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자묘, 규격 및 문구

손양원 정리자료 역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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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삼부자묘, 규격 및 문구

일시 2024.10.17
분류 묘비, 전기
서기 0 10

(손양원 현재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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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순교자   손양원 목사

성  도   정양순 여사  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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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1)


고 손양원 목사 약력 


1902.6.3.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출생

1926-34 나환자 교회 조사로 시무 

1938.3 평양 신학교 졸업 

1939.7 애양원교회 부임

1940.9 신사참배 거부로 여수 경찰서에 검속되고 광주형무소와 청주구금속에서 옥고

1945.8.15. 해방으로 석방되어 애양원 교회 계속 시무 및 원장 시무 

1950.9.13. 6.25동란시 공산군에 검속

1950.9.28. 여수시 미평동에서 순교하심


산돌의 잠든 자리


그의 생일은 중생한 그날이었고 주소는 주님의 따듯한 품속이었다. 그는 기도로 호흡을 하시고 성경으로 양식을 삼으시며 전도로 일을 삼으셨다. 그의 신앙은 십자가와 천국이었었고 생활은 희생의 제물이었다. 유유하게 흘러오는 구름 타시고 양양한 남쪽 바다 물결을 건너 천천만천국천사 거느리시고 어린양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천사장 나팔소리 들릴 때까지 몽매간 잊지 못할 애양원 성도 앞세운 두 아들과 그 부인과 나란히 누어 고요히 잠드시라 편히 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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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고요히 잠드신 세계의 성자 고 손양원 목사시여 평소 순교의 제물이 되시겠다고 하시던 그 얼을 추모하면서 하나님 중심주의의 신앙을 우리 심령에 불붙여 생명의 조명탄이 되게 하소서. 고 손양원 목사의 생애는 이렇게 살았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가 요구한 신사참배나 동방요배에 거부한 죄목으로 1940년 9월 25일 구속되어 그간 모진 수모와 악독한 문초를 받아왔으나 백절불굴의 신앙으로 6개 성상의 옥고를 인내로 승리한 위대한 신앙가이었다. 또한 일본의 쇠사슬에서 해방된 후 우리나라에서도 태극기에 머리 숙여 경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몇 명의 동지들과 단합하여 손을 가슴에 얹고 국기를 주목하여 경건과 이념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할 것을 대통령을 직접 방문하여 고친 사실은 큰 혁신이라 하겠다. 또 사랑의 원자탄 주인이 되시는 손 목사는 여순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을 죽인 상극적인 원수 안모씨를 주님의 사랑의 극치를 본받아 자기의 대아들로 삼고 그를 신앙으로 길러 후대의 주의 종으로 쓰시려고 간곡히 기도하였다. 또 몸서리친 6.25때에 애양원 교회 25인 제직들은 피난갈 배를 준비해놓고 손 목사에게 피신을 강권했으나 자기의 몸이 됨과 곧 그의 생이 된 애양원 교회를 버려두고 어디로 피난을 가겠는가? 자기의 꼴을 아직까지 받아먹는 사랑하는 양떼를 버려두고 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 후 공산군은 즉시 체포하여 갖은 고통을 가했으나 굽히지 않고 도리어 그들에게 전도하다가 결국엔 1950년 9월 28일 총살로 순교했으니 과연 사랑의 사도시오 신앙의 사도가 됨을 추모하면서 이를 비문에 새겨서 후대에 전하고자 한다. 


1984년 11월 1일 

애양원 교회 교우 일동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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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 2)

고 정양순 사모 약력 

1907. 경남 함안군 구사면 출생 
1924. 부군 손양원 목사와 결혼

고 정양순 사모는 손 목사의 신앙의 동지로서 일제의 압박과 악독한 공산당들의 커다란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켜 헌신적인 내조를 했으며, 4남 3녀를 눈물과 땀으로 양육하시던 중에 사랑하는 두 아들을 여순반란시에 순교의 제물로 바치고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부군 손 목사마져 순교의 제물이 되었으니 얼마나 심통한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현모양처의 사명을 다 하시다가 부군의 거룩한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최후의 일각까지 복음사업에 힘서 개척교회 건립 모금 중 1977년 11월 26일 부산 청십자 병원에서 70세를 일기로 소천하였으므로 여기에 합장하였음. 

장남 손동인 2남 동신  3남 동장 4남 동길
장녀 동희  2녀 동수 3녀 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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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래 손양원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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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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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SONDOING(EB)              SODONGSIN(YB)
  
          THE TOMB OF MARTYR 
 
                  순교자

형 손동인 
제 손동신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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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1)
약사 신앙삼계

가정신앙

“내 자손에게는 무엇보다 신앙을 전장하겠다” 이것은 고 손군 형제의 조부이신 고 손종일 장로의 자손 교양의 수훈이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왜정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교리를 위하여 남관(南冠) 육년 (1940-1945) 독실한 신앙으로서 승리하였고 어머니 정양순씨는 육년 박해에 어린자녀 오남매를 이끌고 공장, 고아원, 산촌벽지로 쫓기어 기한도 참고 등모도 달게 여기며 신앙을 지키었다. 

교회신앙

돕는 자까지 형벌을 받던 때이나 애양원 교회는 손양원 목사이 신앙정신의 훈도(薰陶)를 받아 힘껏 돕고 정성껏 기도하며 위대한 순교자(殉敎者)를 길러내는 고난과 영예에 참예하였었다

본인신앙

이러한 신앙 안에서 자란난 고 손군 형제는 신사 불참배 일본 제국주의 교육제도에 반항함으로 퇴학되자 당시 형제는 같이 일터로 나가 몇 푼의 일삯으로 옥에 갇힌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와 아우들을 도우며 극도의 빈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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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싸우던 중 해방이 되어 각각 취학하였던 바, 동인은 스물 네 살 순천사범 육학년. 동신은 열아홉살 순천중학 사학년 재학 중 1948년 10월 21일 소위 “기독학생 운동의 두령”이라는 죄명으로 여순 소요(麗順騷擾)를 일으킨 그들과 함께 한 동창 학우에게 잡히어 무수히 타매를 당하며 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형제는 같이 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 고 온유하게 권하면서 형은 아우를 아우는 형을 살리려고 서로 죽음을 다투는 형제애의 지정(至情)도 헛되이 형제는 함께 껴안고 총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스데반이 뒤를 따랐었다. (요 11025 6)

1949년 9월   일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애양원 교회 엮음
김 수규  씀
전남광주 서석 공장 만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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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2)
본  적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주  소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순교지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순교일 1948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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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로 만든 형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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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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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SONDOING(EB)              SODONGSIN(YB)

  

          THE TOMB OF MARTYR 

 

                  순교자


형 손동인 

제 손동신의 묘 


*하단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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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신앙삼계

가정신앙

“내 자손에게는 무엇보다 신앙을 전장하겠다” 이것은 고 손군 형제의 조부이신 고 손종일 장로의 자손 교양의 수훈이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왜정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교리를 위하여 남관(南冠) 육년 (1940-1945) 독실한 신앙으로서 승리하였고 어머니 정양순씨는 육년 박해에 어린자녀 오남매를 이끌고 공장, 고아원, 산촌벽지로 쫓기어 기한도 참고 등모도 달게 여기며 신앙을 지키었다. 

교회신앙

돕는 자까지 형벌을 받던 때이나 애양원 교회는 손양원 목사이 신앙정신의 훈도(薰陶)를 받아 힘껏 돕고 정성껏 기도하며 위대한 순교자(殉敎者)를 길러내는 고난과 영예에 참예하였었다

본인신앙

이러한 신앙 안에서 자란난 고 손군 형제는 신사 불참배 일본 제국주의 교육제도에 반항함으로 퇴학되자 당시 형제는 같이 일터로 나가 몇 푼의 일삯으로 옥에 갇힌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와 아우들을 도우며 극도의 빈한과 


*하단
1945년 7월 27일 부산에 있는 아들 동인에게 손양원 목사가 옥중에서 쓴 편지 중에 “먹고 입는 것이 귀해졌다 하여 마음까지 잃지 않아야 하고, 음식을 잘 먹는 것보다 마음을 잘 먹는 것이 좋고, 의복으로 몸을 단장하는 것보다 선행을 옷입듯 할지니라” 
1945년 OOOOOO  
OOO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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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싸우던 중 해방이 되어 각각 취학하였던 바, 동인은 스물 네 살 순천사범 육학년. 동신은 열아홉살 순천중학 사학년 재학 중 1948년 10월 21일 소위 “기독학생 운동의 두령”이라는 죄명으로 여순 소요(麗順騷擾)를 일으킨 그들과 함께 한 동창 학우에게 잡히어 무수히 타매를 당하며 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형제는 같이 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 고 온유하게 권하면서 형은 아우를 아우는 형을 살리려고 서로 죽음을 다투는 형제애의 지정(至情)도 헛되이 형제는 함께 껴안고 총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스데반이 뒤를 따랐었다.

1949년 9월   일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애양원 교회 엮음


*하단
손동인 동신의 교체 전 묘비는 손양원 목사님이 1919년에 세웠다. 그런데 비석이 불교식이라는 지적이 많아서 현재의 비석으로 교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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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면2)

본적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순교지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순교일 1948년 10월 21일 


*하단
안재선 씨에 대해서 
1979년 12월 후두암으로 48세에 사망하다. 안재선 씨의 아들 안경수씨가 아버지 안재선이 따르지 못한 손양원 목사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어 손양원 목사의 유지를 받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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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새로 만든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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