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여러 가지 형태들 - 2차 설교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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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5 13:12
(여러 가지 분류)
성경이라 할 때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분류를 하면 성경을 살필 때 도움 되는 면이 있다. 유익이 아주 많다.
신학이라 할 때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이라고 분류를 한다. 교수 직책 때문에 붙인 것이 아니다. 이유가 있다.
교회를 개인교회 가정교회로 따로 살필 때가 있다. 한국교회 미국교회 세계교회 역사교회 가견교회 불가견교회도 분류한다.
어떤 분류는 자기도 남들처럼 최초로 시도했다는 기록을 위해 실익도 없는데 억지로 줄줄이 이름을 붙여 놓는 경우도 있다.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은 참으로 불가피한 이름이다. 과거구원 현재구원 미래구원, 이 분류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사실 그냥 두면 저절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살아 남고 전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 된다.
(설교의 분류)
도덕 설교, 인권 설교.. 분류도 있다. 이런 분류는 그런 설교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잘못 된 설교라는 표시에 필요할 수 있다.
공회는 성경을 중심에 두고 성경으로만 전하려 한다. 주해 설교가 된다. 그리고 성구의 연결을 살피니 교리 설교라고 불린다.
공회 설교에는 아주 특별한 분류가 하나 있다. '재독 설교'다. 한 번 들은 설교를 복습으로 듣는다. 복습 설교? 참으로 어렵다.
성경 말씀은 쉽게 기록했다. 성령이 쉽게 가르치신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 문을 닫고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듣지 못한다.
중요한 설교일수록 이상하게 더욱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어리기 때문이고 우리가 강퍅하기 때문이고 세상에 물들어 그렇다.
중요한 설교, 어려운 설교, 그런데 꼭 듣고 깨닫고 자기 말씀으로 새겨 놓아야 할 말씀은 한 번 듣고 그냥 지나 가면 곤란하다.
(공회의 '설교 복습')
1960년대 우리 나라의 최고 목회자인 김현봉 목사님의 아현교회는 그 수준과 영향력을 두고 오늘까지 흉내도 내기 어렵다.
그 분의 설교에는 '새김질'이라는 설교 후 순서가 있었다. 따로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 후 저절로 모두가 그렇게 했다.
김현봉은 그냥 쉽게 설교를 풀어 나갔다. 듣는 분들은 당대 신학자나 유명 목회자들인데도 암호를 풀 듯이 어려워 고민했다.
너무 중요한 성구와 교리와 신앙의 난제를 쉽게 쉽게 풀어 냈다. 그런데 그 연결을 찾아 이해를 하자니 보통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설교가 끝 나면 수준 급의 신앙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필기 한 것을 비교해 가면서 방과 후 복습을 하듯 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일찍 1950년대부터 서부교회에서도 같은 모습이 있었다. 사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계신의 이병규 목사님이 부산 피난 시절에 백 목사님께 배워 봤고 서울 수복 후 김현봉 목사님을 통해 같은 모습을 겪었다.
새김질은 물론 교리도 성구 해석도 신앙의 방향과 자세와 실천까지도 그리고 성령의 보이는 능력까지도 아예 같아 보였다.
이병규의 소개로 서로가 알게 되었고 연세가 많았기 때문에 백영희는 김현봉을 깍듯이 예우했으나 다 같을 수는 없었다.
설교를 한 번 들으면 대부분 알아 듣는다. 일반적으로 설교란 그렇다. 그런데 신학 강좌가 아닌데도 이들의 설교는 깊었다.
당대 최고라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그들 밑에 모여 들었고 설교가 끝나면 재론을 했다. 복습이며 토론이며 설로가 살폈다.
자연스럽게 토씨 하나도 중요한 경우가 너무 많았고 모두 열심히 필기를 하고 서로 재구성을 하면서 감탄이 끝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목회자 중심으로 아예 별도의 장소에 별도의 기회를 마련해서 따로 배웠다. 교역자 수양회는 그렇게 시작했다.
65년을 이어 오는 공회의 집회도 이런 배경이 있었고 김현봉은 관악산 등 집회가 있었고 삼각산은 가깝기 때문에 편리했다.
김현봉 계통은 거의 없어 졌기 때문에 그냥 두고 공회는 지금까지도 백영희 설교를 다시 듣는다. 이 복습 설교가 재독이다.
(1. 원고 설교)
우선 백영희 생전이나 사후나 그 설교를 배우고 익힌 목회자나 교인들이 자기 설교할 강단에서 그 설교를 원고로 사용했다.
처음 배우는 이들은 거의 설교를 거의 그대로 읽었다. 한 자라도 손을 잘못 대면 말씀의 방향이 너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으로 사는 것과 성경대로 사는 것은 같은 줄 알았는데 배우고 보니 너무 다른 세계였다. 그러니 서툴게 전할 수 없었다.
듣는 교인들은 좀 답답하게 보이고 들린다 해도, 설교의 첫째 주의 사항은 말씀의 정확한 전달이다. 나머지는 다음 문제다.
먼저 들은 사람이 너무 귀하게 받았으니 당연히 전해야 하겠고 정확히 전하기 위해 백영희의 설교를 필기하고 읽어 버렸다.
그런데 읽어 전하는 것만 들은 교인들이 백영희의 설교를 접하고 나면 어떤 웅변이나 감동적 설교와도 비교를 하지 않는다.
공회가 전국에 형성 된 이유는 바로 이런 설교의 세계에 있었다. 어떤 목사라도 괜찮고 그 설교를 잘 전할 사람을 요구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백영희 설교 필기만 또박또박 읽은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세월 속에 잘 활용한 분도 있다. 모습은 달랐다.
1970년대는 원고 설교에 모두 철저했다. 80년대는 활용에 따라 여러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90년대 이후 각 공회가 된다.
원고 설교의 효력은 대단했다. 성경으로만 설교하는 세계를 교계에 보여 줬고, 성경 설교가 교회와 교인에게 가장 유익하며
교회와 교인의 충성과 깨끗과 부흥 발전에도 이 이상이 없었다. 그 열매 중에 하나가 주일학교의 대부흥이었고 사경회였다.
확실히 공회 교회는 인간 재미와 교세에는 당장 불리해 보였으나 원고 설교에 충실한 공회 교회의 장점은 세월 속에 빛났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이 설교 자료만 확보하면 목회자가 설교에 관한 한 아무 노력이 필요가 없었다. 게으른 사람도 나왔다.
읽기만 해도 우선 통했다. 그러나 읽기만 하는 사람의 설교는 설교 원고가 같아도 은혜가 되지 않아 교인의 반대가 나왔다.
읽기만 해도 은혜 되는 분들은 그 설교로 자기가 먼저 회개하고 노력한 자기 생을 담아 전했다.에 그 효력은 날로 좋아 졌다.
(2. 재독 설교)
80년대부터 녹음과 방송이 생활화가 되었다. 백 목사님의 설교가 5천여 개가 되던 시점에 그 설교 중에 하나를 재방을 했다.
한 번 들은 설교보다 다시 듣는 설교가 더 은혜 된다는 비교가 나왔다. 설교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재독이 본격화 되었다.
1989년 8월 27일, 백 목사님이 돌아 가시게 되자 백영희 아닌 설교자들이 백영희 재독 설교에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공회와 서부교회에는 2 가지 흐름이 있었다. 우선 백영희 생전의 설교를 통해 말씀의 은혜를 이어 가며 다음을 보자는 쪽과
백영희를 바로 잊어야 자기가 서부교회나 총공회의 다음 지도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니 재독을 포기하자는 쪽이 있었다.
재독을 통해 얻는 각자의 이익이 달랐다. 그런데 교인 입장에서는 재독의 은혜가 명확하게 더 나았다. 문제는 인간들이었다.
재독을 막기 위해 재독을 반대 하는 측은 재독을 범죄로 규정했다. 신사참배와 같은 우상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 할까?
재독을 하자는 쪽은 재독으로 받는 은혜에 추가하여 다음 지도자를 자기들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 때까지 시간을 벌려 했다.
귀한 설교, 원고로도 귀한 설교, 재독하면 더욱 좋은 설교, 설교의 은혜는 틀림이 없으나 귀신이 사방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여기에 2013년, 백영희 자녀들은 백영희 설교가 상속 재산이니 허락 없이 사용하면 전과자를 만들겠다고 했고 그리 되었다.
다행스럽게 이 연구소는 2018년 1월까지 그 자녀든 누구든 다시 거둬 들일 수 없도록 무제한 무조건 이미 전해 놓아 버렸다.
지금은 그 누구라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또 외면해도 된다. 그 것은 각자의 자유다. 그러나 재독의 은혜란 너무 분명하다.
(생명의 역사는 발전한다.)
생명체는 누가 뭐라 해도 숨을 쉰다. 활동한다. 또한 성장한다. 신앙의 생명성도 그렇다. 이 노선의 생명성도 지켜 보면 안다.
부공3은 백영희 설교의 가치는 알아도 자기들만 사용하려 할 때 무제한 무차별 제공해 왔다. 막혀도 끝까지 그렇게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2018년 1월부터 자녀들에게 백영희 설교를 뺏기는 모습이 있을 때 이미 재독 설교의 다음 단계에 와 있었다.
다른 공회의 다른 목회자들은 자기만 알고 감추려 했고, 그런 이들의 설교는 녹음기의 반복 이상의 성장이 주어 지지 않는다.
물론 공회가 달라도 이 곳처럼 평소 그 가치를 알고 주력했고 주변에 열심히 전한 이들은 재독 설교의 다음 단계로 발전했다.
백영희 설교의 효력 자체를 모르는 분들은 일단 이 설명에서 논외로 한다. 서로의 입 맛이 다르면 서로 선호가 다를 수 있다.
많은 사람들, 이 곳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백영희 생전부터 그 설교에 평생을 바친 그 내용과 희생과 그 비중을 알고 있다.
20대, 30대, 40대, 50대... 그리고 60대까지를 다 기우려 백영희의 설교만 연구하고 전하느라고 교회도 가정도 제쳐 두었다.
오직 그 설교만 반복하고 그 설교의 이 부분 저 내용을 돌아 보고 붙이고 쪼개 보는 일만 했다. 그 설교는 우리의 전부였다.
이런 우리에게 2018년 1월, 백영희 자녀들이 법원까지 동원하여 우리의 이런 활동을 완전히 차단했다. 그러면 이제 죽는가?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이 설교를 살피며 이 설교 속에 들어 있는 성경을 읽는 방법을 이미 알게 되었고 연구를 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백영희 설교가 제공하는 이런 세계를 다른 이들도 접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 가는 것은 조심을 했다.
조심을 하고 있던 우리에게 백영희 자녀분들은 외적으로는 설교를 막고 나서는 차단을 했고 훼방을 했으며 젖 줄을 끊었다.
그런데 내용적으로 결과적으로 보면 백영희 설교를 통해 성경을 직접 접하고 백영희의 다음 세대로 나아 갈 기회를 열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못난 모습에 우리의 발전과 다음 사명을 묶고 있었는데 이 줄을 그 분들이 끊어 주셨다.
(부공3, 이 곳의 현재 설교 진행)
2018년 5월 이전까지는 오로지 백영희 설교만 들여다 봤다. 불신 가정의 초등학교 1학년과도 집회 내내 그렇게 해 왔었다.
2018년 5월부터, 백영희 설교록의 인쇄 글자는 완전히 덮었다. 그런데 나는 1989년부터 실은 그렇게 했었다. 남이 몰랐다.
4년째 백영희 설교를 전혀 참고하지 않고 오로지 성경만 가지고 설교를 진행하고 있다. 설교록에 없던 내용들을 펴고 있다.
훌륭해서 그럴까? 백영희 설교를 제대로 잘 살피다 보면 그렇게 되어 진다. 설교록을 보고 주일이 필요 없다는 분들도 있다.
설교록을 읽은 뒤 아폴로나리스의 1700년 전의 주장을 반복하면서 자기가 백영희보다 낫다는 중간반 출신 신학자도 있다.
좌로도 치우치고 우로도 치우칠 수 있다. 그런데 정확히 이어 지며 자라 가는 여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세월이다.
1년을 지켜 보면 채소에 관한 한 모두 결판이 난다. 3년이 지나면 나무의 종류에 관해서는 판단이 나온다. 열매는 10년이다.
세상이 코로나로 괜히 소동을 하고 있다. 이런 문제도 이미 '사후 재독' 문제로 다 살폈기 때문에 우리는 30년 전에 해결했다.
그 때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좀 성가신 정도지 어떤 혼란도 별다른 각오도 필요 없이 공회 교회들은 그냥 잘 가고 있다.
오늘 아침 교회 다시보기에 이런 글이 올려 졌다. 주일 새벽에는 지나 간 설교 중에 꼭 반복할 내용을 하나씩 재독을 한다.
원래 '재독'이란 백영희 설교만을 재독으로 삼아 왔다. 그들이 막으니 차선으로 그 다음 것을 찾아 다시 키를 수밖에 없다.
이 번에 설교는 재독 대신에 '2차 설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강단에서 처음 전한 설교가 1차 설교다. 다시 전하면 2차다.
(2차 설교 - 1차 설교들 중에 일부 또는 여러 부분을 담당자가 만든다.)
강단의 1차 설교는 아무리 은혜가 있다 해도 첫 설교의 한계가 있다. 모든 설교란 은혜와 아쉬움이 어느 정도로 함께 있다.
오늘 주일 새벽의 2차 설교는 1차 설교에 은혜만 선택했으니 1차 설교보다 낫다. 또한 2차 설교는 오늘에 필요한 1차 설교다.
1차 설교는 우리가 늘 아는 대로 강단의 설교에 대한 책임과 함께 그 강단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동행해야 하는 중책이다.
2차 설교 담당자는 1차 설교로 2차 설교를 준비할 때 1차 설교처럼 책임을 느끼는 동시에 2차 설교에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우리 교회의 2차 설교는 우리 교회 1차 설교보다 늘 더 은혜롭고 2차 설교가 왜 필요한지를 잘 전하고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세상 사람들은 편집이나 교정이라고 한다. 편집과 교정은 기술이 중심이나, 2차 설교는 1차 설교처럼 설교라는 점의 다르다.
한 가지 다시 분명히 한다. 1차 설교가 설교자의 설교이듯이 2차 설교는 1차 설교자의 설교가 아니라 2차 설교자의 설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