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양성원과 관련, 질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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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양성원이 여태 이 현상인바, 이에 (직·간접으로) 관여되신 모든 분의 변증의 말씀을 (양떼의 위치에서) 듣고 깨우침을 받고자 질의 올립니다.
(앞으로 그 운용이 일부 공회만인지, 온 공회적인 지는 모르나) 이 질의는, 당시 출발이 ‘단일 총공회’였기에 오늘날 전 공회가 망라된 총공회를 두고 (질의)함입니다.
좁다란 이유로서,
시초,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신앙증진과 세상에 생명의 빛의 역할을 힘써 감당코자함이 분명 맞음이라 여겨봄과, 그 다른 면으로, 줄곧 양방각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주님의 지체들이 서로 불미하게 얽히고 갈라지며, 애초 된 생명의 빛과 순전한 목적이 송두리째 흐려지고 서로지체 된 균질(성)이 퇴색된 현상의,
두 면을 견줄 적에, 상호대립 됨이라 여겨봄입니다.
후자의 경우, 애초 된 총공회적 의지가 줄곧 꺾여 졌기에 실로 어둠 된 형상으로 보여짐 입니다. 본디 주님의 일에 여일진보와 성실이 전혀 세워지지 않는 모습이며, 애초 공통합의와 그 약속된 주님의 의가 지금껏 가까이 서지 않았기에 부정적 현상이라 보여짐 입니다.
오해와 이해가 다르기에, 오해는 분명코 이해로 풀어야함입니다.
애초 유쾌히 출발했던 그 아름다운 발 자욱이 지워진 배경엔(밑바탕엔), 성경적으로 명확한 근거와 이유가 필시 변증되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봄입니다. 이 面에 적극적인 설명을 듣고 확고히 이해하여 분별하며 개인과 교회신앙생활에 유익 삼을뿐더러, (주님의 양떼가) 이에 하등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적극 깨우쳐주심이 요긴 됨입니다.
우매한 질의로서,
_지금껏 해결이 안 보이는 그 이유를 (단적으로) 유추해볼 적에, 양방의 견해가 심히 상충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바, 그 따른 성경적 근거와 이유를 적극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_지금껏 해결이 없어 보이는 그 이유가, 양방각기의 성경적 지·정·의에 따라 품은 (각기의) 기준을 양보하게 되면,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어떠하게, 크나큰 책망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됨인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성경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_지금의 흩어진 공회들과 (일부) 교회의 모습을 애초와 견줄 적에 분명, 二元化되고 있는 현상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됨이라 생각하는바, 이러한 부정적 요소를 감수하여서라도, 줄곧 이러한 양방각기의 견지로서 파수할 수밖에 없음인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성경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_견해를 달리한 다른 쪽이 (지금껏 현상에) 그 잘못을 시인하고 돌아설 때까지, 양방각기의 (지정의에 따른) 기준을 줄곧 견지해야 함은 물론, (각기) 후손대대로 유언처럼 (줄곧) 파수해야만 하는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성경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_가령, 어느 차세대에서 서로 간의 양보(양해)로 인해 (이 난제를) 풀게 될 경우, 주님 앞에 분명코 죄를 짓게 됨인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성경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_애초대로 복원코자, 그 촉발 원인된 해당세대에서 (결자해지로) 마땅히 풀어주심이 맞음인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적극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오늘에 주님의 양들은, 오늘날에 세움 받으신 목회자를 통해 (영의 양식의) 꼴을 먹는 법입니다. 이 문제를 풂에 있어 그 열쇠가 오늘에 양떼의 목양위해 소명 받으신 목회자님이 정녕 아니시라면, 애초 된 주님의 의와 언약과 주님의 길을 찾고자, 어디에 물어야함인지를 적극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記: 단독 올림이 (홈)질서에 무례이면 송구하며, 15891의 자리로 옮겨주셔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서 너무 큰 문제들이 생기니다. 이 곳에 올려 지는 글도 제한 없이 발언할 수 있지만 너무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는 점이 오히려 이상했고 현재 나오는 몇몇 말씀은 사실 벌써 나왔어야 하는 불가피한 의견입니다. 사이트 전체적으로 너무 복잡하게 된다면 글을 읽도록 하기 위해 위치 조정을 하겠으나 아직은 아니라 생각하여 그냥 두겠습니다. 다른 댓글들이 이어 지면 이 글은 대화를 위해 적당한 시점에 '행정'실에 옮기고 삭제하겠습니다.
애타는 심정도 충분히 적었고 모두가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어떤 공회, 어떤 교회, 어떤 목회자의 입장이라도 한 가지씩 여기 나란히 짧게 비교를 해보면 요즘 교인은 배운 사람들이 많아서 금방 해답이 나올것 같습니다. 발제자께서 적으면 저도 바로 올리겠습니다.
1. 애초 받은 주님의 산업이 복음전파위한 명령과 예수의 증거를 높이는 기별로서 받은 게 (본의 아니게) 싫어버림처럼 되며, 그 보은으로 받은 분깃대로 값을 내려는 애초의 권위와 충실이 뽑혀지고 (애초에) 성령으로 하나 된 손맥이 풀어져 그 정로와 기능이 보전 되지 못하고 즐거운 모사와 열성이 속박 되어져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양방각기로 어떠하게, 성령의 충동하심에 따른 순종의 결말인 것인지, 다른 근거 있다면 성경적으로 명쾌히 이해하고 싶습니다.
2. 하나님 영광위해 즐겁게 쌓은 선(善)을 구별하여 주님의 것으로 드린 것을 (공히) 인정(認定)함이면, 여전히 앞길(앞날)도 주님 뜻대로 가르쳐주심에 온전히 반응함이 되는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여일히 역사하시며 그 열어주심을 인정한 셈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세움의) 기저가 예수의 증거를 높이는 엄정적 사역의 대의와 목적된 공통의 기별과 또한 하나님영광위한 발견과 땀으로 쌓은 (애초 공통된) 거룩히 헌신된 표출이 안 보이는 현상이기에 결과적으로, 애초 공히 ‘주님의 인정’하심을 온전히 믿는 현상과는 먼 거리인바, 애초 공히 어떠한 인정을 전제로 출발하였음인지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3. (자신 부끄러우며, 배운 대로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가치관에 매여 살도록 힘써야함입니다. 당초,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자랑코자 함께 언약된 산업과 그 경영이 멈춰짐은 본래 근실의 지속에 심대이 역 반향 됨이며, 즉, 애초에 총공회적으로 지녔던 절대적 가치관의 형성과 뚜렷이 갈림 됨이라 여겨봄입니다.
이는, (본의 아니게) 최고최선을 추구하(려)는 총공회의 (품)격과 그 지향 의지와 결심에 걸맞지 않을뿐더러, 애초 공히 품었던 하나님의 가치관과 정면 상충된 모습인 것입니다.
1)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여겨볼 적에, 애초에 소명으로 받았던 분외(分外)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는바, (맞음이면) 이 정체의 현상이 하나님 위주 중심된 대의와 명분으로 어떠하게 최대가치(적)인지,
2) 이 현상을 (수평적인) 인간관계적으로 볼 적에, 어떠하게 결코 사람편의의 편벽(치우침)된 게 아니며, 어떠하게 아름답게 체질화된 합리와 합당함이겠으며 선한 수단 된 최적 값어치가 되겠음인지,
3) 또한, 주님의 몸 된 지체들이 이로 (본의 아니게) 서로 멀어져 형제간의 포용성과 절제의 조정이 매우 흐트러졌는바, 이는 결국 주님의 성품에 참예함이라 긍정됨이 매우 어려운 현상인지, 아닌지에 따라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4. 애초의 총공회적 아름다운 일심모사가 굽어져 (마치 광야로 유리하듯) 행보와 규례가 온통 무산 되고 지금껏 그곳에서 아예 경영이 끊겨 황무한 듯 멍에꺾임 같으며 애초 (총공회적으로) 받은 주님의 풍성 된 구속에 단단히 매여 있지 않은 현상이,
어떠하게 총공회적으로 풍성 된 구속에 자긍됨이며, 즐거운 표적(表迹)이겠는지에 대해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5. 주님의 백성의 구원위한 터이고 세상을 복음으로 진동하여 주님의 백성 된 자를 장중에 모으고자 받들어 세웠으며 (그 소명으로) 위탁받았음이 맞음이면, 그 받은 은혜의 소산이 여태 무익한 노고로 허사의 경영인 셈인바,
이 현상이 공히, 어떠한 기쁨으로 하늘에 사무침 되어 주님 앞에 어떤 선함으로 기억하심 되겠음인지에 대해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6. 애초의 대의와 목적과 규례의 도모가 흑암에 맹렬히 던져진바 된 듯, 애초의 하나님영광위한 사명(소명)으로 둘린 띠가 풀어져 마치 하나님의 영광이 덮여 있는 듯 모습인바,
1) 애초대로의 회복(복원)이어야 옳음인지,
2) 그 반대로, ‘예수복음전파’위한 대의와 명분과 목적에 하등의 장애인 게(현상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하심에 흡수된 의로운 경험인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7. 주님의 사업을 이룩코자한 목적이 여전 외면당함이기에 결국 주님의 견책이 가득 쌓인 현상인지..더 나아가, 혹여, '주님과 다투는 격(?)'이 되고 마는 셈인지..양떼가 이로 주님면전에서 슬퍼해야함인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적극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8. (그곳이) 주님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고자 예비 된 터이며, 뭇사람의 구원 유익위해 세운 선한기업으로 세운 게 맞는다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표징 됨이라 생각하며, 그런데 이 흑암의 현상은 애초의 기업을 버린 셈이 맞음이면, 애초에 부합되지 못하여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벗기운 듯 형상이며 흑암에 대한 두려움의 결여(상실)로 밖에 달리 해석이 있겠음인지..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곳이 주님 소유이심을 선포한 온 교회의 입의 말을 여전 기억하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아껴보시며 여태껏 온전히 이룸을 기대하심이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히 보는 시각이 틀렸다면, 그곳에서 이룰 기업과 그 경영이 깡그리 무산됨에 따른 분명한 근거와 까닭이 양방의 심중에 있겠는바, 주님의 양떼가 이에 양방의 변증을 듣고 분별하며 이 면에 아무런 오해가 없도록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9. 애초 세운 양성원이 온 공회(지체)의 입에 확실히 둔 게 맞으면, 지금껏 애초의 기초가 헐어지고 총공회의 공통된 대의와 명제가 완전히 뽑혀진 현상인바. 이는 애초 (총공회가) 받은 주님의 풍성 된 구속에 단단히 매여 있지 않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지속이라 생각됨입니다.
주님께서 이를 (양성원) 조성하셨으며 그 선대하심으로 받은 게 (온 지체의) 보증됨이 맞는다면, 이러히 애초의 통일성을 잃은 현상이, 어떠하게 애초 된 보증에 자긍됨인지에 따른 변증을 듣고서 적극 이해하고 싶습니다.
10. 애초 양성원이 총공회의 중추적인 산업인 게 정녕 맞음이면, 내내 붙들어 확고한 소망의 손(맥)이 여전 풀어지지 않아야함인데도 결과적으로 여태 주님의 의의 소산이 없음입니다.
이 역기능적인 모습은 (본의 아니게) 결국, 애초 산업을 업신여김(하찮게 여김)이 되고 그 받은 증거를 즐겨하지 않음 같아 하나님의 영광이 분명 가려졌음인지, 결코 아닌지에 따른 이해를 해보고 싶습니다.
11. 양방 간 의향대립으로 주님께 의탁 받은 산업에 권위와 경영의 충실이 아예 끊겨짐으로 인해 (그곳에선) 주님의 의가 분명 사라졌음이라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로 양방의 근거가 (또는 주장이) 아무리 합리며 합당하다하여도 애초 (수직적인) 주님의 의와 언약을 기쁨으로 잡은 분깃에 우위우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는다면)
이는 주님의 견책이 가득 쌓인 현상이며 이로 주님의 면전에서 슬퍼해야함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에 따라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12. 주님의 때와 기한이 있으시지만 (오늘날 총 교회에 향하신 주님의 뜻을 찾고자) 힘써야할 (사람편의) 시점도 분명히 있음이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애초 그곳이, 주님의 은혜로 특별히 예비 된 게 정녕 맞음이면, (비유로) 주님의 눈과 마음과 귀가 여태 그곳에 쏠려 있으심이라 생각합니다. (맞는다면)
오늘날 주님께서 ‘총공회와 교회에 어떠한 신호’를 보내고 계심인지를 (주님의 양된 도리로서) 귀 기울여 들어야함이 촉급함이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을 회복케 하시고자 “..흩어진 이스라엘백성을 사방에서 모으시려..“하심처럼, 그곳 통해 영광 받으시려는 애초 계획을 여전 이루시고자 애타게 주님의 신호를 듣기를 원하시고 계심이라 (한편으로)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제로서,
주님께서 피조물 인생과의 화목을 이루려(주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이 난제의 해결도 먼저 화목을 전제로 풂이 합당함이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편의에 따른 위주중심의 방도는(방안은) 비록 유익(이익)은 될지 모르나 인위적인 편리며 편법일 뿐, 실로 경건의 방도라 여겨지지가 않음입니다.
주님의 의가 총공회에 가까이 서고 복음이 풍성히 담겨지며 다시금 하나님의 의를 다시 쌓는 하나님영광위한 포도원지기역할을 순수하게 성실로 갚기 위한 그릇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한 전제로(우위우선으로서),
필히, 화목의 의를 공동으로 세워야함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는 게 거룩이기에 이 현상의 회복이 지체될수록 큰 손해가 되는 셈이며, 따라서 변화와 개혁위한 절차를 공히, 급히 밟아야함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방의 ‘기준’이 각기, 주님 면전에서 옳다하여도 긴 세월 여전 이 현상은 '주님께서 주시려는 답'을 여태 찾기 못한 증거라 생각함입니다. 그리고, 이 현상이 외부적으로 온 게 아니며 서로 지체 간에 비롯된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온 것이면 세상과 대적해야하나 지체들 간에 초래된 것은 마땅히 내부적으로 풀어야함이라 생각합니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성경에)말씀했습니다. 긴 세월 서로 문을 높이고 있는 사이, 그 행사의 즐거운 모사가 요동 되어 지체 간 교통이 막히고 애초의 풍부하였던 열성이 일관 되게 흐트러지고 화평 된 빛의 보배가 아예 상실 된 형국이며, 애초 화목의 그릇이 부서진 이 결말은 애초 총공회가 (주님위해) 그곳에 세운 도리를 즐겨하지 않음같이 비쳐짐이라 생각합니다.
환란에 잡혀 시초에 공히 누렸던 평안의 만족과 선한사업위한 선(善)을 도와줄 관용과 용서와 보배롭고 존귀한 화평의 은총이 (땅에) 묻혀져 (서로지체 간) 여전 가뭄에 목마름 같은 현상입니다. 그 정답 얻기 위해 온 교회의 회개와 기도가 요긴 되며 이 간구는 어련히 (주님을) 믿는 자의 당연한 몫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맥락으로서, 이 해결위해 (온 지체가) 먼저 ‘주님의 신’을 의지함의 결단이 매우 절실함이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체는 애초 공히 경영케 하신 하나님을 존경하지 아니하였음이란 결말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온 교회가) 민첩히 애초의 흡족을 필히 회복해야할 계제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배운 대로) 진정한 회복은 내 의로는 일어날 수가 없으며, ‘주의 이름’만 주셨고 오직 주님만이 답이심입니다. 해묵은 異見의 첨예함을 깔끔히 벗고 ‘주의 길’에 혼미한 역사와 무너진 기초를 세우며, 새싹(새살)이 새로 돋아나듯, 성령의 능력으로 회복(복원)코자 함이 공히 공감이 맞을 적엔,
온 공회(교회) 일제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함이,
1) 이 해결에 근본이며 그 초점됨인지 (또는 아닌 것인지),
2) 주안에서 한 몸 이룬 존재이며 서로 귀중한 지체에 안도와 평안과 승리됨인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적극분별해보고 싶습니다.
13. 하나님을 여호와인줄을 전파코자 모두에 쌓인 선과 거룩한 헌신이 어우러져 주님의 것으로 즐거움으로 구별하여드렸음이 정녕 맞음이면, 애초 된 총공회의 주님위한 손맥이 풀려지지 않음이 마땅함인데도 여태껏 경영의 정체(停滯)가 건설에 반하여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흐름이 아니며 나아가 하나님 경외함 아닌 현상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애초에 견주어 도시 긍정된 현상이라 여겨볼 수 없는 이유가, 애초에 수축된 정로(正路)가 不定되고 역방향인 셈이며, 애초의 집중과 초점이 흐트러져 공히 보응에 주목하지 못하여 크게 요동되고 공히 영감으로 품었던 선한 知覺의 활력이 소멸되어짐과 결국, 하나님의 의를 획기적으로 성취키 위한 애초 언약과 규례를 결국 파(罷)한 것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와 다툼된 현상은 애초 품은 총공회의 합일소망을 저해할 뿐이며, 그 이룸에 효력과 효과의 조건과 충족에 부합되지 않음입니다.
1) 하나님을 여호와인줄을 전파코자 모두에 쌓인 애초 거룩 된 헌신과 정도를 떠남이 주님의 선대하신 은혜에 감사와 위탁하신 경영에의 복종이 아님을 의미함인지, 또는 아닌지에 따라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2) 애초의 엄정적인 생산사역의 대의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함이 맞는다면 이를 결코 간과(소홀히)할 수 없음인바, 여태껏 허사의 경영인 게 어떠하게 하나님께 영광됨인지, 전혀 잘못 봄인지에 따라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14. 주님의 이름 드러내고자한 사업과 경영을 여태껏 방관함은 애초의 모본된 질서마저 화석화되고 그 방치하는 만큼 본래의 감사가 더 비움 됨이며, 그 감사가 점차 사그라질 적엔 원망의 마음으로 딱딱해지고 자칫 병들게 마련인 셈입니다.
모든 말의 (기도의) 응답으로 세운 게 맞음이면 분명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음이며 총공회가 받은 복인 것이며, 따라서 그 동기와 목적이 존중되어져야함이 맞음인지, 아니면 그릇됨인지에 따른 이해를 해보고 싶습니다.
15. 양방 나름의 평가가 (주장이) 설령 최고최선의 표출이라 하여도, 당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한 애초의 대의와 목적이 민첩히 경시되고 있는바, 여전 이 현상으로의 지속이어야만 하는지, 아니면 무산된 통합(성)의 복원이 민첩히 요청됨인지의 두 면이 (서로) 양립됨입니다.
나아가, 성경에 나타난 분쟁과 동질(동격)이면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비록 양방각기의 평가가(처방이) 무거운 심정의 주님위한 최선이라 하여도, 주님허락 없이하는 표출일 경우, 주님 판단(칭찬)하심에 반하며 급기야 온 교회공동체의 영적정체성에 부정적인 害가 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1) 위 두 면 중, 어느 면이 우위우선이어야 함인지,
2) 이 대립이 성경에 나타난 분쟁과 동일(동질인) 것인지, 아닌 것인지에 따라 분별해보고 싶습니다.
16. 공히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복된 장마 비로 가지를 내고 열매 맺음같이 기어이 주님의 것임대로 행하고 지켜지며, 주의 이름 경외함으로 하나님 말씀이 (그곳에) 하수같이 흐르며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흐름이어야 합당함인지, 아니면 여전 이러한 정체(停滯)의 지속이 합당함인지를 확실히 분별해보고 싶습니다.
이 일을 이루게 스스로 보증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심이 모두의 확증이면 애초 총공회가 그곳에서 주님의 의를 알리심을 혼돈 속에서 찾음이 아니라 여겨봄입니다.
그런데, 여태껏 혼돈으로 애초 세운 게 흑암에 엎드러지고 여태 (그곳의) 길이 (애초 비할 적에) 분명 굽었는지 아닌지..정로가 굽어진 여태현상이 맞는다면, 애초 공히 인정된 규범을 분명 비켜난(벗어난) 것이라 봄입니다.
그럴진대, 시초로 돌아와 시초에 속하여 시초를 따라야함인지..이(굽은) 길에 사로잡히면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고 마는 셈입니다. ‘험한 곳을 평탄케(곧게)’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애초대로 곧게, 주님의 일을 일으켜 재차 건축코자하심인지, 즉, 주님께서 ‘나의 일을 양들이 함께 손으로 만들고 낳기를 총공회에 부탁’하시고자 재차 물으심인지 (아니면, 후손대대의 지속인 것인지).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어두운데서 말씀하지 않으시며 혼돈 중에서 찾으라 말씀하지 않으심이 하나님의 속성이시라 거듭 생각해보게 됩니다. 구원을 베푸시려는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함께 모여와서 진술하고 토론하자 변론하자고 기다리심인지의 이유를 여태현상에서 찾아야함이라 여겨봄입니다.
총공회에 역사를 베푸시어 그 세움을 모든 기도가운데서 듣게 하신 주님 외에 다른 이가 누구이겠는지. 그 역사와 구원을 베푸시는 유일하신 분이 지금도 재촉하고 계시지 않겠음인지. ‘함께 모여오라 한가지로 가까이 나아오라 능히 구원하는 나와 토론하자 변론하자 말하자..이 일을 보인자에게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보라..‘ 하신 성경말씀이 오늘날 현상에도 (이치적으로) 부합되지 않겠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총공회가 이 일을 힘써 이루도록 (스스로)보증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며 이를 번복하거나 식언치 아니하심이 맞음일 진대는,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실 '신실하신 주님을 인정'함이 우선 도리이며 또한 묵은 숙제가 절로 풀려지지 않겠음인지.
애초 총공회가 주님의 의를 긴히 입에 담았던 게 맞음이면, 여태껏 현상은 (당시 총공회적으로) 모든 입에 담았던 의로운 말이 (어둠으로) 나간 셈이 되는 게 맞음인지 (아닌지),
맞는다면, 본디 주님면전으로 돌아오고자 주님의 모든 양떼가 (주님의 면전에) 무릎 꿇음이 애초 주님께서 베푸심에 합당한 도리가 아니겠음인지,
그곳에 세운 목적이 (한마디로) 복음진리전파일진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총공회적으로 인정함과 또한 당시 하나님영광위해 기회주신 그 인정함이 현실에 따라 바뀌면 영적으로 혼돈되고 성경적으로 정도가 아닌 것이라 여겨봄입니다.
(배운대로) 사단마귀는 어둠의 세력이나 주님은 빛이시며 어두움으로 오신 분이 아니심입니다. 이 현상이 어떠하게, 애초에 받은 복음진리전파의 권위를 우직히 최선 다해 요동치 않고 구원 이루고자함인지, 주님의 일에 소속감이 분명히 보증된 현상인지 (아닌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귀신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을 주시며 살리고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나, 주님을 노하게 함은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음입니다.
애초 그곳을 펴신 주님께서 총공회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자하심을 받들어, ‘목회자양성원’이란 띠를 공히 동여 즐겨 출발하였음입니다. (맞는다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그곳 통해 구원을 내시고 하나님의 의가 함께 움돋게 하도록 소명을 받았던 것이라 여겨봄입니다.
그런데, 그 명하신 주님위해 그간 총공회적인 (일)손으로 무엇을 만들었으며 낳았다고 할 수 있겠음인지, (은유로) 즉, 주님께서 오늘날 총공회를 가리켜 그 (이루고자한) 의의 손(맥)이 정녕 있었는지를 직접 물으신다면 어떠하게 말할 수 있겠으며, 나아가 시초에 은혜를 풍성히 내신 주님과 더불어 다투는 격이 결코 아님이란 소명(해명)을 공히, 자신 있게 변증됨이 있어야 (소극적 면으로) 주님의 양떼가 장차 책망 받음에도 자유 됨이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짓고 세우게 하신 분이 누구시겠는지, 주님의 구원을 여일 앙망하며 행하게 하신 유일한 분이 누구이겠는지에 대한 혼동을 숫제 불식시켜주심으로 주님의 양무리가 안도해야함이라 여겨보게 되는 것입니다.
(빛 되신) 주님께서 당시 흑암한 곳에 (목회자양성원을) 은밀히 세우게 하지 아니하셨음이라 여겨봄입니다. 그런데 여태 이러히, 흑암의 세력에 굴복되어진 듯 현상은 애초 주님의 의를 헛되이 찾으라고 받은 게 아니기에 서로 어긋남이며, 주님을 마치 어둠의 사슬에 거하시게 하는 듯 현상의 모습이 (실로 맞음이면) 결단코 안 됨이라 생각함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전혀 틀렸을 경우) 이러히 매여 있음이 (흑암에 싸인 모습이) 세상의 욕을 받거나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게 아님을, 주님의 양떼에게 명확히 변증해 주시어 (양떼가 이에 아무 혼동이 없도록)함이 긴요 됨이라 여겨봄입니다.
그간 정녕코, [백영희목사설교록]에선 이에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었)음인지.. 애초 총공회적으로 세운 게 주님의 뜻이심이 공히 확고할 진대는,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하신 말씀하심대로 ‘하나님의 의를 다시금 일으키고자’ (본디) 이 역사를 여시고 이 세움 알게 하신 주님면전에 온 양떼가 밀접히 다가서는 도리(방법)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음인지를 거듭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마, 여타 많은 교단에선 이만한 규모의 좋은 시설이 없기에 부럽지 않겠음인지.. 가령, 아무리 큰 물적인 자산을 지녔어도, 깊은 상처로 곤고하며 믿음의 손해로 가난하며 애초 본질과 빛 된 미래가 잘 안 보여 눈이 멀며 세상의 조소로 인해 벌거벗은 듯 현상이 내내 초래됨일 진대는, 긍정적 자평이 무산된 불행인 것이며 (그럴진대, 더 나아가 안팎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물론 목회자에 대한 신뢰만 가리게 될 뿐이라 생각해봄입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고자, 빈번히 왕래하며 거주하게 세워(지어)짐이 맞는다면, 주님 면전에서와 서로의 모든 입에 보증된 것이라 여겨짐입니다. 근데 (비유로) 이를 ‘땅에 고스란히 묻어 놓는 격’이, 애초(총공회)의 뭇 심령에 매인 게 아닌 것이며 永世에 칭찬 받을 일도 몫도 아님이란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그곳이 하나님의 뜻에 피동 되어 지어진 게 정녕 맞음이면, 총공회에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주신 기업인 게 분명하며, 그러기에 이를 마냥 가벼이 여길수록 더 천하여지고, 믿음의 진보가 없이 (성경인용으로) ‘이 말 혹은 저 말로서 분란(요란)’으로 내내 유발의 경우, 그곳에서 정녕 이룰 복음진리의 권위가 경홀히 여김 되고 결국 (주님의) 책망만이 초래될 뿐이라 하는 근심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진리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공(共)히 동행 했던 게 맞음이면,
이러히 대립(상충)으로의 강제가,
어떠한 다른 변명으로 애초 주님과의 약속에 따른 부합됨이겠으며,
과연 온 지체 간에 어떤 송사가 애초의 부합에 성립 되며 밝히 증거로 내세움 되겠음인지.
즉, 그간 주님의 증인되고자 각기로 주님의 면전에서 모든 일들을 (각기) 열심 내어 행함이(었)어도, 여태모습의 결말이 (성경말씀처럼) 마치 ‘가시채로 뒷발질 하듯’하여 애초 총공회가 주님위한 역사를 자긍으로 심어 공(公)히 일군 대의와 규범이 (본의 아니게) 고생스럽게 되고 괴롭게 된 것 같음의 현상이 정녕 맞음인지 (결코 아닌 것인지)를 이해해보고 싶음이며,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여일 행하여할 일을 분명기억하시고 이루기를 바라시는 주님위한 애초의 일에 공(公)히, 함께, 증언(證言)했음이 맞음이면, (이 현상이) 애초와 매우 괴리됨이라 생각해봄입니다.
(자신 부끄러우며), 이 난제의 결말로서, 주님의 몸 된 온 지체가
이에 어떠하게, 주님의 칭찬이나 또는 부정적으로 징계나 책망을 받게 됨인지를 면밀히 이해하고 분별해보고 싶음입니다.
(어느 내용을 보며), 계3:20은, 믿는 성도들의 열심을 강조함인데 그 문을(고리를) 우리가(믿는 자가)잡고 있음이라 듣게 됨입니다. 또한 (창세기에서 보듯) 다른 쪽에 그 원인과 책임을 서로 전가함으로서는 문제해결이 어려울 뿐이며, 영생구원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개입한 사건이지만, 이 현상은 온 지체의 하기 나름에 달려있음이며,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기다리고 계심이라 듣게 됨입니다.
그 (해결위해) 문을 열고 안 열고는 우리(온 지체)의 마음에 달려있음이며,
애초 주님위한 총공회의 대의와 목적이 줄곧 표리부동해야함이 정녕 맞음이면, (애초의 명분상으로 볼 적에) 문밖에 주님을 줄곧 기다리게 할 실 명분과 구실로서 과연 무엇이겠는지를 이해해보고 싶음입니다.
장차심판의 날에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독대할 때가 반드시 있을 그 때에,
(총공회의) 주님의 양떼가 그 큰 이룸 인하여 칭찬을 받아야함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이름의 권세와 복음진리의 권위 받들어 주님위한 (새) 일을 모든 기도로 잡고
총공회적으로 출발했던 게 진정 맞음이면, (주님께서) 여전히 그 일에 소원을 두시고 여일 기다리고 계심이 아니겠는지..
그런데, (본의 아니게) 주님의 몸 된 교회가(지체들이) 어둠에 휘말려 (이로) 행여나,
곤고함 같음이어선, 가련함 같음이어선, (물적 부요는 대단함이나) 허사의 경영으로 그 소출이 없어 가난함 같음이어선, 애초 주님께 받은 (오늘과 장래 일을 내다봄인) 안약을 잃은 나머지 눈 멈 같음이어선, 세상의 비소(조소)로 벌거벗음과 같음이, 결단코 주님의 몸 된 지체에 초래되어져선 안 됨이라 여겨봄입니다.
그 한 면의 연관으로, 애초와 그 이후의 현상을 견주어 볼 적에,
그 (애초) 이후의 모습이,
어떠하게,
애초와 동일선상(線上)에 놓였음이며 하나로 응축되어진 이중기능 됨이라 여겨보아야함인지
애초와 골격(틀, 밑받침)이 여전 동일하여 완고(완전하고 튼튼히)함이라 여겨보아야함인지
애초와 여일한 힘씀과 합치화가 동일하여 여일 온전함의 갈망이라 여겨보아야함인지
애초와 달리, 대의와 목적이 비켜남인 그 이유나 근거가 있다면, 성경에 어느 부문의 적용으로 그 따른 통치에 피동이겠음이라 여겨보아야함인지
애초와 영적인 면으로 그 성질(특성)이 동일함이면 그 근거(이유)와, 최고최선으로, 교리·신조·행정을 추구하는 총공회의 속성에 걸맞음이라 여겨보아야함인지를,
주님의 양들도 적극 이해하고 분별함이 신앙생활에 매우 긴요 됨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달란트는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상징하며 종들은 이를 통해 충성심을 보여야함이다. 1달란트 받은 종의 게으름은 주인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인한 실패를 보여줌이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큰 책망을 받은 이유가 그 달란트를 쓰지 않고 땅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그것은 큰 죄인 것이며 그 있던 것도 빼앗기고 말았다..<인용>“
(이치적으로) 당시 총공회가 그곳을 달란트(격)으로 받은 게 맞는다면,
애초 총공회가 주님께 그것을 어떠한 연유(이유)로 받음이겠으며, 그 실행결과가 어떠함인지, 또한 그 달란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그 과정이 (방편이) 애초처럼 총공회적 집중운영이 온 지체의 인정함이어야함인지 (전혀 아님인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시기 때문에 세워졌고 그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달란트(격)의 역할을 감당하시고자 약속으로 받았던 게 맞음이면, (주님께) 은사로 받은 것을 충성과 봉사의 실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소명이 분명 있으심이며, 그 한 이유가, 그게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다만 받은 청지기일 뿐이라는 생각을 (양의 위치에서)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예수안에서 복음으로 낳았음을 입은 것을 다시 복음으로 낳고자, 하나님의 동역자의 양성(원)으로 약속된 곳임을 주님의 양들도 말씀의 거울로 여겨봄이 아니겠는지..
자라나는 후세대들이, 세상에 빛의 역할과 주님의 양떼를 향한 목양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주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찾아내고자 설렘으로 꿈꾸며 도전을 받게 됨이라 생각해봄입니다.
당초 그곳을, 하나님 영광위해 충성과 봉사로 활용코자 달란트(격으)로 받은 게 온 교회의 확증(確證)임이 맞음이면,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이를 좁게 볼 적에) 애초 총공회 본연의 대의와 중도의 변개가 실행 면으로 서로 상충 되는바,
이 변개가 여전, 오늘날에 하나님의 섭리를 좇은 발전요소가 됨과 아울러 온 지체에 진정한 행복의 누림이 되는 경우, (온 지체가 이에) 하등의 오해가 없도록 일깨워주심이 긴요 됨이라 여겨봄입니다.
(이 끝이 아니라) 여전 그 일을 펼치심대로 행하실 것임을 '애초 총공회의 기도로 인정되고 약속'인 것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애초 그 일을 '지금도 그곳에서 정확히 뜻대로 행하시려는 주님의 주권'을 명확히 인정함과 이로 부르시며 인도와 역사하심을 받아들이는 게 온당함이라 여겨봄이 맞는 것인지,
'오늘날 변화와 회복의 시작'을 원하시며 은혜의 자리로 가까이 나아오라 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역사(役事)의 신호'가 분명 있으심이라 여겨봄이 맞는 것인지,
그곳이, 주님께서 총공회에 역사하심의 자리일 진대는 (결코, 흑암에 매인자리가 아닌) 주님께 받은 복과 은혜의 큰 자리로 허락된 곳이며,
복음진리의 전파와 주님의 양떼를 가르칠 '(주님의) 일꾼을 양성코자 중추적으로 세운 곳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이라 생각됨이 합당함인지,
(광야로 향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이끌리심을 받았듯) 주님께서 오늘날 총공회에 ‘나의 일’을 행하려하심을 주님의 말씀 앞에 모여서 듣도록 (지금도) 여전히 재촉하심이라 여겨봄이 맞는 것인지,
오직, 복음진리로의 응축으로 긴 혼돈에서 급속히 벗어나고, 응답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움 받으신 그 은혜의 자리가 역동적으로 회복(복원)'되는 게 합당함인지,
(비유로서) 제련의 과정으로 인한 아픔 속에서도, '그곳이 (부분 선택만의 통로가 아닌) 모든 통로'로써 다양한 의사(의향)를 기필코 좁히고자 애쓰시는 모습을 주님의 양들이 보고 싶음이 (무례하여) 만부당함인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과 생명과 능력으로 나타나실 하나님을 만나야만 (한 울에 거한) 모든 지체도 참 기쁨 됨이며,
만민구원위해 값없이 은혜로 받은 ‘복음진리’를 줄곧 받드시려, ‘全 공회가 애초의 통로로 함께 하나님의 공의와 진실에 따른 정직된 길 회복'위해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이끌림 받는 모습을 주님의 양떼가 여일히 보게 될 적에 (비로소) 안도함이라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청지기의 사명을 맡기시어, 그 일을 행하시고자 오늘도 주님께서 그 문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면,
(그 문을) 열고 안 열고는 순전히, ‘하나님의 종의 의지'에 달려있으심이라는 생각을 깊이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관련내용:15891 (25.6.14)
(모든 내용에서) 그릇된 게 있다면 가르쳐주심 바라며, 너절한 내용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