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방법론, 알레고리와 공회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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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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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4 16:23
설교의 방법론, 알레고리와 공회 입장
(연구부 여러 의견을 모아 등재한다. 공회 설교에 대해 50년대부터 지적 받는 교계의 오해에 대한 공회의 첫 입장이므로 일단 '초안'으로 발표한다. 부족과 잘못을 지적해 주면 최선을 다해 반영하는 것이 공회의 연구 자세이다.)
공회의 성경 해석과 알레고리라는 비판에 대하여, 삼상17:45 '다윗의 매끄러운 돌'을 중심으로 살펴 본다. 사무엘상 17장에서 엘라 골짜기의 다윗이 매끄러운 돌을 날려 골리앗을 죽인 성구를 두고, 개혁주의 신학이 역사적으로 경계해 온 알레고리 해석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하여 공회의 입장을 1차 정리해 본다.
1. ‘알레고리’ 성경해석에 대한 일반적 비판
성경을 비유(알레고리)로 보고 성경을 떠나 개인이 마음대로 풀어가면 아전인수가 되어 이단이 되거나 성경을 왜곡하게 되면서 성경과 멀어지고 달라진다는 성경 해석학의 일부 입장이 있다. 이런 신학의 입장은 주로 개혁주의 신학을 근거한다고 말한다. 이 주장을 가지고 공회의 성경 해석도 같은 식으로 비판을 하는 경우가 1950년대부터 있었다. 공회의 성경 해석에 반론할 수 없게 되면 공회 성경 해석은 알레고리여서 틀렸다고 해 버렸다.
2. 공회의 성경 해석에 대한 입장
공회는 역사적 신학적 논란을 떠나 성경을 외우다시피 읽으며 성경으로 성경을 살펴 보며 발전해 왔다. 말씀으로 자기를 먼저 살펴보고 배우고 고치다보면 말씀 안에서 저절로 해결된다는 입장이다. 성경을 역사로만 상대하면 세대주의, 성경을 역사 없이 사용하면 우화나 이론서가 된다. 성경은 과거 역사이면서 오늘의 내가 살아가는 모든 현실에 해당 된 진리 말씀이라는 것이 공회의 성경 해석법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계속 살피고 해석하다보면 틀리게 나갈 수 없게 저절로 해결된다. 성경을 해석할 때 왜곡도 문제이지만, 성경이 더 나아갈 때 중간에 멈추는 것도 문제이다. 그래서, 공회는 성경을 해석하며 성경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것은 신학이든 알레고리든 모두 같은 문제라고 본다.
3. 삼상17:40의 ‘다윗의 매끄러운 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계약 신학 – 믿고 순종할 때 어떤 원수도 이기 듯 오늘도 믿고 순종하면 승리한다.
세대 신학 – 구약은 돌을 던져 구원 받게 했고 오늘 신약은 다른 방법으로 구원함.
공회 입장 – 다윗의 돌은 구약 역사. 이 기록으로 우리는 우리 현실에서 순종할 것.
■ 성경의 반석과 돌
▪ 성경으로 우선 살펴 본다.
고전10:4, 광야 40년의 반석은 그리스도였고
시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셨으며
마16:18,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다.
시118:22 행4:11, 예수님이 교회의 머릿돌인데
마21:42,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7:24,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 같다고 했다.
성경의 돌이나 반석이나 돌로 만든 성전의 건축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을 반석 위에 집이라고 했을 때 이 성구를 읽기만 하고 어떤 해석도 금지해야 할 것인가?
∎ 반석과 돌의 구체적 말씀들이 있다.
엡2:20-22,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이 반석, 모퉁이 돌이면, 우리는 그 위에 지어져 가는 돌이다. 돌과 반석이 그냥 읽고 끝나지 않고 그 연결이 있다.
롬8:29, 하나님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예수님이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 예수님이 반석 우리는 돌이다. 돌과 반석이 건물 건축에 그치지 않고 신앙의 건설로 이어 지고 있다.
∎ 구약의 골리앗을 죽인 돌을 살펴 본다.
구약의 골리앗은 신약의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 건설과 신앙 걸음과 복음 운동을 가로 막는 원수다. 오늘 내 현실에서 나를 죄 짓게 하는 원수를 이기고 죽일 오늘의 ‘돌’은 무엇일까?
구원의 주님, 주님의 구원하신 은혜가 오늘 현실에 신앙 전투와 신앙 건설에 반석이다. 이 변치 않는 이 반석을 머릿돌 삼고 이 위에 나의 믿음 나의 순종을 하나씩 쌓을 것이다. 머릿돌 위에 우리가 산 돌이 되어 자기의 매일의 순종을 이어가고 쌓아 가는 것이다. 이런 생활을 못하게 막는 안팎의 시험에도 순종을 계속하는 것이 원수와 돌의 충돌이다. 이 땅 위에 죄악이 신앙을 막을 때 세상이 무조건 이길 듯 하나 이미 주님이 모든 원수를 꺾었다. 그래서 성경으로 자기를 고치고 기르는 사람, 그 순종 그 인내가 다윗이 가진 유일의 무기와 같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그 날의 무기는 돌 하나였다. 자기에게 주신 신앙의 인격 곧 믿음이다. 훗날 다윗은 평생 검과 투구와 방패와 갑옷을 갖춘 전쟁의 대왕으로 살아가지만, 엡6:13, 다윗의 갑옷 방패 투구 검의 실체는 골리앗을 이긴 그날의 돌과 같은 하나님 믿음 구원 말씀이었음을 가르친다. 신25:4, 소 입에 망을 금지한 것은 고전9:9에서 소가 아니라 우리를 염려했다 하심과 같다.
3. 다윗의 돌에 대한 공회 입장
방금 성경으로 돌에 대한 면을 잠깐 살펴 봤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알레고리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까? 그렇다면 그 비판에 문제가 있을 듯하다. 신24:4에서 구약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했다. 딤전5:18에서도 이 말씀을 인용했다. 그런데 고전9:9에서 구약의 이 말씀은 농경 문화의 소를 부릴 때 주의 사항으로 적었으나 소를 염려함이 아니라 복음의 일꾼을 위해 기록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마13:34,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 했으니, 알레고리라는 표현으로 성경의 표현에 다른 해석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천주교의 통제와 같다. 신학의 알레고리 비판은 벧후3:16, 인간이 성경을 떠나 억지로 푸는 것을 조심하자고 하는 것이라야 한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해 놓았는데 이를 무조건 금지함은 알레고리를 사용하는 이단과 마찬가지로 극히 위험하다.
■ 매끄러운 돌
▪ 성경의 돌 다듬기
성경의 반석과 돌은 주님과 주님을 닮고 주님을 따라서 자라갈 우리를 가르쳤고 한다면, 돌을 다듬는 과정은 구약의 성전과 신약의 여러 말씀으로 너무 명확하다. 왕상5:18, 성전의 모든 돌을 다듬어 사용했는데 고전3:17, 우리가 성전의 돌이면? 중생 후의 우리 인격 우리 생활 우리 마음을 안 믿을 때처럼 그냥 둬도 성전일까?
▪ 인격 다듬기
약1:4, 우리의 믿음조차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시련을 시킨다.
벧전4:12, 믿는 우리조차 우리를 시련하려고 불 시험을 주시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벧전1:7, 여러 시험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련할 때 비로소 금보다 귀한 믿음이 된다.
히12:8, 징계까지 동원해서 우리를 만든다. 그렇지 않다면 참 아들이 아닌 가라지다.
구약의 노아, 아브라함, 요셉, 다윗의 모든 인물사 기록은 한 사람을 다듬어 가는 진리이며, 신약의 비유와 간단한 결론은 모두 우리의 신앙 인격을 세밀하게 다듬어 주는 말씀이다.
엡4:22,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버리라, 신앙 인격을 다듬는 말씀
갈5:24,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신앙 인격을 다듬는 말씀
성경 전체는 불신자가 아니라 믿는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을 다듬어 가라고 주신 것이다.
■ 시냇가의 매끄러운 돌
▪ 삼상17:40의 다윗
골리앗과 맞닥뜨린 현실은 하나님이 조성해 주셨고 그 곳은 시냇가였다. 다윗은 자기 양을 위해 늘 막대기와 물매는 가지고 다녔다. 돌은 주변에서 구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가감할 수 없게 기록했다. 왜 시냇가의 매끄러운 돌을 적었을까? 성경을 떠나서 확인 못할 성경 고고학으로 가져가려는 것은 알레고리만큼 위험하다. 성경 전체로 자꾸 살펴본다. 돌은 알 수 있다. 매끄러운 돌은 다듬어진 돌이다. 사람이 기도하고 노력하므로 스스로 다듬을 수 있다. 환경 들이칠 때 다듬어진다. 환경만이나 노력만으로 되지 않고 주신 환경 속에 자기 반응에 따라 다듬어진다.
▪ 신앙을 연단하는 사례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 가서 환경이 어려워질 때 자기 깨달음으로 자기를 만들었다. 외부 현실은 나를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 마음을 달래신다. 현실과 신앙양심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 역사를 통해 우리는 다듬어진다. 욥14:19, 물은 돌을 닳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자연의 이치다. 시냇가 돌은 물 때문에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특수한 한 사람만 아는 것이 아니다. 환경이 몰아칠 때 말씀과 성령의 감화로 살아보려고 하면 신앙이 다듬어진다. 다윗이 평소 맡은 양을 위해 말씀에 순종한 세월이 다윗의 신앙을 다듬어 놓았다.
요일5:4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 했다. 세상과 골리앗이 다른가? 평소 다윗이 제 멋대로 살다가 골리앗을 상대로 이 날 패기 하나로 던져서 이겼을까? 모세의 온유함은 하루 아침에 되어진 것일까? 아브라함의 용맹한 318명의 가군은 한 번에 준비된 것일까? 수많은 세월 속에 말씀으로 자기를 꺽고 다듬고 준비한 결과이다. 그래서 평소 말씀과 양심으로 소리없이 자기를 꺾고 만들고 길러가는 것이 참 믿음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버틸 수 없고 이길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주님이 주신다면, 평소의 순종 그대로 걸어가고 평소 인도하신 주님은 그 순종으로 환란 때 역사한다. 계3:10, 평소 인내의 말씀을 지켰고 시험의 때에는 주님이 이기게 해 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연단 결과는 잠27:18, 철이 철을 ....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빛난 영광이다.
■ 공회의 성경 해석은 성경
▪ 성경은 기록부터 해석까지 특권층을 배제
영어가 제대로 되지 않는 한국 사람이 원어로 성경을 해석하겠다함도 심히 곤란하고 동양어를 그렇게 어려워하는 미국 신학자가 히브리어로 직접 해석한다 함도 그렇다. 영어와 원어가 자유롭다해도 유대인이 히브리어 원어를 몰라 주님을 배척했을까? 예수님 초림 때 유대인은 구약성경의 원어 히브리어가 모국어라도 실패했다. 그런데 수천 년이나 지나 사어가 된 이 언어를 오늘날 신학과 언어학으로 배워 성경을 해석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성경과 신앙의 기본원리는 특수한 인간에게 성경 해석을 유리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주교 교황 제도는 성경을 접근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특수한 부류가 있다고 한다. 이단이다.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원리, 성경은 믿는 우리 모두에게 꼭 같이 주신 계시은혜이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 말씀으로 살려고 하다보면 필요한 면을 하나씩 알린다. 삼상17장의 그 때 골리앗은 일제 때 총독부였고 6.25 때는 점령한 인민군들이었다. 신학자치고 승리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평소 말씀으로 자기를 다듬은 사람이 이겼다. 이것이 열처녀 비유의 기름 준비와도 같다. 한 달란트에 충성하면 부족함이 없다. 신학없이, 그리고 어느 한 사람만의 경험이나 무슨 꿈을 이야기 하지않고 해석했다. 이 정도는 모두가 다 깨달을 수 있어 보인다. 혹 늦었다 해도 한 번 들으면 알 듯하다.
▪ 신학의 논쟁에 아쉬운 점
신학의 논쟁은 성경으로 살피고 애매하면 세월을 두고 서로 지켜 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이 된다. 그러나 신학은 인간이 성경을 연구하며 자기 입장을 개입하면서 복잡해 지고 엉뚱하게 된다. 성경을 살피는지, 아니면 성경을 이용하는지 혼란스러워 진다. 이럴 때마다 공회 입장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동원한 수단인지 진리의 연구를 위해 필요한지를 묻게 된다. 묻는 방법은 상대를 비판하기 위해 이용 된 근거를 가지고 그들을 살펴 본다. 알레고리라며 성경 해석을 금지하는 이들, 그들은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읽기만 하는가? 그렇다면 설교는 왜 필요하며 주석은 왜 필요할까?
알레고리라며 성경 해석을 금하려면 구약의 예언서와 신약의 계시록은 암호로만 읽고 그냥 둬야 하지 않을까? 모든 주석은 그 자체가 성경을 흐리고 가감하는 것이니 중단 시켜야 하지 않을까? 성경에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이 해석을 하고 설명을 하려 드는가? 성경을 기록한 성령이 교황과 성직자들에게만 역사한다는 것은 천주교이고 개혁주의는 중생 된 모든 사람은 성경을 직접 읽고 성경을 깨닫고 그 말씀으로 직접 실천해야 한다.
세상이 필요 없다는 염세주의는 이단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는 속세주의가 정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염세주의도 속세주의도 모두 이단이다. 신앙은 용세주의다. 좌익이 교회 탄압을 한다고 한 때는 우익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마치 신앙인 듯한 시절이 있었다. 지금 세상은 다시 같은 현상이 벌어지면서 최근의 신좌파들 때문에 신보수가 신앙인 줄 안다. 말씀에서 벗어나면 좌향도 우향도 꼭 같이 틀렸다. 잘못된 해석은 알레고리든 역사신학이든 모두 틀렸다. 바른 해석은 알레고리 식으로 보이든 역사신학 식으로 보이든, 말씀에 바르면 성경이다.
▪ 공회의 성경 해석
공회는 역사적으로 잘못 된 알레고리 해석을 모른다. 접촉해 본 적이 없다. 또 알레고리 해석이 틀렸다며 비판하는 신학도 알지 못한다. 그런 논쟁은 신학을 몰라도 성경으로만 믿어 온 공회로서는 성경에 벗어 나면 알레고리 해석도 틀렸고 또한 알레고리 해석이 틀렸다는 신학의 성경 해석도 성경에 틀렸으면 틀렸다는 입장이다. 공회는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전부다. 그 해석이 틀렸으면 틀린 부분을 성경으로 다시 바로 잡으면 된다. 알레고리는 '비유'라는 뜻이다. 성경에 '비유'가 있고 예수님이 직접 비유로 가르쳤고 비유를 성경에 적었고 비유를 적은 이유와 비유를 설명하는 사례까지 적어 주셨다. 이 것을 비판하면 비판이 틀렸고, 성경의 비유를 성경으로 배우고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을 벗어 나면 어떤 해석도 틀렸다.
공회의 성경 해석은 신학이 아니라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며 애매하거나 잘 모르는 부분은 그냥 과제로 남겨 둔다. 그리고 아는 말씀을 실행하면서 신앙이 자라 가면 과거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된다고 본다. 이 것을 떠난 성경 해석은 일체 배제한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며 생활 속에 실행을 통해 하나씩 깨달아 간다. 성경 해석은 성경 안에서도 또 2천년 교회사를 통해서도 늘 다른 입장이 있고 해석이 달라 지면 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공회의 입장은 서로 다를 때 자기 주장의 관철이나 분열에 앞서 다른 부분을 과제로 두고 세월에 맡겨 보면 결과가 나온다고 본다. 사람이 성급하여 상대의 주장을 꺾기 위해 알레고리나 여러 신학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것은 늘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7계명 때문에 동성 문제를 보수 개혁주의 신학이 일제히 비판하지만 정작 이성의 7계명 범죄는 언급하지 않는다. 교계에 7계명 범죄를 허용하지 않는 곳이 있을까? 7계명을 대규모로 범하는 교계는 동성 비판에 앞서 자신들이 이성 범죄를 조심하면 동성 문제는 거론도 필요 없게 된다. 알레고리 해석을 비판하는 신학은 대체로 성경을 신학으로 해석한다. 이 것은 바른 길인가? 성경에서 벗어 났으면 알레고리든 신학이든 틀렸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 전체와 틀리지 않게 설명을 했다면 바른 것이 아닐까? 성경은 단일성이 있으니 우선 서툴고 부족하고 잘못이 있어도 꾸준히 비교하다 보면 옳은 것이 나온다. 성경으로 성경을 차분하게 하나씩 살펴 나가다 보면 남을 비판하기 위해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남의 해석은 '사변 상상'이라고 비판합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성경이라 하고
여호와증인은 '삼위일체'라는 글자를 성경에서 찾아 보라고 합니다.
여호와증인이 성경을 알레고리로 가져 가지 않고 곧이 곧대로 잘 믿는 곳입니다. 지상의 천년왕국도 고대하고 있고, 피를 먹지 말라는 말씀에 따라 남의 피를 자기 몸에 주고 받고 하지 않습니다. 알레고리를 반대하려면 여호와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여호와증인의 '왕국회관'도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이 말을 하면 갑자기 성경에 없는 온갖 이야기를 다 합니다.
알레고리라는 외국어를 척 갖다 대면 한국 사람은 일단 영어 단어 앞에서는 기고 들어 갑니다. 노예 근성 때문에.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는 공자의 문자를 갖다 대면 됩니다. 홍콩 출신 중국인이 하도 한자 자랑을 해대길래 龍 4개로 된 글자 앞에 삼수변을 붙였습니다. 그 분은 갑자기 멍하니 말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런 단어가 존재 했다면 제가 그 단어 외에 풀초를 또 붙여 봤을 것입니다. 한자 수십 만개는 역사적으로 하나씩 만들며 더해져 왔습니다. 난들 또 하나의 단어를 만들면 안 될까? 만들어 봤습니다. 세상에 한자 만들기만큼 쉬운 게 없습니다. 레고 붙이듯 갖다 붙이면 됩니다.
칼빈 칼빈... 하다가 칼빈이 흔하니 프랑스어로 깔뱅이라고 한 사람이 쓰기 시작하자 깔뱅이라 적으면 칼빈 위에 하나를 더 아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커피 커피 하다가 요즘 카페라고 해야 신식인 것처럼. 해 아래 새 것이 없는데 아는 사람은 이왕이면 쉽게 설명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말을 빙빙 꼬우고 돌리고 비틀어 댑니다. 이 사람은 남을 호리기 위해 복잡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자기도 잘 모르니 남이 알기 어렵게 앞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마16:5 '떡'을 거론했으나
마16:11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 문자로 해석한다면 먹고도 죽는 요6장의 썩은 양식 놀음이 되며
요6:52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식인이라는 이들에게 '
요6:55에서 '참된 양식' '참된 음료'라 하여
-> 성경은 문자와 함께 그 속에 두신 뜻을 찾으라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