대로) 서로 당을 지어 다투며 (애초 서로 약속된 그곳에서) 여일 진리를 좇지 아니함은 불의에 머물게 됨이고 이는 결국, 주님의 노와 분으로 (심판)하심을 매우 근심해야함이라 생각해봄이다.

(이를 두고) 자꾸 되풀이 하게 됨은, 이 어두운 현상이 분명,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이며 온 지체의 근심되고 불행이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모습이 성경적으로 매우 합당함이면,
(이 현상에 있어) 나와 우리 쪽은 이 현상의 결말에 아무런 잘못이 없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심판에 걸리지 않음이란 성경적 확증이 분명히 있다면,
총 공회란 울타리에 속한 이상,
그 변증을 주님의 양무리가 듣고 밝히 분별해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보며, (그 분별로) 믿음에 확신을 지니고 살아야 맹목적 신앙이 아님이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산자이며, (죄에게) 종노릇할 수 없기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본받아 온 지체가 연합하여 (말씀)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러 거룩함에 열매를 얻도록 행하는 게 (성경적) 순리라 여겨봄이다.

애초에 함께 그 세움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사람의 의를 따라 하나님의 의를 복종코자함이 결코 아니라 봄이다. ‘주님의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하심대로, 한낱 세상의 지식을 좇아 자아의(사람의) 의를 세우려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여 (그 의를) 이루고자했음이 온 양무리의 마음에 원함이었고 그 확신이 맞을진대, 새 생명 입은 자로 줄곧 행함이 주님 앞에 도리라 여겨봄이다.

그런 면에서, "'주님위한 그 선한 사업과 이룸'에 있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아예 버리도록'" 일깨움을 받아야할 양 무리의 입장에선 (여태껏 모습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음이다.
작은 교단임에도 애초처럼 연합은 도시(都是) 없고 각자 (각 공회로 흩어져) 도생하고 있음이다. (애초에 즐거운 분립도 아닌) 이 현상으로 각기 외롭고 힘들게 마련이며 궁극적으로 온 지체의 슬픔 됨이라 근심함이 여태 지워지지가 않음이다.
교인 2025.10.23 19:42  
(총 공회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전파’하고자 세웠음이면, 여전 그 지속이어야만 합당함이다. 그런데, 여태껏 제 ‘구실’을 전혀 못함은, (영적인 비유로) 마치 ‘중풍을 맞은 듯 모습’이라 생각됨이다.
그렇게 되면, (그곳에서) 예수님의 권세를 실로 경험하며 이로 놀라운 일들을 일으킬 변화나 그 발전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기회와 운동(력)의 계기가 전혀 일어 날 수가 없다.
(성경에서) 결국, 그 중풍병자가 일상을 회복하였다. 그 ‘믿음이 지붕을 뜯는 무리’를 하여 병 고침을 받았다.
그런데, 여태껏 애초 총 공회가 공히 지녔던 그 ‘신령한 사업’을 이룸에 있어, 그 ‘간절한 무리’가 지금 총 공회적으로 있음인지 의문이다.
'주님의 일'이라 함을 (애초) 총 공회적으로 정녕 믿고 출발했던 것이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원래대로의 회복으로써 온 지체의 건강의 회복이 매우 절실함이라 생각함이다.

긴 세월, 격식만 따지고 엉뚱한 데에 ‘무리’를 두게 되면 믿음 찬 전진이 있을 수 없으며, (애초를 따라) ‘무리’를 해서라도 (애초의) ‘강한 믿음’을 주님 앞에 보일 적에 치유와 회복의 선물을 받게 됨이라 생각해봄이다.
교인 2025.10.24 18:54  
(그곳 현상이) ‘어떠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실로 보여주고 있음인지를 (짧은 지식으로)생각해봄이다. (그곳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부자’ 되고자함일 진대는, 먼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함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결국엔) 망하게 됨이라 배움이다.

이 현상이 정녕, 애초를 여신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오해하지 않게 함이며, 하나님을 실로 두려함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뿜겨진 현상인지,
(그 반대로) 진실과 인애와 사랑이 안보이며 갈등과 논쟁의 지속인 것이 무엇을 의지하고 치중하기 때문이며, 과연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참 의지한 현상인지를 생각해봄이다.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말씀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비방 분쟁 미움 갈등 분노와 수군수군하고 부딪히고 업신여김은, 형제간에 근심꺼리가 됨이다.
이로 믿음에 손해와, 또한 선한 것이 비방을 받는 빌미가 되는 것이며, 이럼이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씀을 무너뜨리게 되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게 되고 형제간에 거리낌만 팽배함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서로를 의심하며 정죄하는 행위는 믿음으로 좆아하지 아니한 연고이며, 이로써 불행을 자초하게 됨이 성경적 이치라 생각해봄이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주님의 뜻을 같게 하고 '견고'히 해야 함이 말씀 따른 이치로 봄이다.
총 공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순종코자함 외에, 누구가, 주님의 면전에서 (애초의) 전진에 제동을 걸 수 있음인지..총 공회적인 기쁨이었고, 또한 주님의 몸 된 온 지체가 주님께 빚진 자로써 주님과 복음위해 사명으로 기꺼이 받은 '신령한 사업과 그 경영을 육신의 것으로 바꿀 수 없음'이 성경적 이치로 여겨봄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말씀했다.

속아 주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줌 가운데 그 영광을 목도하도록 (온 지체가) 한마음의 회개와 기도로써 ‘응답의 회복’이 있어야 그 정상화는 물론, 양 무리들이 평안을 찾게 됨이다. 그럼 속에 오히려 서로를 격려로 바꾸며 주님 예비하신 정도를 따라 '총 공회의 진보'의 모습이어야, 양무리가 신뢰하고 안심하며 따르게 됨이다. 늘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적에, 양 무리가 덩달아 신나며 평안이 있게 마련이다.
교인 2025.10.25 17:09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복음전파의 사역과 그 충성 위함과 연구를 (긴 세월)극구 마다한 이유가,
각기로 (이럼이) 주님께 선한 판단을 받음이기 때문에 여전히 (이 현상에) 머물고 있음인지 (또 다름이 무엇인지).. 이는, 그곳에서 주님위해 여일한 도모로써 전진하기보다, 그 책임을 서로에 전가함이 매우 앞서고 더 중대하며 큰일 됨이라 판단되기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이 현상이, 나와 내 쪽엔 자책할 아무 것도 없고 따라서 주님 앞에 죄책을(잘못을) 깨달을 아무런 것도 없으며, 결국 이로 인해 주님께 의롭다 하심을 (설령) 얻게 됨이라 여김이어도, 궁극으로 이를 '판단'하실 이는 우리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이 어두움에 갇힌 것들을 드러내고 각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심을 위로 받으며 묵묵히, 공히,애초대로 행함이 마땅함이라 여겨봄이다. ‘성경에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하신 말씀 따라, 서로 대적의 마음은 주님 앞에 교만이기에 이를 넘지 말아야함이라는 생각을 해봄이다.
교인 2025.10.26 18:25  
이 현상을,  (깊은 신학적인 면은 모르나) 단순한 비유로서,

(한 측면으로의 생각이) 애초, ‘총공회가 그 '주님의 사업에 있어 주님과 동업으로 약속'되고 시작된 게 아니겠는지.. (맞을진대) 긴 세월 분쟁으로 인해 그 문이 굳게 닫혀 (그곳에) 성령으로 임재하실(하신) 주님을 저버린 현상임이, (호세아서에서 보듯) 마치, 주님을 사랑한 마음에 정함을 뒤로한  바람난 여인(신부)같은 모습을 연상케 됨이다.
(마치) 신랑 되신 우리 주님과의 (첫)사랑에 부도가 난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게 됨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주님의 일을 위한, ‘애절한 마음과 성실이 그간 온통 사라진 현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이..하나님을 외면’했듯, 이곳의 중심에 거하실 ‘신랑 되신 주님’을 긴 세월 결코 저버리지(외면하지) 않았음이면, 어떠하게 (성경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음인지,

이는, ‘총공회라 일컫는 신부’가 그간 주님과의 동거 동행을 싫어하여 주님과의 연합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를 저버린 나머지 (마치) 배신한 듯 모습인지 (결코 아닌 것인지),

애초 총공회가 ‘구별된 감사’로 받았음일진대 어찌 받지 않음같이 (애초에 입은 감사를) 숫제 버린 듯 모습이다. (맞을진대) 긴 세월 이 현상이, (총공회가) 어떤 마음에 미혹된 결말인지, (주님위해) 어디에 시선을 두며 무엇 위해 누굴 만나기에 바빴음인지, 실로 '왕과 선지직'의 사명에 따른 모습이겠으며, (즐거이 받은) 부요를 어찌 미말에 두었음이며, 이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음인지 (아닌 것인지),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어떠하게 밝히 변명(변증)할 수 있음인지를 생각해봄이다.

부모가 서로 싸우며 다투고 급기야 헤어지게 되면, 아이들의 마음에 평안이 없어지고 믿음과 정서상에 굉장히 문제가 생겨나기 마련이며, (하물며) 짧지 않은 세월에 주님과의 사랑이 아예 끊겨진 그 탄식된 와중(과정)에 태어난 믿음의 후손들이 또한 어찌 됨인지, (과거는 물론) 앞으로 제대로 성장할 수가 있(었)겠음인지..,

“애초 양성원을 ’배‘”로 치면, 마치, ‘그 배가 산으로 간 듯함이다. 그 뱃사공이 많아 제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운 나머지, 주님 영광위한 푯대와 방향을 잃고 주님의 일이 멈춰져 결국 선한 목표를 일구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그간) 흘러왔음인지 (아닌 것인지),
이를 여태 지켜보시는 그 '배의 주인' 되신 우리 주님의 심정이 어떠하실지..를 생각해봄이다.
(속담으로,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듯), 긴 세월, 힘 있는 위치의 분들이 다투는 틈에, 힘없고 어리고 약한 교인들이 그 사이에 끼어 신앙생활에 피해를 보고 있는 현상인지 (아닌 것인지),
이 현상이, 오늘날 주님의 심판과 경고의 말씀이 정녕 없겠음인지를 근심해봄이며, 필히 분별할 과제로 여겨봄이다.
교인 2025.10.27 19:21  
(깊은 신학적인 면은 모르나), (열 처녀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서 주님을 기다렸으며 그들은 결국, 주님을 맞이했고 천국의 혼인잔치에 들어갔다. (축소적면으로 견주어) 이 현상이 과연 슬기로운 다섯처녀처럼 기다리며 행함 같은 모습일지..성경을 보고,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사역하는 ..,(일반적) 모습으로 마냥 기다린다고만 해서 정녕 슬기로운 처녀 됨의 모습일지..에 대해 더 깨닫고 싶은 심정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말씀했다.
슬기로운 처녀가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든 자기 생각의 관념이나 주관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로 잘 들었기 때문’이란 말에 공감됨이다. 
(개인적으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당시 총공회가 주님의 뜻이 이곳에서도 이루어지길, 공히 소망했고 말씀과 기도로 (주님께) 물어 그 확정된 게 맞음이면,
(그 노력과 희생과 헌신의 크고 작음은 차치하고라도) ‘오늘에 주님의 음성을 따라 그 실천‘이 행해져야함인데, 그간 아무런 실제적인 과정을 밟지도 않았음은 주님께 (애초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언약을 파기(훼손)함이 되고 이는 주님을 미워함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지를 생각해봄이다.

이로(어둠의 모습으로) 흘러 보낸 세월이 짧지 않음이다. 이 현상을 볼라치면, 애초 그 세움이, 주님의 응답인 것인지 (그게 아님인지), 아니면 당시 기도로 물은바, ‘주님의 분명한 음성’임에도 (주님의 음성을) 놓친 결말인지가 궁금함이다.

이 현상의 모습이 ‘단련의 과정’이라 하여도 이를 방관으로 내내 넘긴다면, 총 공회의 장래가 매우 어둡고 불투명함이라 생각해봄이다. 서로 간, 변명이나 제각기로의 생성에서 벗어나, 이 난맥에 있어 비성경적인 게 무엇인지를 샅샅이 살펴 인정함 가운데,
“시초대로의 실로 복원이 ‘총 공회다운 진면목의 모습’”이라 굳게 여겨봄이다.

그럼 위해, 그 전에 총공회적인 하나의 '과제'는 분명함이라 여겨봄이다. 이 현상이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에 기인 된 게 있는지를 낱낱이 찾아 그 인정함에서 그침이 아니라,
'온 지체가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려야'함 외에, (이보다) 더 합당한 분별이 무엇이겠는지를 생각해보게 됨이다.
이 현상의 지속이, 하나님의 심판이심을 분명 깨닫고 주님의 면전에 온 지체가 엎드려야할 결말인지 (아닌 것인지), 이 현상을 두고 볼 적에, 총 공회의 (앞날의) 희망은 (모두가) 주님 앞에 엎드려야함을 주저해선 안 됨이 온 지체의 공감이라 여겨봄이다. (성경말씀에 따른 원리라 보기에 그러함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 오늘에 온 목회자님이 앞장 서주심이 절실하며, 당대의 목회자님들이 (그리) 못하심이면 후대의 목회자님들이 그 일에 진행을 적극 주선해주심이다.
이 위기를 소홀히 또는 등한시하면 온 지체의 고통인 것이며,
지금 요청됨은,
형제간에 어떠한 변명(변증)이나 (난제의 해결을) 세월에 마냥 맡김도 아닌,
빠른 회복과 그 변화위해 필히 극복해야할 사안이라 여겨봄이며.
공히, 그 실제적 증명에 ‘필요공감’과 규모 있는 ‘일로실행’이, 실로 총 공회의 저력’됨이라 굳게 여겨봄이다.

주님께선 (바람이 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쫒아내지 아니하시고 (나하고) 살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에서) 보게 됨이다.
“주님과의 사랑의 ‘복원’과, 다시금 그 ’신부된 값‘“을 하기위해,
오늘날 후대의 목회자님들의 적극적인 희생과 그 역할이 무척 기대됨이다.
교인 2025.10.28 20:03  
(비유로서),  ‘애초 양성원’을 사람으로 치면, 머리는 혼돈에 빠져있고 마음과 육신은 피곤에 지치고 병들었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누구에게) 크게 맞은 듯 성한 곳이 없이 거반 죽은 자의 모습 같음이 아니겠는지..를 생각해봄이다.
장차,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심’이라 말씀했는데, (개인이든 교회공동체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로써, 늘 어떻게 준비하고 살아야할지를 근심해봄이다.

근래, 그 겉모습이 말쑥하게 단장되었고 외모적으로 무척 밝으며 좋은 모습으로 보임이다. 근데, 혹여 라도,
애초의 그 '공동된 총체적 합의'를 비켜나 '일부 공회끼리 수평적 방법(방편)'으로써 (애초를 벗어난) 추진을 동원함이라면, 애초 총공회적으로 하나님영광위한 사업의 도모가 '탈바꿈방식(형식)'이 되는 것이며, 이는 애초 총공회의 '동기와 대의와 목적을 비켜나 그 훼손'됨이란 생각을 해봄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인간적인(수평적) 방법으로써 (주님의 심판을) 결코 멈출 수 있는 게 아님이다.  당시 주님께 온 지체의 기도로 일궈진 그 통일된 (단일)체계가 아닌,
'소수된 공회의 편의'로 치부(치중)되고 그 운영이 된다면 '애초 총공회의 모습이 결코 아닌 것이고 무색' 됨이며, 애초처럼, '총공회적으로의 복원이어야 (애초처럼) 온 지체 된 상호(적)관계와 원리에도 부합'됨이라 여겨봄이다.

그 땅에 공히, 터를 닦고 세운 이유가 주님 영광위한 것임이 분명코 맞을 진대는,
“‘애초대로의 총 공회’”가 ‘주님의 마음에 합한 그 증거로서 여일전진’“함을, 주님의 양떼가 또한 믿음의 눈으로 목격해야함이다. (애초)그 지음에 대한 주님의 은혜를 맛보아 알지 못함이면 (애초에 주님께 모든 기도로 약속된) 주님의 심정을 알려하지도 못함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됨이다.
(애초 된 그 멈춤을) 만홀히 여겨 멀리하게 됨은, (애초를 견줄 적에) 결국, 주님의 만홀히 여기심을 받을까를 심히 두려워해야하지 않겠는지..를 근심해봄이다.

(애초를 견줄 적에), 총공회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실 주님을 실로 인정함이 마땅함이며, 주님께 감사의 향기가 그곳에서 (총공회적으로) 넘쳐나야 합당함이라 여겨봄이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진대..’의 말씀처럼, (그곳이) 주님께서 '총공회를 도구'로 세운 증거이며 그 '산물'임을 실로 인정함이면, 그곳의 모든 주인 되심이 우리 주님이심을 알아보는 믿음과 감사로써 (애초대로의 총공회가) 주님께 감격을 올려드리는, 실로, ‘두루 (공히)관계된 터’가 되어져야 합당함이라 여겨봄이다.
교인 2025.10.29 18:46  
최근, ‘노곡동 기도원’과 관련, 그 소유(권)을 두고 송사(訟事)로 휘말린 모습을 읽게 됨이다. 그 연장선으로, ‘애초 양성원’과 관련하여 그 귀추가 주목됨이다.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말씀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 위함을 함께 사모’하여 특별히 세운 곳이며 그 기반으로 신령한 것을 뿌려 얻기를 소망했음이 맞음이면,
이 모습은, ‘그 존재목적'이 애초 질서대로가 아니며 그 빛을 잃어 (말씀에 비추어 볼 적에) 육신의 것만 거둠의 현상이라 하여도 과하지 않은 모습으로 생각됨이다.
그 향방에 관심가지고 지켜봄이나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음이다. 다른 당한 이런 유의 일들을 거울로 삼으며 '총공회적인 경계’로 삼아야하지 않겠는지..,이게(형제간에 송사가), 마치 ‘주님을 시험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비단 나만 듦인지..무척 혼동됨이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 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말씀했다.

(말씀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존재'이다. 그런데 오히려, 세상 법에 “‘형제간의 송사’”인 게, 성경말씀에 정녕 위배(위반)된 경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도 아닌 것이며, 사람편의(주의)로써 유익 삼고자함이 되고 마는 것이며, 또한 (위의) “‘하나님말씀과 ‘겸’”하여 (상호) 충돌이 되며, 교회와 서로 형제간에 거침이 되어 짐이다. 모든 지체의 기쁨과 유익을 구하여 (이른바) ‘기능적인 구원’을 얻게 되는 탁월한 방편이라 볼 수 없으며, 과연 (서로에) 많은 선한 유익을 얻게 되고 덕을 세우는 것이겠는지..를 생각해봄이다.
위 (기록된) 말씀이, 이와는(이 송사와는) 무관함이면, 그 구체적인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양떼에게 깨우쳐주심이 마땅함이라 여겨봄이다.
교인 2025.10.30 19:37  
&lt;이에 따른, 성경말씀과 그 신학적인 깊이를 잘 모르나&gt;
가령, 어느 믿는 가정의 자식들이 ‘세상의 법에 송사’하는 경우, 부모가 (이를) 한사코 뜯어말리지 않겠는지.., 그 직접으로, 내 가정의 자식들이 서로 의견이 맞선 나머지 '고소'한다 치면, 정상의 부모라 하면 그 권리를 적극 행사하여 이루라며 부추길 것인지..,그럴 적에, 그 ‘격’으로써, 내 혈육은 그러면(송사하면) 안 되고 주안에 지체들은 (그러)해도 합당하겠음인지..,
또한, 애초 그 세움 위한 연보가, (그 차이는 있을지나) 당시 일부공회만의 참여로 이룬 게 아닌, 공동의 참여로써 그 소유된 자산이라 봄이다. 그럴진대 그 일부(공회)의 주견으로써 실제적 권한을 행사하려함이, 전 지체의 공유됨에 걸맞지 않으며, 이는 일반사회규범(도덕, 관습)에나 이치에도 합리됨인지 의문됨이다.

(한마디로) 주님을 믿는 자는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말씀했다. 그런 고귀한 신분으로 인침 받았기에, ‘세상의 판단(법)으로 죄 정함’을 받는 것은 (성경적으로) 그 합당함이 아니라 여겨봄이다.
서로 지체된 형제를 (세상 법에) 송사하여 비록 이긴다 해도 (이럼이)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겠는지, 상대의 형제들을 무례히 행치 아니함이며, 피차 해로움이 안 될 뿐더러 도리어 (해당) 지체는 물론 온 지체에 요긴 되어 유익이 되며,  이로 결국 (주님께)칭찬받음이 명확하다면, 그 성경적인 구체적 근거가 어떠함인지..,

형제 된 신분으로, ‘세상 법에 편당적인 송사’가 성경적이고 그 합당함이라하여 (더구나 목양위치의 직무로서) ‘선례’로 남기게 되면, 뭇 신도들도 (툭하여) 고소해도 무방함인지..,
그럼이면, 긴 세월에 걸쳐 형제간 불신과 갈등..등의 혼란이 걷잡을 수없이 야기될 수 있지 않겠는지.., 그럴진대, 이를 (옆에서) 뻔히 목격하실 동역자님 들이, (이를) 극구 말리심이어야 진정 양떼를 사랑하고 위함이며, 이치적으로나 성경적인 합당한 도리가 아니겠는지를 생각해봄이다.

다른 지체들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심을 믿을 진대는 한 형제임이다. 이를 하나님의 지식으로 볼진대, 주안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값으로 사신바 된 ‘주께 속한 자유자’임이다.  주님으로부터 그 권위 된 자유와 사랑을 입은 자가, 사회적 양심과 법리로 해석하는 수평적 편의와 위주중심에  속박이 될 수 있는지에 의문됨이다. 따라서 그 위(상으)로써, 각 교단에선 여러 면에 따라 고유한 법규를 가지고 (소속된) 신자의 신앙 및 행위의 기준을 두며 적용하고 있음이란 생각을 해보게 됨이다.
부공3 2025.10.31 14:30  
말씀은 충분히 이해를 하겠으나 말씀의 분량은 너무 많고 핵심은 겉돌고 있어 보입니다. 윗글을 적은 분의 모든 말씀을 따라 하려고 한쪽은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공2는 무조건 고소만 하고 법원만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윗글의 '교인'은 부공2의 중심에 계신 듯합니다.

소속하신 부공2와 서부교회에 이 곳에 적은 글을 먼저 게재해 보셨습니까? 북한은 오로지 남침만 계획하고 남한의 좌파는 오로지 남한에게 화해만 하라 합니다. 결국은 북한을 돕는 남로당이든 남한 좌파든 결과는 같아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부공2는 어떻게 해야 하고, 부공3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교인 2025.10.31 18:54  
(위 내용들에 대한 생각은), 
‘..말의 분량은 너무 많고..’에 관하여선, (그곳을) 긴 세월 묵혀둔 현상이 (개인적으로) 너무 이상스러워 싸인 게 많다보니 그럼이며,
‘핵심은 겉돌고..’에 관해선, 이에 관련된 지식과 그 표현(력)이 부족하여 너절함이며, ‘애초양성원‘이 그 사실적으로 어떤 모습인지와, (애초모습대로) 탈바꿈해야함이 도리이며 그 합당함이란 (개인적인) 생각을 누누이 나름대로 표현해본 것이며,
‘..한쪽은 최대한 노력하고..’에 관하여선, 주님을 위한 열성은 분명코 주님이 아심이 성경말씀이며,
‘부공2는 무조건 고소만 하고 법원만 해결해 준다고..그런데 윗글의 '교인'은 부공2의 중심에 계신 듯..’에 관하여선,  ‘송사’는 잘못됨이란 개인적인 의견을 비록 너절히 말했을 뿐, 부공2의 중심에서 쓴 것이거나 그런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으며, (이른바) 부공3을 염두에 두고 쓰지도 않았으며, (항상 그 실천이 어려워 자신 부끄럽지만) 하나님중심과 그 행실이 돼야함이란 모든 이의 여김과 공감이며,
‘소속하신 부공2와 서부교회에 이 곳에 적은 글을 먼저 게재해 보셨..? 북한은 오로지..남로당이든 남한 좌파든 결과는 같아..’의 부문에 관하여선, 시초의 글들에서, 애초양성원과 관련된 모든 목회자님, 그리고 (그 관련된) 위치의 분들 앞으로, (다른 공회들과 비교적으로 활성화돼 있다고 보는 이 홈을 빌려 양해를 구하며), 모든 분에 전해지길 바라며 올렸던 것이며, ‘북한남한..의 표현‘으로써 (이에) 대비함은 비약적 표현이라 생각하며,
‘구체적으로 부공2는 어떻게 해야 하고, 부공3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에 관해선,
이 내용들의 주제인 애초양성원에 있어, 그 시초와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떠했으며 또 지금 내부적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며, (개인적으로) 이 애초양성원문제의 해결의 극복은,  (그 큰 틀로 볼 적엔) 일차적으로 당시 그 중심에 있던 분들이며 더불어 오늘날 목회님들의 몫이라 여겨봄입니다.
교인 2025.11.01 19:41  
(위 '송사'의 내용에 있어,  ‘대구기도원’에 관한 언급은, 혹시 ’애초 양성원‘도 직접소송에 휘말릴까 조마함에서이며..마저 이어가면)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 말씀했다. 그곳은, (애초 총공회가) 위엣 것을 얻고자 땅에 것을 도구로 삼은 게 맞을 진대, '줄곧 그 중심하여 이루어감이 그 합당한 순리’라 여겨봄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굳이, (개별)공회가 ‘세상 법에 송사’하여 반드시 우리 것이 돼야 함이라면, 애초 총공회단위로 된 그 동기와 운영에 위반되며 이 또한 바른 질서인지에 이해가 잘 안됨이다.

이(애초 양성원의) 문제를 해결코자, 먼저 주님의 면전에 나아가 모든 기도로 묻는 것이 (믿는 자의) 우선된 도리며 그 자세라 여겨봄이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이를) ‘그 송사’로 맡기려함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거리낌이 없는 양심의 담력’이 요구됨이다. 그 성경적인 근거가 어떠함인지..,
또한 이 모습이(‘그 송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며, 온 지체를 기쁘게 하고 (주님의) 양떼의 유익을 실로 구현함이 되는 것이라면, 어떠하게, (총공회의 교리로 내세운, 이른바) ‘기능적 구원’을 얻게 되는 그 결정적 ‘요소’가 됨인지를 깨닫고 싶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위해 공히, ‘그 터’를 즐겁게 받았음에도 그간 참예가 없었음이, 애초 공히 부여받은 축복(권)’을 그(복음) 위해 실로 행사하지(쓰지) 아니한 증거며, 이로,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함에 줄곧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이 함이며, 이는 (성경말씀에 비추어, 영적으로) 눈먼 모습이 됨인지 (아닌 것인지),

‘애초가 총공회 양성원’임에도, 개별 공회적으로 이를 (독)차지할 (그 주인 된) 자격의 명분이 (그 성경적인 근거로) 무엇이겠음인지,
잠시(동안) 위임받아 단지 (주님위해) 행사할 것뿐이며, ‘복음을 세우고 지키고자한 일련의 과정 속에 일어난 형제간의 분요'를 ‘그 송사’로서 의뢰 하(려)는 행위는, 형제의 양심을 서로 상하게 하고 실족케 함이며, 이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올무를 스스로 자초함과 다를 바가 그 무엇이겠는지 (결코 아닌 것인지),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해결해야함을 뒤로하고, ‘그 송사로서 판단‘을 맡기려함은, 주객(主客)이 전도(거꾸로)됨이며, 이는, 분열된 공회의 통합을 저해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거치게 함인지 (아닌 것인지),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 말씀했는데, 당시의 총공회단위를 배제한, 개별 공회적  ‘그 송사’가 분명한 ‘성령에 의한 쏘임’이라면 그 근거가 어떠함인지,
이게 그릇됨일 경우는 곧, (위로)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며, (수평적관계로서) 서로사랑으로 덕을 세움을 거치게 함이며, 이는 (믿는 자로서 지켜야할) 경건과 거룩을 훼손함과 동시에 총공회의 품위를(격을) 떨어뜨림으로 인해, 온 지체와 총공회교단의 손실이 됨인지 (결코 아님인지),

이를 두고 굳이, 세상에 ‘그 송사’로서 가려주길 바라며 이에 신앙(심)과 긍지를 걸기까지 행함이어야 정녕 옳음인지, 더구나 ‘주님의 이름으로 인침을 받고 가르칠 직분으로 공히 세움 받은 동역자인 우리’이심에도, 양떼의 모본으로써 풀어야할 그 해법을 ‘그 송사’에 맡김은, 결과적으로 양떼의 매우 무거운 짐이 됨인지 (아닌 것인지),

그 세운 목적이 하나님 영광을 위함일진대 이 어둠의 형상은,  당시 모든 기도로 확정한 주님의 뜻을 (극구) 외면한 결말인 것이며, 이는 결국, 애초 총공회에 주신 주님의 뜻과 은혜보다 앞섬이기에 (주님 앞에) 교만인 결과인지 (아닌 것인지),
(그 공유와 공동된 애초대로의), 주님의 뜻을 되찾음에 최우선을 두기보다, (그 이룰 한 수단으로 한낱 도구인) ‘땅의 소유(권)’을 두고, ‘그 송사’에 매임이 근시적임인지 (아닌 것인지), 그 해소책의 최우선이며 최선이라면 그 기준이 어떠한 말씀에 근거됨인지,
‘그 (땅의) 주인이 (엄연히) 구별’됨을 외면함이면 그 (주인 된) 권한을 (본의 아니게) 탐한 월권이 되고 마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그 송사’의 수단으로서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의 주장은, 애초의 주님위함과 온 지체의 공동된 약속을 깨뜨림과 동시에 주님의 것임을 밀쳐낸바 됨이며, 오직 주님의 것으로 받아 다만, 거룩과 성실로 힘써 감당할 뿐인 관점으로 볼 적에, ‘그 송사’가 ‘그 땅’에 대한 상(商)적인 사고에 매인 모습으로 보아야함인지 (결코 아닌 것인지),

이게(‘그 송사’가) 세상의 지식이면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 움이 되는 것인바, 이를 두고  ‘세상 법에 묻고자함’이 하나님의 지혜인지, 세상의 지식인지..,
그 합당한 근거를 따라, 주님의 양들이 적극 일깨움 받아야할 과제로 여겨봄이다.
직원 2025.11.02 15:41  
이 애절한 글을 출석하는 교회 교인들께 전하셨는지..
서구와 동구가 핵으로 겨눌 때 서구의 좌파는 서구의 핵만 없애자고 했지 동구의 핵은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강남 좌파가 남한의 인권만 말하듯이. 핵과 인권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먼저 말씀을 했는지 이 글을 대할 때마다 늘 궁금합니다.
교인 2025.11.02 19:13  
<부기: 시초부터 이 글들의 주(된) 내용이, ‘애초 양성원’에 관해서이며,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분들에게 읽혀지길 바람’으로, 홈 관리자께 그 양해를 구하며 올리게 된 것입니다.

개적의견의 직접적인 개진은 (이·저모로)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간, 여러 면으로의 지적과 견해가 없지도 않을 것이나, 이 취지를 십분 양해하시며 (그간 댓글을) 자제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말이 많으면 그 실수도 많게  마련이며), 이 글을 쓰는 것만 해도 (성경말씀을 벗어날까) 나름 조바심과 버거움인데, 댓글에 대한 생각을 일일이 (나름의) 연구로 (표현)하기란, (개인적으로 그 시일도 많이 걸릴뿐더러) 성경지식이 매우 부족한 면, 등.. 여러 모로의 한계로 버거운 게 사실인 것입니다.
이 관련된 글들의 삭제를 (홈 관리자께) 이미 요청한바가 있으며,  (그 나름 이유로써), 비록 너절하고 두서없는 것이나 일단 읽혀지기만 하여도 그  다행으로 여김이며, 이 문제가 해결된 경우엔 (이를) 줄곧 게재될 그 명분이 없는 것이며, (언제가 될지 모르나), 그때까지 이 (내용)자체의 언급이, 밝은 주제가 아니기에 (대중적 홈에의) 줄곧 게제는 그 (애초 양성원의) 원만한 해결과 그 진행에 오히려 거침(돌)이 될 수도 있음이란 생각을 해봄이며, 또한 그 내용인즉, ‘목회자 양성원’과 관련된 것인바, 이는 '당연히 목회자의 선에서 해결'되어야할 사안이라 볼 적엔, (이 관련하여) 한낱 교인된 신분(위치)에서 말하는 게 시건방짐(주제넘고 버릇없음)이 아니겠는지를 생각하게 됨이며, (그 양성원을 주제로 한) 그 자체가, ‘목회자 선의 역할’에 간섭으로 치부되고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행위적으로) 성경말씀에 어긋나며, 이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림이 된다면 근심이 되는 것이며, 또한 믿음의 형제들과 자라가는 후손들의 구원과 덕을 세움에 있어  (이 저런 면으로) 시험과 손해를 끼침이 되면 매우 근심이 되고 마는 것이며, 또한 (설령 남의 구원엔 유익이 될지언정) 정작 안 그래도 지질한 모습인 나의 믿음과 복에 손해가 되는 것이면 (솔직히) 싫음이 되는 것이며..,여러 면으로 앞선, 생각이 들기에 (이의) 삭제를 요청하게 된 것인바, 그 시기는 (홈)관리자님의 판단에 맡긴 것이며, (금방 삭제되더라도) 그때까지 (이왕에) 더하고 싶은 것을 너절하나마 올리게 된 것이며, 혹 (주제와 관련) 하실 내용들이 있다면 (본란이 아닌) 단독으로 하시면 될 것입니다.>
직원 2025.11.03 12:13  
양성원만 적어 주신 '교인'님, 양성원과 거창 대구의 기도원은 한몸입니다. 분리가 안 됩니다. 1992년의 대구공회 소송이 대구고등법원에서 1994년에 끝났지만 그 시작은 양성원의 가처분이었습니다.

이 곳의 글은 이 노선의 외부 선언적 의미 때문에 수정조차 단순 교정 정도에 그치며 글의 삭제도 공론화가 되면 최대한 그대로 진행이 됩니다.

또한 공회란 출발부터 성직과 평신도, 목회자와 교인, 목사와 전도사의 선을 최대한 없앴습니다. 그 선이 단체 타락의 단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의 글이나 주교생의 글이나 이 곳을 비판하는 외부인의 글도 공회의 원래 취지에 따라 같이 대우하고 있습니다.
교인 2025.11.03 19:25  
<여전 혼잣말의 형식으로 이어봄은>
(애초대로 이루어가면 됨인데, 그게 뭐라고),  ‘땅’ 차지에 그리 싸우고자하심인지.., 영적으로 매우 혼동됨이다.
(비유로 맞을지),  ‘속담에, 나는 바담 풍해도 너는 바람 풍 해라’란 말이 있다. 내용인즉, 훈장이 혀 짧은 소리로 ‘바람 풍(風)’을 ’바담 풍‘이라고 가르치자 제자가 그대로 따라 했는데, 훈장이 제자에게는 ’바람 풍‘을 제대로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인용>.
'주님의 몸 된 교회내의 문제를 두고 세상의 법에 송사'함에 있어, 내가(내 쪽의 형제가)함이면 옳고, 남이(다른 형제 쪽에서)함이면 이에 엄격한 '이중 잣대'를 댈 수가 있(겠)음인지, (그게) 아닌 경우, 다른 쪽의 형제도 나(쪽)처럼 (그리)해도 무방함인지..,
‘그 땅’을 두고 다툼의 자체가 애초 총공회의 것임을 분명 부정함 되며, 주안에서 한 몸 이룬 다른 지체를 애써 밀쳐내려 함은 이중적 잣대이며 나아가 애초 된 연합마저 무너뜨림이 되고 마는 것인지 (결코 아닌 것인지),
여실히, 함께 이루심을 뒤로 둔 채, ‘그 송사’가, 스스로에게 관대함도 아니며 형제에게도 엄격한 이중 잣대를 댐이 아닐진대, (이에 전혀 오해가 없도록) 온 지체에게 밝히 설명해주실 일로 여겨봄이다.
온 머리를 맞대어, '총공회의 대의에 맞춘, 그 합력으로 탁월한 모색'에 치중하기보다, 한낱 ’땅’ 차지에 그 집중함이, 그토록 내세우며 추구하(려)는 ‘총공회의 교리신조행정’의 품격에 과연 걸맞음인지, 이는 되레, 총공회의 품위를 스스로 깎아 내리는 수치며, 이는 (애초의 대의에 비해) 속 좁은 발상인 것임인지 (아님인지), (타 교회에) 구경거리가 됨인지 (아님인지)를 생각해봄이다.
기어이 그럼이면(송사함이면), 온 교회에 그 성경적인 타당함을 교훈해주시어 온 지체가 이에 혼동이 없도록 적극 설명해주실 분명한 책무가 있으심이라 봄이며, 이에 (설령) 누가  물음이어도 (지금으로선 그 생각이)  여일함이다.
교인 2025.11.04 19:23  
‘땅’에 연연하게 된  그  근거가 있을 것인바, 근데 (짧은 생각으로서) ‘땅’이 ‘주님’보다 그 우선됨이 아닐진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함으로 받게 된 그것을 주신 주님의 뜻을  보다 더 생각함이 중요할지 아니면 그 받은 선물이 더 중요할지에 대한 이해는 쉬움이다. 그것을 선물로 받았음에 감사보다, 그 받은 ‘땅’에 시선 둠은, (마치) 아이가 그 선물을 주는 부모에게 감사보다 그것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격과 무엇이 다르겠음인지..를 생각해봄이다.
애초그곳이 ‘주님과 언약관계의 처소‘됨이라 여겨봄은, (그곳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산실(産室)’로 여겨지기 때문이며, (맞음이면), 그간 그곳에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과 감사와 이룸 없었던 그 이유로서, 주님께서 그 권약을 먼저 깨심인지, (아니면) 사람편의 조건으로써 깨뜨린바 된 때문인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 말씀했는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은) 안전에도 없는 듯, 조물주 하나님보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금송아지..피조물의 것을 더 경배하고 섬기는..(육체의 정욕으로서) 엉뚱해진 모습을 (성경에서) 읽게 됨이다.
그곳을 애초대로 여겨볼 적엔, (분명, 하나님을 앎인데도) 주님의 신성과 능력을 인정하지 않은바 됨이며, 그 명령(분부하심)을 좇지 아니한바 됨이며, 진리를 가로막는 경건치 않은 불의가 된바 됨이며, 긴 세월, 총공회적으로 예배가 없(었)고 찬양과 감사가 상실되고 건강한 역동(성)이 사라진바 되어져, (본의 아니게)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마음이 어두워진 현상의 모습인 것인지 (결코 아닌 현상인지),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시며 마귀는 어둠의 아비인데, 이 현상이 어둠의 모습일 진대는, 빛들의 아버지께서 (이에) 거하실 수 있음인지.., 어둠에 빠지게 됨은, (배운 대로는) 영적으로, 눈과 귀가 가려져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음성을 듣지 못한 한 이유로 보게 됨이다.

그럴진대, 오늘날, 서로의 지체에 무거운 짐이 되지 않으며,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에 빛으로 참 세움 된 총공회의 모습과 (주님의 면전에서) 함께 기뻐할 변증이 어떠해야함인지..를 생각해봄이다.
교인 2025.11.05 18:53  
<내용들에 그릇된 의미나 성경적으로 옳지 못한 게 있으면 정정해 주시어 바로 깨닫기를 원하며,>

오늘날, 무엇을 어떻게 붙잡아야 이 어둠을 벗어남인지_
호세아에서의 고멜을 애초의 총공회와 ‘비유’로 보건대, ‘신부된 총공회’가 그곳에 (성령으로) 임재하신 주님의 품을 떠나 여태 돌아오지 않은 모습으로 보게 됨이다.
이는 애초에, 입은 주님의 사랑을 배신함이며, 주님과의 동의와 동거 동행을 파기함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로서 그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의 동거와 화평의 가치를 서로 대립과 충돌로 깨고, (서로) 한 몸 됨이 폄하 된 현상이라 여겨봄이다.

(애초를 보건대), 총공회적으로 마땅히 함께해야할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애초 됨을) 등한시하고 관계를 끊어 버린 상황으로 여겨짐이다. 여태껏 (서로) 반목하고 다툼과 갈등을 겪으며 형제 된 화합과 본디의 협력을 저버린 형국이다.
이는, (내부적은 잘 모르며 다만 외부적으로 보건대), ‘애초의 총공회 단위적’ 발전을 위해 서로 돕고 함께해야할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개(별) 공회적인 이익의 추구에 치중하느라 총공회적인 노력을 심히 소홀히 하는 모습은 개 공회의 이기주의적인 모양새로 생각해봄이다. 오히려, 서로의 갈등을 말끔히 해소한 화목과 무관심에서 벗어나 그 발전을 위한 돈독한 관계를 잇는 모습을 봄이 양떼의 심증이라 여겨봄이다.

받은 가치와 은덕을 외면함은, 일반사회의 구성원들이 지켜야할 도덕적 규범(준칙)에도 어울리지가 않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그 죄(불의)에서 돌이켜 돌아오길(호14:1), 간절한 호소와 부탁하심을 읽게 됨이다. (그 맥락으로 보건대) 이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봄이다.
(한마디로) 총공회가, ‘ 말씀을 내려 놓았기 ' 때문이라 여겨봄이다.
(자신 쉽지 않으나) 믿는 자의 유일하게 사는 길은, 성경으로 돌아와야(돌이켜야) 함일진대, 이 어둠의 현상이, 무엇을 붙잡았기 때문인지..

앞길이 잘 보이질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의 길’이심이며 그러므로 (믿는 자에겐) ‘소망’이 있음이다. (앞뒤가 꽉 막혔어도) 하나님이 길을 내심이면 만사형통이라 배움이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적에 (앞에 막힌 바다가 활짝 열리고) 마른 땅이 되게 하셨음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총공회가 여전전진을 멈춘 채, 진흙덩이에 빠진 듯한 이 현실도,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면 '여전한 믿음 찬 전진’이 있을 줄로 믿게 됨을 적극 일깨워 주실 일로 여겨봄이다.
그 길 찾기 위해 어떠해야함인지.. (주님의 양떼에) 그 길 안내자로써 오늘날 목양의 위치에 서신 목회자이시며, 그 총공회의 저력을 보여주실 때가 '바로 이때'라 여김이며, 그 소망해봄이다.
교인 2025.11.06 19:33  
< 애초 양성원과 관련하여, 올린 첫 글이 2018년도로 봄이다. 긴 세월 ‘쓸쓸한 자태’의 모습에, 성경을 보거나 설교를 들으며 글들을 보다가 좁디좁은 지식을 두서없고 너절한 표현으로, 당시 이와 관련된 분들을 위시한, 지 공회의 대표성에 서신 단 한분(씩)이어도 보심이면 족함일 따름으로 올린 것이며, 그런데 과연 이 너절한 글을 거들떠보심이겠는지.., 또한 글의 폭이 점점 좁아짐에 따라..이제 곧 접어야할 듯싶다.>   

어떤 사물을 볼 적에, 인식 주체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 해석이 (완연히) 달라질 수도 있음이다. 그 어느 한 부분만을 보고 그 전체를 판단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음이다.
‘코끼리 만지기’의 (비유)처럼, ‘그 부분만을 만지고 전체라고 착각하는 인식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이며, 이를 ‘함께’ 공유하고 상호보완해서 전체를 인식하려 노력한다면 (그나마) 제대로 된 코끼리를 그리는 것도 그리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란 의미로 보게 됨이다.

오늘날 나와 우리에게도, 동일한 ‘주제’를 놓고도 그 결과는 인식 주체의 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이다. 어떤 인식으로써 봄인지에 따라 나중엔 그 방향의 각도가 큰 차이가 날 수 있음이다. 어느 특수한 면의 사례를, 내 선입견의 근거로서 일관화하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며 자칫 (그 오류에) 갇혀버릴 수도 있음이다. (그러기에 개인적으로 이 글들을 쓰면서 조심스럽다.)

‘애초 양성원’의 문제에 있어, (일반화의 관점은 참고하되) 그 ‘전체(성)의 맥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크게 보며 엄격하게 푸는 게 그 정석됨이라 생각해봄이다. 그럼이면, 그것에 대한 전체적인 판단(해석)을 소수이기보다  ‘함께’함이, 부분적인 것을 전체라며 착각하는 인식의 오류를 최대한 줄일 수 있음이라 여겨봄이다. 그럴진대, 온 목회자님이 열흘이고 한달이고..그곳에서 (이를 해결코자) 머리를 맞대는 모습이  실로 보고 싶어짐이다.
(이에 꼭 맞거나 비할 바 아니어도), 아무리 개(별) 공회의 주장이(견해가), 애당초의 ‘총공회적인 전부’가 된 해법인 것처럼 결론을 내리고 자기(각기 공회)의 말이 옳다하여도, 그(애초의) 총공회적인 동기와 대의와 목적과 그 실행의 면에 비출 적에 반사(反射)적으로 비켜남(어긋남)이면,
“애초에 공히 일궈낸 ’주님의 빛’”된 그 중심을 벗어남이며 매우 경계해야함이라 여겨봄이다.
(맞음이면), 이 해결에 있어,
개(별) 공회의 그 근거와 주장이 (애당초) 총공회의 대의적인 것(근거)에 필히 흡수돼야함이다. 비록 각 공회의 견해가 주님을 위함과 또한 상대를 배려한 묘사적인 설명이거나 그 확증이라 하여도, (애당초의) 그 전체(성)에 어긋남이면, 그보다 우월 된 대표성의 표본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각기적인 논거와 그 결론은, (애당초의) 그 원칙에 편향이며 그 객관적 평가에 오류 됨이라 생각해봄이다.

사람의 제한된 지식과 주관적 방법이나 경험이 성경보다 앞섬이면 문제를 (그리) 쉽게 풀기란 어렵다. (그 양성원을) 총체적으로 볼 적에, 저마다(공회 각기)의 견해가 서로 맞섬이기에 (본의 아닌) 이 어둠의 현상이 도래됨이며, 이로는 그 극복에 있어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봄이다.
그런데, 이것에 기인된 게 아님이면, 도대체 이 어려움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어쨌든 이 어둠에 내내 머묾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노릇이다.
그럴진대, 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함에 있어, 당연히, 그 전체를 볼 수 있는 성경적 ‘지혜’가 매우 요구됨이다. (이 모습에서 돌이켜), ‘(애초 된) 전체토대와 그 원활한 소통의 전제‘로써, (수직적으로) 하나님, (수평적으로) 형제의 연합과 화목의 관계를 원활케 하고자,
'그 함께한 지혜‘로써 반드시 풀어야만할, (총공회적인)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 여겨봄이다.

긴 세월 이 현상은 몹시 퇴행적이고 축소지향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음이라 보며, 문제를 문제로 삼기보다 (훌훌) 벗어던져버리도록 적극 이끌어주실 과제로 여겨봄이다. (온 지체가) 광대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총공회의 연합으로 향상일로의 새 역사를 만들어가도록 그 진보의 모색을 실로 급히 강구할 때라 봄이다. 그 실현으로써 곧 후대에게도 꿈과 도전을 심어줌이며, (이럼이) ‘총공회의 진면목 된 일로’라 굳게 여겨봄이다.
교인 2025.11.07 18:51  
<여전 혼잣말로서>
(그 이유는 차치하고서) 이 현상은, 그곳에서 하나님 영광과 복음위해 함께 약속된 사업이 중단된 결말인 것이다. (그 외부적으로 볼진대) 말씀 따로 행위 따로 인하여 (애초대로의)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일어나지가 않(았)음이다.
(스스로 부끄럽지만) 이는 주님의 백성 된 기본의 자세인,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온전히 믿음 된 결과라 보기 어려운 모습인 것이다.
이 해결에 있어, 총공회를 향하신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역사하심을 (총공회가) 실로 목격하고자하는,
(영적인) 넓은 안목과 그 실행이 오늘에 절실히 요구됨이다. 이는 마땅히 주님의 성도된 행실(행위,태도)이며, 이는 물론, 사회 심리학적인 적극성이거나 접근(법)이 결코 아님이다.

(개인적인) 그 실천적 면으로,

우선, 일단 ‘그곳에서 그 생산의 모색위한 총공회적인 모임’이 무조건 필시 이뤄져야함이다.
해묵은 (당시) 총공회적인 중대현안을, ‘(현실은 비록 지 공회로 갈렸으나) ’총공회의 실재성(존재성)에 따른 모임’ 없이 (전 분야가) 제대로 의논 될 리가 쉽지 않음이다. 이는 주님위한 그 실천적 목회와 권위와 양떼의 모본으로서라도, 매우 지당함이라 여겨봄이다.

그런데, (그곳을) 큰 비용을 들여 새롭게 말끔히 단장한 공회(측)에서 필시 그 문을 선뜻 열어 줄지...(개인적으론 전혀 모르나) 주안에서 한 형제 됨의 만남에 있어 인색할 것이란 지레짐작은
(상대)형제의 인격과 품위를 폄훼할 수 있음이다. 주님위한 그 모임에 있어 (호수 같은 마음가짐으로 다져진) 그 배려함에 있어, 철없는 어린이에게도 물음이면, 금방 그 답이 (매우) 쉬움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음>
교인 2025.11.08 18:38  
이 현상이, 애초 된 이름(겉치레)만 있고, 이로 온 지체의 마음과 시간과 동력된 소유가 상실되며, 마치, 속이 비어있는 듯, 어둠의 세력에 도둑을 크게 맞은 듯 한 형태이다.
그런데 여태껏 모습이, 애초의 기준 된 자리를 범치 아니하며 그 거침돌 같음 아니며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 모독을 당함이나 하나님을 욕되게 함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김 아니며, 여전 하나님영광위한 길의 인도이며 어둠에 처한 자의 빛이며 말씀 의지하여 하나님을 자랑함이며  애초응답으로 받은 하나님의 뜻과 동일하며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이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행한 양심의 증거며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한 것임이, 맞을 진대는 분명, 주님 안에 큰 기쁨 됨이다.
그런데,
애초와 여태껏 어둠 된 현상의 두 면을 대비할 적에, 서로의 본색이(본 바탕,성격) 같음인지 (그 다름인지), 즉, 애당초의 경영을 마다함이, (한편 또는 서로가) 성령으로 좇아 행한 자랑이 됨인지,  아니면  육체를 좇음으로 (그 경영이) 경홀히 됨인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예가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말씀했음인데, (그 적용으로 맞는다면)
비록 이 현상에 (서로)변론하려함이 있어도, 이곳이 단연코 주님을 위하여 지음 받은 주님의 권세아래 있는 (증)표가 될 진대는,
이 현상인 이유가, 총공회(하나님의 교회)에 어떠한 성경(말씀)의 지식과 진리에 따른 적용(규례)이며 그 모본인지(아닌지)를 면밀히 살핌이 매우 필요 됨이라 생각해봄이다.
주님께서 그곳에서 줄곧 행할 것을 보증으로 (총공회에) 주셨음이 맞을 진대는, 기어코 이 문제를 풀어야만 도리가 아니겠는지.., 그럴진대 그 결정적으로 풂에 있어서 그 감당할 중심이 (먼저, 양떼에 있기보다) 오늘에 목회자이시란 생각이며,  또한 이를 편당에 치우쳐 푸는 것은 애초에 어긋남이며 매우 제한적이라 여겨봄이다.
그곳에서, 주님의 뜻을 세우며 온 지체의 기쁨을 돕고자 (주님의 면전에서의) '스스로를 가르치심(롬2;21)'도 (때론) 필요 되지 않겠는지를 생각해봄이며, 그곳에서, 서로 발을 씻기심의 참예와 주님영광위한 믿음에 선 일로발전의 디딤돌을 놓으며, 주님으로부터 난 그 유전을 지키고자한, (해결)방안의 적극모색이 실로 합당함이라 여겨봄이다.
교인 2025.11.09 19:39  
<여전혼잣말형식이며, 점점(가로)폭이 좁아지고..너절한 글, 빨리 (내려)놓아야 도리임에도 그 진도가 느려 송구합니다.>

(그 다음으로),
주님의 면전에, “온 공회적인 ‘회개의 선포’ ”로 나아가야함이라 여겨봄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 말씀했으며, 각기의 지식을 (크신 주님의 면전에) 일단 다 내려놓으며, ‘함께’, 엎드림이 (주님의 몸 된) 마땅한 소명(疏明)됨이라 여겨봄이다.

(자신 믿음도 적고 부끄럽지만) 문제를 문제로 보면 문제인 것이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광대하신 주님만을 온전히 바라봄이면,  그 문제가 문제되겠음인지..,
진정한 회복은, 주님 면전에서 ‘회개’임이 실로 명확함이 배운 대로이며, 이 통로가 총공회(교회)가 거듭남의 길이며, 지체 간에 멍든 건강의 회복과 (서로 지체됨의) 관계형성의 유지에 있어 그 필요공감 됨이라 여겨봄이다.
죄를 범했을 때에 에덴동산에서도 가시와 엉겅퀴가 남이다.  그간 현상의 그 지속으로써  무엇을 내고 있었음인지..,
오늘날 온 교회에, ‘회개케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전혀 귀에 들리지 않음이면,
(주님 보실 적에) 우리가 하등의 잘못도 범하지 않음이 되며,
그게 아니라면,
오늘날 온 공회(교회)에 향하신 주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여전 외면하고 불신하여
(애초 된 주님 위함과 주님의 뜻과 멀어져) 멸시함이 되고 마는 것이라 생각해봄이며,
이는 결국,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모습됨이라 여겨보게 됨이다.

(맞음이면), 온 공회(교회가),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두 손 들어 역사해주시기를 진실로 바라며, 보다 멀리 보며, 긴 호흡 크게 같이하여 "기도의 '원' "을 크게 그리며, ‘전혀 기도의 자리를 확보’함이, (주님의 백성 되며 한 형제 된) 마땅한 도리임이라 여겨봄이다.
(또한, 그 맞음이면),
요나서에서 봄처럼, 이 현상이, ‘오늘에 온 지체의 잘못으로 실로 함께 시인하며 그 동의’로써 (기독신앙의 핵심 된) ‘그 철저한 회개’로 (함께) 뛰어 들면, 주님께서 이미 예비해놓으시고 살려주실 것을 믿게 됨이 배운 대로임이다.
서로, '이 문제를 네 탓'으로 돌리며(넘기며), 정작, ‘나와 우리의 회개’가 없음이면, (온)교회 발전은 물론 총공회의 (예비 된) 길의 의미를 잃게 되며 장래가 없음이라 여겨봄이다.
(그럴 적엔), 그곳에서의 예배의 감격과 이적의 씨앗(복음)을 여전히 심어가도록, (성경적) ‘그 회복의 전개‘에 대한 “ ‘온 공회적 그 승인’의 절대적 필요가 스스로(자체로)  요구”됨이다.

(주님께) 불쌍히 여김 받고자, 연약함을 고백하고 부르짖어 기도함으로써 '주의 영광'을 보게 됨임을 배움이다. 총공회(교회)를 살려 주실 것을 (온 지체가) 주님의 면전에서 함께 기도의 통로로 구하며, ‘오늘에 경고(신호)’의 말씀을 들음이 (그 무엇보다) 최우선이며 참 사는 길임이, 온 지체의 공감됨이라 여겨보고 싶음이다.

설령, 지금은 이 어두움에 길이 막혀 잘 보이지 않아도, ‘주님 면전에, 회개’로 실로 나아감이면, (모든 게) ‘쉽게, 속히, 회복’될 줄로 믿게 됨이 성경말씀의 이치로 여겨봄이다.
진정한 회개는, 돌이켜야할 이정표를 발견함에서 그침이 아니라, 자아를 내려놓고 변화하여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야만,
주님께서 (이미) '그 답'을 가르쳐 주신대로의  ‘답’이 보이지 않겠음인지.., 그 답이 아닌 길에 여전히 멈춤은 (성경의) 지혜가 아님을 배우게 됨이다.
언제나, 나와(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같기란 (그리)쉽지 않음이다. (성삼위)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기도로 아버지의 뜻을 물으셨는데, 심지어, 주님의 몸 된 지체이며 머리이신 우리 '주님의 본심'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물어보아야만 (주님의 백성된) 합당함이라 여겨봄이다.

이는 물론 오늘에 총공회적인 당면 과제들을 두고도, (그 총체적으로) 마음과 행동의 변화위한, (주님 앞에) ‘회개’의 필요가 없다함이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행함대로 보응하시는 임할 진노를 쌓음이 되고, (가까이로는) 총공회의 한 울타리에 거한 온 지체의 근심된 지속일 뿐이며, 이는 결국 큰 불행만이 자초됨이 아니겠는지를 (거듭) 생각해보게 됨이다.
관리 2025.11.10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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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지켜보며 2025.12.02 17:59  
반갑습니다 교인님. 계속해서 올려주시는 글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교인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전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내용들이 현실적인 상황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며,
같은 취지의 글이 반복되다 보니 많은 분들이 교인님의 글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으신 것 같습니다

교인님의 주장과 의견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모두가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게시판이 될 수 있도록
당분간 글 업로드를 멈추어 주시거나 빈도를 대폭 줄여주시길 간절히 요청합니다.
담당 02.10 08:04  
어제 26.2.9. 대구지방 법원의 '조정'실에서 서부교회가 중심이 된 부공2와 이 곳이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회합을 했습니다.  부공2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 모든 다른 공회는 전부 탈퇴를 했으니 대화 대상이 아니니 오로지 판사 판결 외에는 길이 없다고 단호하게 잘랐습니다. 이 곳은 당연히 '불교인에게도 전도하는 것이 우리인데, 한국의 5백개 교단 중에 우리가 제일 가까운데 대화를 못한다면 교회답지 않다. 부공2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다 들어 드리겠다. 2회나 대표들이 와서 부탁한 것은 교역자회를 하고 기도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하시라. 최대한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그런데 오로지 부공2만 총공회니 우리만의 것이라고 못을 박아 버리면, 이 곳 입장은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내적으로는 서로 내가 걷는 길이 옳다고 해도 함께 받은 재산이니 대화하고 서로 돕는 것이다. 우리는 딱히 필요가 없다. 그러니 부공2 소원을 최대한 들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이 글을 처음 적은 분은 이 곳에 양성원 때문에 시작하여 그 면으로 글을 적는 노력을 이제 그만하시고 서부교회에 찾아 가서 끈질기게 촉구하시면 됩니다. 부공2가 교회를 넘겨 주고 회의 장소를 대신 받기도 하고, 또 대구공회와 서울에서는 기도원 건축도 서로 합의하고 의논하더라..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반도 핵 문제는 남한의 좌파가 남한은 핵을 만들지 말자고 할 것이 아니라 평양으로 몰려 가서 핵을 없애라고 노력을 해야 이치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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