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교회의 백영희 배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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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1 20:15
시무투표가 1970년 제도로 시작된 배경을 들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서부교회 주축들이 백 목사님을 배척하기 위해 당을 짓다가 큰 일을 만났고 이후 목사님은 목회자를 반대할 수 있도록 시무투표 제도를 만들어 교회 내의 반대 의견을 제도권 안에서 해결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맞다면 시무투표는 불문법이 아니라 성문법의 타 교단 방식이 아닙니까?
서부교회 내에서 60년 전에 백영희 목사님을 배척하려고 시작된 운동을 소상하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연구소에서 목사님 생전부터 했던 말이라고 하는데 이제 세월이 충분하게 지났기 때문에 순수하게 역사적 이야기로 연구 대상이 될 법하다고 보입니다.
백 목사님과 서부교회의 역사에서 손꼽을 몇 가지 제일 내밀한 사건이었습니다. 워낙 민감한 자료이어서 세부 수치나 명확한 이름은 한 주간 정도 안에 보완할 예정이며, 모든 내용은 전체 흐름만 보시고 이의나 다른 자료가 있으면 보충과 반론을 통해 보다 나은 자료를 만들고 이 노선 모두에게 '최후의 순간' 또는 '예상 못한 이런 사건'까지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서부교회의 백영희 반대 운동)
* 시기
1959년 고신에서 제명 된 직후입니다. 1959년에서 1963년까지 기간입니다. 고신에서 1959년 제명이 되는데 서류 상 제명이 아니라 고신과 서부교회가 사실상 끝이난 이후 발생했고, 백도광 큰 아들이 사택 식구를 교회 밖으로 이주 시켜 따로 경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또 남천교회 최기주 집사님이 사람을 시켜 사택에 돈을 제공해서 어려운 때를 넘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이말출 권사님의 가정에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끝이 났고 1964년 4월에 백순희 큰 딸이 미국으로 가서 최재현 목사님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끝나고 갔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습니다.
* 이유
<자녀분들의 주장>
백 목사님이 서부교회에 부임한 1952년 이후 교회 내부의 상황 때문에 이말출 당시 집사님에게 교회 회계나 여러 업무를 맡겼습니다. 말하자면 목회자의 최측근입니다. 이 시기가 고신에 있을 때였고 1953년 전쟁 이후 피난 왔던 전국의 교인들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 가게 되면서 피난 시절 백영희 조사님의 서부교회 신앙을 마음에 새기고 평생 공회 교인들이 됩니다. 자연스럽게 돌아 간 곳곳에서 교회가 개척되는데 대표적인 곳으로 지방에서는 제천 남천교회였고 서울은 인물도 많고 교인의 수준이 높아서 서울 중앙교회, 서울 원일교회, 서울 내수동교회(이후 사직동교회), 서울 청량리교회, 서울 동문교회로 잇따라 개척이 됩니다. 이 때마다 이말출 집사님은 개인 돈까지 드려서 백 목사님이 원하면 불편 없이 제공을 했습니다.
1959년에 이르러 고신은 백영희와 서부교회를 제명했고 그 순간 자유로워 진 목사님은 고신이 늘 이말출과 관계가 수상했다는 등으로 온갖 이야기를 했는데 고신에서 제명 될 때까지 목사님은 온갖 비판에 전혀 개의치 않고 하던 일만 했습니다. 제명이 되어 이제 지켜 볼 사람도 없고 교회가 안정이 되자 목사님은 이말출에게 맡긴 여러 업무를 장정애 집사님에게 맡겼고 목사님은 목회자도 교인도 모든 인재를 늘 그렇게 기르시는데, 장정애 집사님을 가까이 두자 이말출은 겉으로 표시를 내지 않고 내적으로 다른 중심 교인들을 앞세워 목사님을 견제했습니다. 고신 시절처럼 목사님은 반대를 위해 트집을 잡고 나오면 그냥 두고 자기의 할 일만 합니다. 교회 내 반대 세력은 결집을 하며 목사님의 월급을 끊고 쫓아 내는 운동을 했습니다.
자녀들의 기억으로 김현찬 김효순 등은 6.25 때 피난 온 분들로 여걸이며 괄괄하여 목사님께 삿대질을 하며 나가라고 했다 합니다. 자녀들 중에 성격이 불 같은 큰 딸이 맞서 싸워 부친을 지켰다 합니다. 여성들이 나서는데 목회자이자 남자로서 대꾸조차 하기 어려우나 큰 딸이 나선다면 적절해 보입니다. 큰 딸은 공회 전부가 알 듯이 원래도 성격이 보통은 아니지만 부친 일에 만사가 얽히니 모두가 상상할 만큼 되었다 합니다. 밑에 동생들은 나이가 어렸고, 또 학교 때문에 현장에 없기도 했습니다. 고신 때처럼 목사님이 전혀 움직이지 않으니 나중에는 훗날 4명의 권사라고 일컫는 서부교회의 중심이며 교계 어디 내놓아도 유명했던 분들이 다 뭉쳤고 장렬 목사님은 당시 서울대 독문과 출신의 교사로서 그들에게 후임으로 거론이 되었다 합니다. 이복순 장정애 신현자(박윤철 사모님) 등 힘 없는 몇몇 분들만 목사님을 지지했다 합니다.
결국 교회에서 십일조를 끊었고, 목사님은 금식에 능한 분이어서 개의치 않았고, 큰 아들이 법대 교수였으니 식구들이 일단 먹을 수는 있게 했다 합니다. 결국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남천교회 최기주 집사님이 사람을 보내어 돈보따리를 들고 와서 어려울 때를 넘겼고 그래서 사택 자녀분들은 최기주 집사님을 그렇게 잊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사택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막내 아들은 상황을 모를 때였습니다. 소수의 지지 교인과 아주 막강한 반대파가 팽팽히 맞붙들 때 목사님이 일제 때나 전쟁 때나 고신의 박해처럼 외부 환란은 순간적으로 기회를 포착하고 상황을 돌려 놓지만 내부에서 일어 나는 일은 무조건 기도만 하고 무조건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래서 시간이 무척 흘렀다 합니다. 양측이 이렇게 팽팽할 때 가족들로서는 고향 거창에서부터 목사님을 알고 따랐던 가족이 부친 편에 설 줄 알았는데 그런 듯이 보이면서 양쪽을 오가며 분쟁에 불을 붙였고, 그 이후로도 교회에 일이 생길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이 되어 자녀분들은 부친 가실 때까지, 그 사후까지 그렇게 그들을 멀리합니다. 이 바람에 목사님 사후에 교회의 분리 과정과 남정교회가 나간 이후까지 서부교회는 부산공회와 대구공회의 지도자급에 계신 교인들도 왜 그렇게까지 일이 돌아 가는지 모를 상황이 많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공개하기가 어렵습니다. 연구소에서 아무리 교회를 위해 참을 것은 참아야 한다고 진언을 드려도 일찍 마음에 새긴 일이 다시 반복되자 가차 없이 너무 큰 조처들을 해버렸습니다.
<반대측의 이야기>
연구 부장은 1984년 미국에 공부하러 가서야 이런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전까지는 지금 부공2의 모든 지도자들이 4명의 권사님들에게 효도 경쟁을 하듯이 구역장님에 대해 절대 신임을 했으나 그런 태도를 본 자녀들은 연구 부장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전 유학 온 서영호 송용조 송종관 등과 달리 연구 부장은 미혼에 주교 반사에 부친의 부탁이 각별하여 공회와 서부교회의 훗날을 고려했다고 직접 설명하면서 세세히 제시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온 연구 부장은 구역장께 직접 이 건을 질문했고 이후 구역장은 목사님 자녀들과 떼놓지 않으면 사람을 버리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로 인해 이후 목회를 내보내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연구 부장은 평소처럼 또 자녀들에게도 늘 소신 있게 밝혀 온 것처럼 교회 내 당시 반대했던 분들을 조사했으나 이는 과거를 묻는 것이 아니라 백영희 전기와 설교록 연구와 이 노선 연구 때문에 불가피했습니다. 반대측에서 당시 일을 두고 아니라는 분은 단 한분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녀 분들의 주장은 표현이 강하기는 했지만 사실 관계는 여러 인물과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직접 뵙고 강단 외의 일반 생활 속에 심정을 접하는 몇몇 직원들은 어느 정도 느끼는 면을 통해 목사님께도 확인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부친에게 서부교회 권사님의 과거 사건을 거론하면 목사님은 듣기만 하지 아니라 한 적은 없고 '이제 그만하라'고 끝을 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일반 교인이 보면 특혜처럼 보이는 조처가 적지 않았는데 당시 사건으로 자녀들이 모두 서부교회를 떠나게 되고 미국으로 이민 가는 문제로 연결이 되어 있어 목사님은 1980년대 내내 노력해서 다시 한 사람씩 집회도 참석하게 만들고 신앙으로 돌아 오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 목사님의 심부름으로 7남매 자녀 가정과 전부 직접 개인적으로 맡아 수행한 일을 전담했기 때문에 연구 부장은 서부교회가 1960년대 초반에 백 목사님의 월급을 끊고 삿대질을 하며 후임을 구하려고 충돌한 이야기를 양측 이야기를 통해 확정하고 있습니다. 박윤철 목사님의 부인 신현자 사모님이 제일 마지막에 돌아 가신 당시 인물입니다. 평생 남을 흠 잡지 않는 분인데 이 건에 대해서 표정으로만 인정했고 간접으로 다른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장정애 집사님은 생존해 계시나 대화가 되지 않고 당시 당사자여서 사실은 객관성이 좀 적습니다만 지교회의 몇몇 원로들은 장 집사님 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런 문제로 목사님을 고신 시절부터 배척해온 김용학 장로님께도 직접 찾아 뵙고 다 확인한 이야기들입니다.
* 사건의 종결
이말출 권사님에게는 외아들이 있었고, 서울 연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분인데 갑자기 인생을 포기해야 할 정도의 건강 문제를 겪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 지자 목사님은 바로 서울에 있던 자녀들에게 해결을 맡겼고 그 해결에 상관 없이 이말출 권사님은 즉각 목사님께 맞선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돌아 서 버렸습니다. 그러자 서부교회 내의 분쟁은 즉각 해소 되었습니다. 그 비슷한 시기에 대구 동성로교회에서는 이인재 박윤선이 교인들과 중생 교리 때문에 소리 없이, 그러나 정면 충돌을 하다가 박윤선 가정에 급사하는 경우가 발생하자 박윤선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분이어서 일체 따지지 않고 무조건 물러 났습니다.
수많은 이야기와 관련 인물들이 관계 되어 있습니다. 일지나 다른 기록을 보면서 제목에 '수정 - 25.7. 00' 이렇게 보충을 할지 댓글로 이어 갈지 모르겠으나, 이 글에 억울하거나 반론하거나 보충하거나 이견 주실 분을 환영합니다. 연구 부장이 이 건을 심각하게 살폈던 이유는 이 노선처럼 이렇게 걸어 가려 하면 안팎 앞뒤 주변에 이런 일은 항상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례를 두고 앞날을 대처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런 자료 때문에 2013년 백영희 목사님의 7남매가 부친 설교는 그들만의 개인 재산이라고 민형사 수백 건을 고소 고발 소송하며 나올 때 50년 전의 사건을 그 자녀분들에게 배웠기 때문에 당시 반대파가 아니라 목사님의 대처 방법으로 걸어 왔고 오늘 이 곳을 운영하며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노선은 모두가 비판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고, 이 노선은 이 노선 내부인들이 좋아 하는 그 이상으로 좋다는 판단으로 이 곳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내 것이라고 덮어 놓고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측 이야기까지 세세히 다 들어 봐도, 또 훗날을 봐도 교회라면 이래야 하고, 이 노선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것이 이 곳의 입장입니다. 최근 시무투표로 인해 부공2에도 또 이 곳 부공3에도 한 목회자가 교회를 자기 것처럼 주장을 하고 한 쪽에서는 소송까지 하고 나선다면 교계의 종교 사업가로서 먹고 살기 위해 그러는 것일 뿐입니다. 이해할 문제입니다.
지금 부공2는 백 목사님 생전의 서부교회 내에서 김효순 구역이 서부교회뿐 아니라 전국 지교회까지 직접 영향을 끼칩니다. 김효순 구역 출신에 아가씨라도 하나 잡으면 대폭 후원이 쏟아져서 무명의 교인이 유력한 목회자로 떠오르고, 현재 부공2에 김효순 구역 출신이 아닌 이들은 그 주변에 얼씬거려야 혜택을 봅니다. 파당을 초월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던 목회자들이 행정위로 진입하거나 각종 처리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모두가 의아했지만 내막은 이렇습니다.
부공1은 백명희 백순희 두 분 계열이 협력과 분쟁을 통해 1990년대 2000년대 20여년 공회를 극단에 내몰았고 이때 김춘도 류정현 최현수 신상만 이런 경건주의 목회자들이 갑자기 각종 분쟁의 일선에 나와서 모두가 당황했듯이 부공2에서는 김효순 구역으로 찾아보면 만사 전개 상황이 정리가 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