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주일학교 성지의 현재 - 사하구 감천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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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지’라는 표현
‘성지’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공회는 ‘성지 순례’ 같은 말은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습니다. 성지라는 곳, 그곳의 신앙 유물이라는 것들이 대개는 가짜이거나 과대 선전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말을 사용하면 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로 알리고 필요하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이 글에서 굳이 ‘성지’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 붙들려 한 시대를 신앙으로 이끌었던 종의 역사에 함께한 중요한 지역인데, 그 당시를 살았고 함께 배웠던 제자며 교인이며 후배며 반사로서 그곳의 당시와 오늘을 비교해 보면서 과연 이곳은 성지였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80년대의 감천 마을
80년대 서부교회 주일학생은 매주 평균 7천~8천 명이 모였습니다. 그 학생들은 서부교회가 위치한 대신동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부산 전역에 걸쳐 있었습니다. 서부교회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초량과 수정동, 남쪽으로는 아미동과 남부민동, 영도까지, 북쪽으로는 엄궁과 학장, 감전동, 사상에 이어 화명동까지 있었고, 서쪽으로는 괴정과 장림, 그리고 서남쪽으로는 감천인데,
감천은 마을의 모습과 주일학생 숫자와 서부교회를 지나는 버스 종점까지 위치하고 있어서 좀 특별했습니다. 당시 17번과 60번 버스 종점이 마을의 아래쪽에 있었는데, 60번 버스가 서부교회 앞을 지나는 노선이어서 주일학생들은 그 버스를 타고 교회를 다녔습니다.
감천은 서부교회서 차로 30분 거리에, 특히 감천 2동은 마을 전부가 산비탈로 이루어져 있고 앞은 바다를 향해 있습니다. 산복도로 많은 부산의 대부분 산복도로가 그렇듯이 이곳도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태극도를 믿는 사람들도 함께 자리를 잡아서 태극도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피난민이 임시로 거처할 곳을 마련하면서 산비탈에 얼기설기 지은 집들이 비탈을 따라 계단식으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골목들은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정도였고, 산비탈까지의 높은 곳은 올라가려면 숨이 찰 정도로 한참을 가야 했습니다.
80년대만 해도 가정마다 아이들 서너 명은 기본이고, 5~6명 형제가 있는 집도 많았습니다. 산비탈을 따라서 지어진 그 많은 집마다 아이들이 가득했고, 그들은 당시 주일학교 전도에 불이 붙어 있던 서부교회 반사들에게 감천 2동은 황금어장이었습니다.
토요일이면 오후 내내 학생들을 심방하는 반사들은 흔하게 서로 만날 수 있었고, 주일 아침 7시가 조금 지나면 산비탈 위에서부터 교회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수많은 아이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당시로 정원이 60명 정도 되는 버스에 100명은 족히 탔을 것이고, 학생들을 가득 태운 버스가 서부교회 앞 정류소에서 학생들이 내리면 빈 차가 되어서 다음 정류소 가고, 예배를 마치고 나면 돌아오는 버스에 주일학생으로 가득 차서 종점까지 가는 이런 모습이 주일마다 10년 넘게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지역들은 감천뿐 아니라 여러 곳에 있었지만, 감천은 마을의 형성 모습, 버스 노선, 많은 학생 숫자까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좀 더 도드라지는 경우였습니다.
3. 오늘의 감천 - 문화마을
공회 집회 참석을 위해서 태평양을 건너온 귀빈을 안내하여 백 목사님 기도하시던 대티고개와 80년대 주일학생이 가장 많이 온 동네인 사하구 감천으로 향했습니다. 백 목사님 가신 후 37년, 가끔 한 번씩 가본 지 20년 정도 만에 들른 이곳은, 마을 입구부터 차량들이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이 비탈이라 위로 올라가서 아래로 내려다보려고 올라가는데, 갈수록 차량이 많이 막혔습니다. 좀 의아했습니다. 이 비탈에 차가 왜 이렇게 막히지? 이런 곳이 아닌데?
의문은 산비탈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풀렸습니다. 그 비탈에 사람들이 점점 많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마을 정상에 올라가니까 조금 과장하여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는데, 절반 이상은 외국인이었습니다. 산비탈을 따라 형성된 마을의 모습을 구조와 형태는 그대로 두고 깨끗하게 단장하여 ‘감천 문화마을’이라는 관광명소로 재탄생 시킨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렇다는 말은 들었지만, 많은 곳이 그렇듯이 조금 그러다가 흐지부지될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 가서 본 모습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세계 곳곳의 별스러운 곳을 구경하는 재미로 세상을 삽니다. ‘견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백 목사님의 시에는 그런 사람들을 ‘탐경가’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저곳에 가고, 저곳 사람들은 이곳에 오는 것이 세상 여행이고 구경거리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일상이고 당연한 모습인데, 저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이 새롭고 신비합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저곳에 가면 또 그렇습니다.
한 지역의 특성을 살려 문화마을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관광객을 모아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면 좋은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일입니다. 감천이라는 마을에 문화마을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그렇게 한 것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반사 활동을 했고, 그곳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수많은 주일학생들의 모습을 목견한, 그 당시를 살았고 활동했던 한 사람으로서는 오늘의 그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주일학생들을 교회로 보내서, 어리지만 신앙생활을 하게 했던 그 지역, 그 마을, 그곳에 사는 그들의 부모들 바로 그곳과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월을 지나고 오늘에 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은 아닐까?
아브라함이 살았던 가나안은 원래는 박토였습니다. 박토인 그곳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모시고 가서 사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애굽에 하나님 모신 요셉이 가니까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고, 죄수들의 감옥에 요셉이 하나님 모시고 가니까 감옥이 천국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요셉을 애굽 총리로 등용하니 애굽이 세계를 살리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경의 역사를 보며,
80년대 10년 넘는 세월에 그 수많은 주일학생들을 교회로 보내어 복음을 받게 하고 배우게 하고 신앙으로 어린 시절을 살게 한 그 부모들, 그 지역, 바로 그곳을 오늘에 유명하게 만들어 드러내시는 것은 아닐까? 모든 시각과 판단은 각자 주관에 달려 있으나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