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명(보충2) 교회
교역자 | 조병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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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 | 목사님 | ||||
소속공회 | 부산Ⅰ | ||||
전화번호 | 055-942-7153 | ||||
교회주소 | 50111 경남 거창군 고제면 상개명길 69-4 | ||||
지방 | 08거창지방 | ||||
세부 | 개명교회 자료 보충 |
개명교회 자료보충
조정원 (개명교회)
1.소개:
백영희목사님이 예수믿기 전 술도가 사업을 할 때, 집안에서부터 심부름을 하던 소년이었고, 이후 주인이 예수를 믿자 바로 전도되어 교회를 출석하였으며, 이후 백목사님이 개명을 떠날 때까지의 대소사를 가족 외에는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분이며, 요즘으로는 추론하기에 어려운 해방전후의 사회적 분위기 교회내 상황 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을 잘 기억하고 있어 많은 참고 자료를 제공하는 분입니다. 동서울교회 이은수목사님이 사위입니다.
2.술도가 시절의 백영희
일제 때 술도가는 면소재지에 리 단위로 허가가 있었고 고제에는 봉산쪽 큰 골과 개명쪽 작은 골에 허가. 현재 조정원의 동생이 술도가 했던 집을 소유 거주. 주인은 술도가에서 판 씨름을 종종 벌린다. 누구든지 씨름을 이기면 됫술을 그냥 주고 그대신 지면 돈을 내고 사먹기였다. 이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술도가를 하던 집은 넓은 집이었다. 개명 2구 730번지였다. 술도가는 본체와 4칸짜리 아랫체로 되어 있었다. 제일 안쪽에 사무실겸 마루로 사용하던 칸이 있고, 그다음 양조장방, 펌프가 있던 우물, 부엌, 그리고 심부름하는 아이들이 야간에 공부하던 곳이다. 집에서 동네 아이 6-7명을 데리다가 집도 심부름을 시키면서도 전부 글을 가르쳤고 모두 무식을 면하게 만들었다. 교육과 노력의 댓가라는 것을 그렇게 강하게 인식을 시키는 주인이었다. 일군으로 일했던 사람은 이삼덕, 이용덕이었고 사촌처남이었다. 조랑말 양쪽에 술통을 싣고 심지어 무주 삼거리까지 산길 2-30리 한나절이 걸려서라도 다녔다. 무월, 모동까지도 그러했고 돈 받으러 가는 심부름도 많았다. 주로 술대금은 곡식이나 돈으로 받았고 열흘이나 한 달 단위로 수금.
술을 만들 때는 우선 밥을 고슬고슬하게 한다. 떡밥이 되면 밥이 쉬게 된다. 멍석 위에 부어 식혀 누룩을 섞어 알맞으면 짚을 한 단 태워 소독, 물을 맞춘 다음 3일이 지나면 청주나 탁주가 된다. 주인의 눈매는 아주 정확했고 일일이 적고 확인하여 비교를 하면서 품질을 높여나갔다. 단연 술맛이 최고였고 실패하는 수가 없었다. 맛이 있었고 판매에 활동적이었으며, 술꾼을 상대로 한번도 돈을 떼여 본 적이 없는 철저한 성격 때문에 돈을 엄청 벌게 된다.
부업으로 인천에서 소금이 오게 되면 현금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것도 큰 돈이 되었다. 아주 성격이 개방적이어서 모든 면에 시골에 묻혀 살던 사람과는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3.처음 예수 믿던 시절
예수를 믿고 나서 양조장을 정리하였다. 사업은 넘겼으나 살고 있는 집은 얼마간 있다가 아래쪽으로 옮겨 새로 지었다. 날씨가 많이 추웠고 그 고생이 아주 많았으나 예수 믿고 출발하는 모든 생활이 기뻤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새로 지은 집은 이후 목사님이 목회를 나가면서 동생 백태영으로 넘어갔다가 이학조, 이종조, 이종출로 이어진다.
집은 몸체와 바깥체로 지었고 약방 허가를 내서 장사할 때 사용하던 약장을 놓고 손님을 맞는 곳이 있었다. 아궁이가 왼쪽에 붙어 있었고 이 아궁이에는 늘 일본 부장이 와서 쭈그리고 불을 쬐던 곳이기도 하다. 신사참배를 하라고 일본 부장이 늘 와서 조르다 논쟁에서부터 지게 되어 나중에는 이곳에서 불을 쬐며 창문 너머 성경읽고 있는 백집사를 쳐다만 보던 곳이다. 집 바로 앞에는 한 해 삼농사로 일등품 논값을 제하고도 남았다는 논이 있다. 조정원의 아버지가 한번은 지나가면서 '무슨 논에 나락이 층층이 열려.....' 중얼거린다. 하나님의 복이 불신자 눈에까지 보이도록 붓고 계셨다.
술에 미쳐 살았고 술을 만들어 남을 술에 저려 살게 했던 그였다. 예수 믿고 출발하는 출발은 그 모든 과거 움츠렸던 생활 전부가 한꺼번에 진리에 자유롭게 풀렸다. 4m나 되는 긴 대나무 끝에 흰천 바탕에다 붉은 십자가를 그렸다. 십자가 군병되어 이 기쁜 복음을 천하에 외친다면서 밥만 먹고 나면 밖으로 뛰쳐나간다. 밥을 먹다가도 나가고 밥을 먹으려고 준비를 하다가도 뛰쳐나간다. 펄펄 끓고 있었다. 기도는 어디든 엎어지면 기도였다. 화산이었던 뒷산에도 자주 올라갔다. 부락 동쪽이 막혀야 불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해서 나무를 심어 화를 막는 미신으로 조성된 화산이었다.
그 집에 약방허가를 냈다. 또 냇가쪽으로는 물레방아를 시작했다. 예수를 믿게 되자 가정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으며 가족들을 포함해서 박봉순, 박점화, 조정원, 이이미(이종출목사님 모친) 등이었고, 3년간 농산으로 교회를 출석한다.
예수를 믿을 당시 순회전도가 많았다. 윤봉기조사님, 유홍천장로님 등이 주로 계명을 전도여행으로 들렀다. 유성기를 틀어주고 아이들을 불러놓고 찬송가도 가르쳐 주었다. 그러다가 전도강연이 시작되면 아이들이 도망을 가기도 하면서 귀속에 넣어두는 복음이 있게 되었다.
“꽃피는 삼천리 방방 곳곳에
조선의 아가야 우리 아가야
얼씨구나 좋구나 절씨구나 좋구나
앞날에 조선은 우리의 것
4.해방 후의 개명교회
해방이 되면서는 교회가 더욱 활발해졌고 주일학교를 남녀 2반으로 나누었고 남학생 반을 '죽반'으로 이재순선생이 맡고, 학생으로는 백도진, 백도충, 조도철, 전판수, 전재수, 배정렬 등이었으며 여학생 반은 '송반'으로 조정원선생이 담임을 맡고 학생으로는 백순희, 백은희, 조성순, 전계주, 김초덕 등이었다. 대정 10년생이며 12세에 주남선목사님이 학습.
성탄절이면 주일학교 시상을 하게 된다. 안 믿는 사람까지도 시골 겨울에 구경거리라고 오는 사람이 있었다. 믿는 집 아이들이 1등을 하게 된다. 그 아이들에게는 봉투 한 장이 상으로 주어졌다. '계2: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것이 믿는 집 아이들의 1등 상이었다. 상품은 안 믿는 집 아이들에게로 간다. 평생에 백목사님의 교인 관리법이다. 신앙있는 이에게는 신앙의 기준으로, 신앙 어린 이에게는 어린 신앙의 기준으로. 그리고 일반적인 시상 기준은 제일 잘 한 사람 1명을 뽑는 방식이 아니라 몇 명이든지 기준에 맞으면 1등이 되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1등이 없게 된다.
교회의 구역예배는 괘암마을에 홍순민, 박학년, 홍기표가 있었고 하계명에서는 교장선생님 가족이 있었으며 그 아들들이 진구, 정구였다. 조현욱의 모친인 하봉순도 있었다.
해방직후 교인으로는 장년 30여명, 주교 30여명이었다. 남자로는 상계명에 이술이, 이수근, 김수길, 김대수, 김문세 등이었고 수유마을에는 조정원, 최재현 등, 하계명에는 이진구, 이정구, 조현욱, 괘암에는 홍순문, 이재순, 양은생 등이었으며 여반으로는 20여명이었다. 낮으로는 농사일에 정신도 없거니와 저녁이면 전도강연을 나갔고, 호별전도도 하며, 또 전도가 아니더라도 예배 볼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계속 예배를 드렸다. 덕유산 너머 무주 땅에까지 개척을 하기 위해서 조를 짜고 계속 교인들이 전도를 다녔다.
5.교회 분위기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가정에서부터 예배를 드렸고 예배당을 마련할 때는 술도가가 있던 문임 동네, 상계명, 수내 3곳을 두고 기도를 하다가 기도 중에 현재 예배당 위치에 십자가를 보고 결정하게 되었고, 소화 16년 봄 초가로 첫 예배당을 지었고, 해방 후에는 기와지붕으로 교체하였다.
1939년 개명에서 교회가 시작될 때는 신사참배 강행의 시기였고 해방 후에는 부락을 돌면서 전도를 뜨겁게 하게 된다. 경제와 우상금지에는 유별히 철저했던 분이며 마지막 순교 때까지 계속. 조현옥의 외조모가 교회를 출석하고 있었고 사망하게 되자 관을 만들게 하고 새벽에 지게로 져서 공동묘지로 장례. 상계명에 있던 박봉선, 정갑용 두 분이 밥을 해서 날랐으며 모든 교인들의 일을 이렇게 살피며 시작. 산 중에 혼자 살던 성 노인이 눈이 많이 왔고 한 주간 교회를 나오지 못했는데 혼자 세상을 떠나자 교회에서 초상. 이시점의 사망에도 널은 이재순 집에서 준비하고 지게는 조정원.
교회서 초상친 아이가 3명이었다. 백조사님이 위천으로 이동하면서 묘 쓴 곳은 조집사가 알고 있으니까 내가 누구를 시키던지 벌초할 수 있도록 위치를 가르쳐주라고 하며 경제가 어려웠던 정갑용집사에게 벌초 밭을 맡겼다.
교장은 일제 때 이기선, 이시운이었고 해방이 되면서는 이맹호선생이었고 그 아들이 죽었는데 이재순, 조정원, 이진구, 이정구 등 교회 청년들이 장지로 갔었는데 두 사람은 급한 일이 있다고 하여 같이 일을 하다가 황급히 사라진다. 알고 보니 남로당에 관계하여 지서 습격에 합류. 이후로는 교회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들로 인하여 교회는 통비분자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그렇지 않아도 극심한 환란 속에 나오던 신앙에 더욱 외부 환란이 가해지게 된다.
그러나 교회가 어려울 때는 늘 정갑용집사님으로 하나님은 수많은 인도를 주셨다. 평소에나 난리 때에나 기도로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보여주셨다. 손대고 기도하면 아파서 구르던 아이들이 그대로 다 나아버린다. 다른 교인들이 꿈이나 무슨 계시를 받았다는 말이 나오면 불건전한 신비주의를 경계하고 금지를 한다. 백목사님 자신부터 수없는 신비한 체험이 있었고, 말씀 안에 신비와 말씀 밖에 신비를 구별시켰다. 집사가 되어서까지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던 이재순에 대하여 강단에서 기도하던 중 꿈에 그의 입이 찢어지는 모습을 보고 불렀다. 그리고 당장에 끊게 되었다. 이재순은 수내 동네에서 합천 이씨 집안으로 제일 큰소리 치는 집이었다. 집안이 잘 살고 똑똑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을 가정이었으나 한 해에 한 집안에서 초상을 세 번이나 하게 되어 온 집안이 신앙에 들게 된다.
그리고 맡기는 일이 있으면 그 업무의 분담은 아주 또렷하여 그렇게 허물없는 식구들이었으 말씀을 새기는 일에는 백영익이 늘 앞장이었다. 집회를 하게 되면 저녁 예배 후에 이어지는 철야에서 백영익이 그 날 배운 설교 내용으로 새김질을 시켰다.
교회의 내부일은 거진 정갑용에게 맡겼고 혹시 교회 외부로 할 일은 어릴 때부터 데리고 있었고 또 민첩했던 조정원에게 주로 맡겼다. 교회 안에 일이던 밖에 일이던, 일을 맡길 때는 꼭 당부를 한다. 교인의 가정이라도 교회 일로는 가정으로 방문하는 일을 늘 엄격히 금했다. 그리고 맡기는 일이 있으면 그 업무의 분담은 아주 또렷하여 그렇게 허물없는 식구들이었으나 일에는 분담과 책임의식을 확실하게 심고 있었다. 사랑이 넘친다고 무분별하게 되거나 부주의로 인한 잡음이 전혀 없었다. 참으로 강한 단체였고 진정한 한 몸과 같았다.
6.토벌대사건
교인들이 대부분 부인만 교회를 다니는 쪽믿음이었고 불신 가정박해가 심했는데 오일은 구역 예배로 드렸고, 사건이 발단된 날은 3일 예배였다. 비가 약간 부슬대고 침침했던 때였는데 배용일이 교회로 들어오고 있었다. 덩치도 작아도 교회를 못살게 하는 일은 다 하고 있었던 터에 그날은 또 예배당 안에까지 찾아와서 횡패. 그 성격을 잘 아는 조정원은 그냥 웃고 보고만 있었는데 피가 끓는 청년이 김수길이 마당으로 데려 나가서 2번을 때려 엎어버렸다. 그 형이 이장을 했고 일제 때 면서기를 했었는데 갈비뼈가 2개 부러졌다고 엄살로 드러눕고 성약국에까지 가서 약을 해 먹고 야단이었다. 늦은 봄 늦은 오후,
고제면 유지들이 배용일 편이 되어 돈 없는 김수길은 상대하지 않고 교회 대표 백영희를 족쳐야한다고 똘똘 뭉쳤다. 워낙 똑똑하고 탄탄해서 평소 자기들 뜻대로 하지 못하다가 핑계를 잡게 된 것이다. 지서에 나와 있던 토벌대에다 백영희를 뺄갱이라고 일러 바쳤다. 당시는 여순반란사건 직후였고, 백목사님은 평소에도 지서에 나오는 저 토벌대들이 겉은 토벌대고 속에 사상은 붉은 잡탱이들이라고 경계했던 이들이다. 지서에서 이 사건을 동네에 침투된 적색분자들의 준동으로 몰아갔고 교회로 몰려와서 모든 교인들을 총으로 치고, 그 와중에 사모님은 낙태를 하였다. 그때 토벌대는 면소재지 단위에서는 현장에서 원하는 대로 즉결처분해 버리는 때였다. 그래서 면에서는 모두들 이제 백영희는 끝났다고 수군대고 있었다.
백목사님이 적색들에게 가장 눈에 가시였고 평소에 가졌던 감정을 매로 다 풀었고 서류는 거창 경찰서로 넘겼다.
흰 무명옷을 입고 조정원 한 사람을 데리고 경찰서로 들어갔다. 담당이 빨치산들을 잡던 사찰계였다. 들어서니까 큰 거물 하나를 붙들었다 싶은 태도로 상대하였다. 누구든지 들어오면 일단 땅바닥에 무릎부터 꿇어 앉힌다. 신원조사가 먼저 있었다. 조사 도중 아들이 지금 서울법대를 다닌다는 사실을 순사는 알게 되자, 당장에 취조하는 태도와 말투가 바뀌었다. 아, 그렇습니까? 어서 의자에 앉으시지요! 어찌 되었습니까?“예, 때린 사실도 없었고,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교회 대표가 되다보니 그렇게 상대편에서 분풀이를 한 것입니다.”
경찰서에서 당일 석방이 되었다. 경찰서에 갔다와서 고발했던 가정에 보리 타작한 것을 가져다가 주었다. 그 가정에는 바로 초상이 두 번이나 나게 되었고 모두들 교회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7.봉화사건
목사님 부부와 최재현, 김수길, 조정원 등이 봉화산에 기도를 갔다. 최재현, 김수길 두 사람이 아주 높이 올라갔다가 추워서 불을 놓았는데 불이 크게 번졌다. 당시 산중에서는 적과 연락관계로 불을 놓는 수가 있었으니 산에 불을 놓다가는 의심받는 것은 물론이고 잘못하면죽을 수도 있는 때였다. 김수길, 최재현 두 사람이 불을 놓은 것 때문에 지서에 불려갔다. 이세기 순경이 담당으로 취조를 하고 있었다.
해방후 좌익 때문에 온 나라가 어지러웠고 특히 덕유산 발치가 되는 고제는 좌익이 준동하던 터이라 경계지역이었는데 당시 면 청년회장을 지냈던 이진구, 교장집 아들 이정구, 일정때부터 면서기, 이장을 하던 이 등 3인이 좌익에 속했던 사람으로 남로당으로 돌아섰었는데 이들이 해방직후 계명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다녔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개명교회는 사회주의 노선이 아니었고 오직 예수만 철저하게 믿는 신본주의 신앙이었다. 그들은 아주 겉보기와 내용이 완전히 판이해서 그들의 생각한 것과는 달랐고 무신론을 철저히 반대하는 신본의 교회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심히 적던 시절에 이들 인텔리들이 교회를 다니는 사실은 다 알게 되는 일이요 이들이 남로당으로 돌아서게 되니까 세상이 볼 때는 개명교회 다니던 사람들이라 해서 교회가 의심을 받게 되었다. 조정원이 고제지서로 내려가 보니까 취조하던 이세기순경이 “그 개명교회 원래 그런 뺄갱이 교회 아닌가!” 하고 다그치며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취조 내용 분위기를 듣는 순간 조정원의 머리에는 이제 마지막 보는 순간이구나!” 하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산기도를 갔다가 잡혀 왔으니 거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놓고 기도만 할 뿐이었다.
경찰서로 넘길 조서를 하루 종일 작성하고 이제 거창 본서로 넘기면 된다. 시간이 상당히 흘러가고 이제 거창 본서로 이송시키는 순서가 되었다. 산속으로 나무를 실어 나르는 화물차들을 얻어 타야 거창읍내까지 넘길 수가 있다. 혹시 해서 조정원이 물었다. “거창까지 따라 갑니까?' '물론' 본서로 넘긴다는 말이다. 면에 있는 지서에서는 한번씩 안면이라도 있고 해서 덜 심하지만, 만일 본서로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빨갱이만 잡는 무시무시한 '사찰계'가 있어 아주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긴다고 기도는 하지만 불안하기 그지 없다.
마침 전화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거창 본서에서 독촉이 온 것이다. 본서 사찰 계장이 사건을 빨리 보내지 않는다고 직접 지서 순경에게 재촉을 해 댔다. “야, 빨리 보내지 않고 뭐하는거야!” “예, 안 그래도 조서를 다 꾸몄고 조사가 끝났기 때문에 이송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다시피 지나가는 차가 있어야 하는데 차가 없으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요!”“벌써 언제부터 기다리라는 말만 하는거야!” “야, 너 만약에 도망을 간다든지 하면 네가 책임질거냐?” “아, 책임이고 뭐고 차가 있어야 보낼 것 아닙니까? 피의자를 데리고 40리를 걸어내려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일 걸어 내려 가다가 피의자가 도망이라도 가게 되면 그때는 또 누가 책임을 질 겁니까? “ 아니, 뭐라고?”
본서 사찰계장과 지서순경이 서로 언성이 높아졌다. 잡혀있던 청년들이 모두들 바짝 긴장을 했다. 죄목이 빨치산 연락책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담당 계장이 화까지 날대로 났으니 이제 죽었다는 생각뿐이다. 이제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더 당하게 생겼고, 또 지서 순경이 비호하는 듯 되었으니 괘씸죄까지 죄목을 더해서 엎어 쓰게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지서 순경이 전화를 끊고 분한 듯 씩씩거리며 혼자 말을 내뱉는다. “까짓 껏 모가지 떨어지면 떨어지고 이제 이판 사판이다.” 다시 수화기를 돌린다. 본서가 나온 듯 “서장님 바꿔주십시오” 무슨 배짱인지 대뜸 서장에게 직접 통화를 했다. 전투 상황이 벌어지는 지역이고, 일제때 경찰 풍토가 그대로 이어져 올 때여서 지서 순경이 서장에게 바로 대고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사건이 하나 있는데 직접 보고를 드렸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냐?”“ 봉화사건입니다.” “어, 요새는 봉화 사건이 별로 있을 일이 없을 건데?”“어떤 사람들이야?” “예, 두 사람인데 교인들입니다.“ “아마 그 사람들 기도하러 갔었겠지! 그 사람들 신원 좀 알아봐!” 이 순경이 전화를 끊고 무언가 유리한 대화가 되었는지 그 두 사람에 대한 신원을 물어 본다며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저 농사짓고 하나는 학교 심부름 하는 사람입니다. 이순경이 바로 본서에 전화를 다시 했다. “어찌 그리 빨리 신원파악이 되었나?” “예, 마침 여기 사람이 하나가 있어 잘 알기 때문에 물어보았습니다.””그 사람 누구야, 어떤 사람인데,” “예, 아주 동네에 신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어, 그러면 교인들이 그 추워서 그런 사건으로 처리해” “예” 이 순경이 자기도 한 고비 넘긴듯 다시 한마디 내뱉는다. “참, 운 좋았소!”
8.여러 내외적 일들,
①백을순, 백계순
백목사님을 모시는 일에 두 자매는 늘 뚜렷한 모습을 보인다. 백을순은 집안 살림으로 알뜰했고 백계순은 전도만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보는 교인들마다 이구동성으로 마리아와 마르다 같다고 했다. 늘 교인들은 한 식구들이었다. 한 식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식구였다. 초기 한국교회들이 다 그러했고 또 이 거창지역도 그러했다. 백집사님이 집회를 간뒤, 사택에 키우던 큰 돼지에게 번데기를 주던 아이가 실을 가려 빼고 줘야 하는데 실까지 같이 줘서 돼지가 시들시들 하다가 죽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식구들을 불러 먹인다. 먹는 것이 하나면 식구요 교인들이 바로 식구였다. 교인들을 불러 돼지를 잡아 잔치를 크게 했다. 사택에 동네에 제일 큰 누런 개가 있었다. 위천으로 부임할 준비를 하고 있던 때였다. 목에 피를 빼고 교인들끼리 잡아 잔치를 했다. 배고플 때고 자기 입이 급할 때였다. 이럴 때 본능적으로 입을 함께 할 수 있으면 식구였다. 교인들끼리 그러했고 교역자의 사랑이 그러했다.
②손양원목사님 집회 강사 초빙
주남선목사님이 백영희집사님을 애양원으로 심부름을 보내서 집회강사로 초빙을 하였다. 3군 (거창, 함양, 합천) 도(都) 재직회 집회결정이었다. 손목사님 설교는 “주기도문”몇 절로 한 주간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계속 반복. 마치 백집사님이 설교하듯 그렇게 닮은 듯이 보였다. 백목사님은”손목사님 주기도문 주석이 제일 깊다는 말씀을 종종하심.
③주남선목사님
해방 후부터는 집회 인도 요청이 많았다. 아직까지 집사였는데도 집회 요청이 많았는데 야로교회에서 집사로서 집회인도 요청이 들어왔고, 주목사님이 당회장으로서 허락을 했다. 그다음부터는 주목사님을 모시려는 집회에 주목사님이 자기 대신 백집사님을 계속 내보내고 또 집사님도 주목사님이 허락한 집회는 꼭 순종을 하였다. 집회 나갈 때는 집회 시작할 때와 끝내고 나서 주목사님을 찾아 꼭 보고를 드렸음. 혹 일정이 바쁠 때는 한번이라도 찾는다.
출옥성도였던 박인순집사님이 개명을 찾기 시작했다. 출옥성도들 사이에 주남선목사님으로부터 소문도 들어가고 또 여러 경로로 개명에 불붓는 신앙소식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깊은 산골까지 교계적 인물들이 출입하기 시작했다. 올 때마다 여러 청년들을 마중 보내고 했다. 안내가 없으면 위험도 했고 오는 길이 그렇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목사님을 모시는 일에는 특별했다. 팥이나 무엇이던 추수를 하게 되면 사람들을 주목사님께 보내 심부름을 시킨다. 반드시 아무도 몰래 갔다 오라고 하여, 개명에서 장생골 집회장소 너머 산으로 가서 갈마리를 통해 죽전에 있는 사택으로 들어간다. 사택에 도착하면 주목사님은 새벽 예배 마치고 아침 식사시간이 휠씬 넘었는데도 아직 기도가 끝나지 않아 주목사님 아침식사상이 준비만 되어 있다. 심부름을 어떻게 시켰길래 사람이 계명에서 이렇게 이른 새벽시간에 출발을 하고 이 시간에 벌써 도착을 했을까? 주목사님 사모님은 백집사님의 정성에 감탄을 하면서 주목사님 아침 식사 준비상을 조정원을 앉혀 아침을 먹인다.
④주목사님 추도식
주목사님 장례후 다음해에 추도식 문제가 생겼다. 후임 남영환목사님을 비롯해서 진주에 있던 황철도목사님, 합천에 이성옥목사님, 부산에서 한상동, 한명동목사님 등 고려신학교에 이사들 등, 고려파 모든 대표들이 추도식을 드리기 위해서 모였다. 백영희조사님이 다 모인 자리에서 성경으로 이 추도식을 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꾸 뒤에 보태게 되면 나중에 다른 것이 되고 말 것이니 이 면을 생각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성경을 가지고 감동적으로 설득시켜 관철시켰다. 극렬한 방법으로 반대치 않고 감동적으로 설득을 시켰고 고신을 움직이던 많은 여전도사님들이 적극 지지하여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 감동되었고, 그 의견이 통과되어 추도식을 없애기로 하였다.
9.기도에서 받은 성령의 불, 집회마다 쏟아부음
①지식과 행함, 이론과 뜨거움, 노선과 성령이 함께한 걸음
믿는 첫날부터 성경과 기도 둘로만 시작했던 분이었다. 성경은 초기에 거의 외워버렸고 이후에는 기도가 더 주력이었고 해방 후 이런 기도는 집사님으로서 가는 곳마다 은혜의 불이 쏟아졌다. 그때마다 기도의 열심은 더해졌다. 장기간으로 기도를 갈 때는 미리 한 두 사람이 가서 초막을 짓는 등 자리를 보고 준비를 하게 된다. 수내 위쪽에 있는 절골로 기도를 갈 때는 아무에게도 가는 곳을 말하지 않고 들어간다. 산도 깊지만 깊은 기도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인들과 함께 가는 기도일 때는 안 믿는 가정에 박해하는 남편들 때문에 그러했다.
봉산교회 집회가 특히 뜨거웠다. 김대수, 이술이 등 어린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모두들 나타나는 성신의 은혜로 앉은자리에서 3-40cm 씩 뛰었다. 사람의 힘이 아니라 신비한 힘이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들어 올리고 내리고 있었다. 은밀한 것이 아니고 확실히 나타난 성신을 받은 사람은 손 들어보라고 집회 도중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120명이 손을 들었다. 그때 이기점 전도사님이 나타난 성신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나타난 성신이나 은밀한 성신의 역사나 꼭 같다며 위로를 했다. 봉산교회 예배당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강단 위에까지 교인들이 가득 올라 앉았지만 밀려 닥치는 교인들 때문에 예배당 3/1정도되는 뒷편에는 양편 창문을 나무로 가로지르고 그 위에 나무 판대기를 깔고 한 층을 더 만들어 청년들을 앉혔다. 예배는 성령이 보이는 증거로 마음껏 역사해 주셨다. 찬송 1곡만을 가지고 한 자리에서 계속 70번을 불렀다. 밤새도록 계속 되는 은혜에 온 예배당은 용광로에서 내뿜는 열기로 진동을 했다. 예배당 바로 뒷집에 살던 김문세씨가 밤잠도 못 자게 한다고 오줌 장군을 들고 들어와 예배당에 쏟아 부어 버렸다. 그것으로 꺼질 불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도 뒤에 예수 잘 믿고 죽었다. 집회 도중에 계명에서부터 산을 넘어왔던 불신 남편 배문호는 자기 여자를 밧줄에 묶어 땅까시로 얽혀있는 산을 넘어 머리채를 끌고 갔다. 또 장대에다 낫을 매달아서 예배당 창문 안으로 넣고 휘젓기도 했다.
집회 참석인원은 앉은 사람 300명을 헤아린 적이 있다. 창문밖에서 예배를 보던 이들까지 합한다면 400명에 이른다. 이렇게 뜨겁게 나가면 잠깐이면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이탈 될 수 있는 분위기였으나 백목사님은 그 전체를 말씀과 교리로 다스리고 있었다. 사람이 뛰고 굴리면 환상을 잘못보고 삐뚤어지기 쉽다고 주의를 주며 그때부터는 성경중심으로 또 가르쳐 바른 길을 심었다. 가장 눈에 띄는 진동파라면 단연히 합천에서 온 이기점. 이상순 두 사람이었다.
②신앙박해 원인
한쪽만 믿는 가정의 파란은 비례해서 커졌다. 윤점용 남편, 전성수 부친, 배문호 같은 사람들이 동네에 모여 술자리가 벌어지며 남자가 자기 여자 교회 못가게 막는 것도 못하느냐고 촉분을 질러댄다. 그 말에 약발을 받아 공연한 횡패를 부린다. 특히 술 먹다가 교회로 쫓아와서 난리가 나던 일들이 흔한 이유였다.
③최재현목사님
합천에 살았으나 백목사님을 따라 개명까지 어머니가 이사를 오게 되었고 함께 오게 되었다. 고제국민학교 소사로 일하며, 거창까지 50리를 걸어서 심부름. 당시 어릴 때인데도 설교를 아주 잘 했고 그 어머니는 평생에 기도하는 분이었다.
10.개명교회의 그후
백영희조사님이 1949년 위천교회로 이동한 뒤, 이재순조사님이 개명교회를 맡았고 그 기간이었던 1959년 9월 고신교파에서 백영희강도사에 대한 제명이 있게 되자 그 신앙의 출발지인 개명교회는 거창시찰회 차원에서 제명되고 또 개명은 부산서부교회 백목사님과 같은 개교회주의 공회로 서게 된다.
개명 출신 교역자로는 백영희, 이재순, 백태영, 전성수, 전재수, 최재현, 장신석, 이종출, 윤봉원, 이미광 등으로 이어지고, 비록 교회 이름은 달라도 광역 개념에서 백목사님의 동일한 교훈과 지도로 같은 강단으로 생각하고 지냈던 주변 교회의 교역자들로는 농산교회 관련으로는 백영익, 백영침, 백차인, 이백은, 월천교회 박신찬, 김철수, 김병춘, 김태곤, 이순홍, 위천교회는 박기천, 이만기, 천세욱, 류차연, 진학일, 신도범, 이종옥, 이종희, 신연범. 신준범. 신옥범. 신두범. 신길범. 신민범 등 그 숫자를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곳에 소개한 분들 뿐 아니라 그 외에도 수많은 교역자들이 있으나, 신앙으로 백목사님의 노선을 이어가는 현존의 인물은 거의 없는 듯하다. 백목사님의 구식 신앙을 초월하여 신식 신앙으로 나간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이곳에 소개하는 백목사님의 신앙관점이 만일에 옳다고 한다면, 현재의 우리는 다시 출발해야 할 경우라고 확신이 된다.
백목사님 1989년 개명방문
이런 믿음의 역사가 많았던 곳이었고 평생에 한번 가볼 마음을 가졌으나 순교를 예감했던 마지막 해에 방문하였고 예배당 바로 옆에 심었던 전나무 주위를 시멘트로 발로 놓은 것을 파내고 흙으로 채울 것을 부탁하게 된다. 또 옛날 예배당에 썩은 기둥이 있는 것을 보고, 믿는 사람은 '보수'가 있어야 하지 보수가 없으면 안된다는 말씀을 한 마디 남기신다. 그리고 정갑용권사님에게는 아들 딸들이 무어라고 해도 이 개명교회를 떠나지 마시라는 부탁을 했고, 그는 첫 믿음 그 곳에서 마지막 하나님께 갈 때까지 백목사님 생전 개명의 신앙을 죽는 날까지 지키게 된다.
개명 윗동네인 수내마을 정유소에서 보면 신사참배 환란 때 덕유산으로 기도갔다 해방을 맞았던 곳을 바로 보았다. 덕유산 코배기날망 10리 넘는 길을 쳐다 보며 옛 생각에 잠겼다가 바로 닥친 8월 27일에 순교하게 된다. 기도나 심방 등의 목적 없이 단순히 둘러보러 가는 일은 백목사님 생애에 한 두 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한번이 순교하던 해 6월의 개명 방문이며, 그다음 8월 11일 집회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던 길에 주남선목사님 묘지를 보고 싶다고 하여 연구소 직원의 안내로 거창고등학교 바로 뒤편에 있는 묘소를 가게 된다.
백목사님 방문 후 약 10여년 후, 주목사님의 가족들은 주남선목사님의 묘지를 대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자리로 옮기게 된다. 정부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고 수차례 거절하며 고심했으나 결국 가게 되었다는 전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