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대 다니다 학업도 중단하고 식물인간된 아버지 병상 지키며 눈물의 기록'생명일기' 펴낸 루이스 최군과 그의 어머니 최순희 씨

시카고대 다니다 학업도 중단하고 식물인간된 아버지 병상 지키며 눈물의 기록'생명일기' 펴낸 루이스 최군과 그의 어머니 최순희 …

개발목적 0 5 07.11 11:59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넘나든 6백 18일의 간병기록

생명의 존귀함과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6백18일 동안의 간병일기가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어떤 소설보다도 충격과 감동을 주는 '생명일기'를 쓴 재미교포 2세 새뮤엘 루이스 최와 그의 어머니 최순희 씨를 직접 만났다.

효도는 결코 희생이 아니다.
 
루이스 최(27)는 우리 사회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병원이라는 한 집단을 통해 한국사회에 뿌리 내리고 있는 부조리와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침묵으로 가득찬 아버지의 병상에서 젊고 냉철한 그가 느낀 사물과 우주에 대한 사념의 깊이는 심오하고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인생의 황금기라는 20대 중반을 뚝 잘라 죽음과 절망, 침묵으로 휩싸인 병실에서 보낸 그를 사람들은 효자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교육을 받고 자란 청년이란 점에서 그가 보낸 6백18일간의 시간들은 이 사회에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미국사회 속에서 자란 청년이 과연 아버지를 위해서 자신을 그렇게 까지 바칠 수 있었을까 하는 한국적 인식 때문이다. 그는 효자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 들었다.
 학창시절 루이스 최의 필독소 목록에는 '논어'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효는 '논어'의 그것이 아니다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대학도답게 합리적이고 경제적이다.
 "나를 위해 아버지가 투자한 만큼 나도 아버지에게 투자한 겁니다. 효도를 한다는 것이 결코 희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효도를 한다고 내 인생에 손해될 일은 없습니다.'
 루이스 최에게 가족은 단순히 피나 유전인자 같은 물리적 고리만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끊어놓을 수 없는 강한 공동의 책임과 사랑으로 묶여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1백60cm의 작은 키에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학이 되면 아침마다 도서관에 데려다 주고 점심시간에 맞춰 햄버거를 사다주었다. 해질녘에 데리러 오고 저녁시간이면 거실 램프 아래서 두 아들에게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철공소 팔씨름 시합에서 5백 명 중 1등을 차지한 것을 자랑하던 오리걸음의 아버지.
 그러나

 그 아버지는 미국의 풍요 속에서도 늘 외로워했다. 학창시절 배운 일본시를 읊을 때면 낭만적인 성격의 아버지가 더욱 센티멘털해지곤 했다. 향수병을 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고향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져 갔고 드디어 그는 말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3년 뒤 루이스 최가 다시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는 미국 시민권과 함꼐 걷고 먹고 말하는 것까지 포기한 채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식물인간이 된 것이다.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내 시간의 6개월을 기꺼이 바치리라.' 아들은 아버지의 병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움직임이나. 소리하나 놓치지 않았다.
 10분마다 혈압과 맥박을 재고 몸 속에 든 분비물을 빼내고 욕창 방지를 위해 2시간 마다 한 번씩 돌아눕혔다. 때로 항문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가스와 변을 꺼내고 기저귀를 갈아채웠다. 아버지에게 석션을 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몸에 실습을 했다.
 콧속으로 도뇨관을 밀어넣어 뱃속에 든 분비물을 꺼내는 연습을 하면서 그는 환자에게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재활을 위한 전문 의학서를 보면서 공부해 아버지에게 시술했다. 음식 세 숟가락을 먹이기 위해 45분간 숟가락을 들고 있기도 했다.

재활의학서 공부해 아버지에게 시술

 아버지의 피와 살을 먹어가는 병마와의 싸움은 아버지만의 것이 아니었다. 잠잘 때 조차 한쪽 눈을 뜨고 잤다. 꿈속에서 조차 아버지의 가래 끓는 소리를 들었다. 먼지와 철제침대의 녹가루가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리는 아버지의 병상 밑에서 잠을 자면서 그의 젊음은 깊어갔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던 6개월이 지나고 또 시간은 흘렀다. 6백 18일 동안 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인생에 쏟아부었다.
 드디어 아들에게도 육체적 한계가 드러났다. 혈압이 90/60으로 떨어지고 몸무게가 16kg이나 빠지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늘 어머니가 함께 계시므로 길고 외로운 밤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상을 홀로 지키고 있을 어머니 생각 때문에 미국에 있었다면 그는 더 많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겪어야 할 마음의 고통보다 아버지의 병상 밑에서 선잠을 자는 고통을 택했다.
 아버지의 간병보다 더 힘겨운 것은 병원으로 축소된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인식과 제도적 차이들이었다. 아버지의 병실 입구에서 노트북 컴퓨터에 그는 6백18일 동안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록했다. 지극히 단순화된 생활로 이어지는 병실은 그에게 사막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막에서 더 깊이 인생을 배웠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생동감마저 느꼈다. 어느덧 병실은 루이스 최에게 우주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어린시절 그의 세계의 중심이었던 세인트루이스 어느 교차로에 있던 주유소처럼 병원에서 젊음이 시들고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젊은 욕구와 야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병세가 조금씩 나아질 때마다 그는 행복했다. 꾸준히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 있고, 작은 케이크 조각을 고마워할 줄 아는 자신이 있기에 병상을 지키면서도 그는 때로 행복했다. 병원 곳곳에서 삶과 죽음의 냄새, 빛깔까지 맛본 그는 화분

 속에서 자라는 식물과 발 밑을 기어가는 바퀴벌레에서까지 생명의 소중함을 배우는 생명철학자, 자신은 물론 우주와 그 속에 놓인 모든 것을 관조할 줄 아는 시인으로 변해갔다.
 그의 우려처럼 시간이 감에 따라 그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혼자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다른 힘 혹은 선에 의해 구애받지 않고 계속 뻗어나갈 수 있는 직선이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6백18일간의 경험은 그에게 외적인 동시에 대적으로 가히 혁명이었다.
 어머니 최순희 씨가 기억하는 아들 루이스 최는 '신앙이 아니었으면 삐딱한 길로 나갔을 소지가 다분한 아이'였다. 학교 축제의 DJ,춤 잘추고 노래 잘하고, 미식축구 러닝백이자 매직 존슨의 열렬한 팬인 농구광, 거기다 이미 80년대 초에 말총머리 등 온갖 최첨단 유행패션과 헤어스타일을 거친 전형적인 미국청년이었다. 동시에 그는 뛰어난 미국청년이었다. 몀문 사립고교 학생 회장, 다재다능한 우등생으로 매학기 초마다 주정부에서 주는 다독상을 받는 문학적 소양이뛰어난 학생이었다.

발 밑의 바퀴벌레에서도 생명의 소중함 배워

루이스 최의 인생관은 '후회없이 산다'는 것. 그가 6백18일간 아버지의 병상을 지킨것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병상을 통해 아들의 인생은 사소하고 자질 구레한 범주를 뛰어넘어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인생의 목적이 성공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라고 말하는 이 젊은이 루이스 최. 그는 이제 뜨거운 된장국이 왜 시원하게 느껴지는지를 조금식 알아가는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다.
 루이스 최라는 청년의 '생명일기'가 탄생한 근원은 무엇일까. 대를 이어 내려오는 깊은 신앙심, 교육과 독서로 쌓은 교양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적 유대가 남다른 단란한 가정환경이 그것들이다. 루이스 최의 부모들은 경남 거창에서 어린시절을 함께 보냈다. 소년 최재현이 장래 각시감을 처음 봤을 때 그녀의 나이는 8살 그날 밤 채재현은 이웃집 소녀 순희와 결혼하는 꿈을 꾸었다. 그에게 순희는 일생 오직 하나뿐인 그대, 순희와의 결혼은 그의 진짜 오랜 꿈이 되었다.
 최재현은 말이 없고 연약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다르게 속이 꽉찬 다재다능한 재주꾼이기도 했다. 자신 속에서 용틀임하는 열정을 따라 중학교 때 일본까지 날아갈 정도로 용기있는 소년이었다. 춤 잘추고 노래 잘부르던 소년 최재현은 가수 남인수가 뽑은 후계자였다. 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을 받자 남인수가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
 막 새로운 세계에 도전을 시작할 즈음 소년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안수기도로 병을 고칠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여인이었다. 중학생인 아들이 딴따라가 되겠다고 일본으로 건너가자 아들을 찾아 현해탄을 건널 정도로 대단히 적극적은 여성이었던 것 같다.
 이 가출소년을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친정 아버지가 무척 좋아했어요. 어릴 때부터 지켜보며서 장래 사윗감으로 점찍으신 거지요. 그 뒤 미국 유학시험에 패

스하자 더 대견해 하셨어요."
 일본에서 돌아온 최재현은 혼자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6.25가 터지고 먹고사는 것이 어려울 무렵 그는 비행장에서 번역사로 일했다. 그 뒤 미국유학시험에 합격하자 순희에게 청혼을 했다. 결과는 한마디로 콧방귀만 뀌는 순희가 언젠가는 미국으로 오리라 믿고 혼자 유학길에 올랐다. 막 전쟁이 끝난 때였다.

다재다능하고 자상한 아버지 활달하고 개성 강한 어머니

 천성이 낙천적이고 모험심과 활력이 넘치는 최재현에게 미국은 기회의 나라였다. 모든 것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지적 허기를 달래나갔다. 미국사와 신학공부를 하면서 하프타임으로 생활을 해결해 나갔다. 10년이 지난 뒤 그는 순희에게 구혼장을 보냈다. 순희에게서는 답장조차 오지 않았다.
 다행이 서른이 된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다. 그동안 여러 번 선을 보러 다니면서도 언젠가 자신이 최재현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예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에 못이기는 척 순희는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3년 안에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순회는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963년 비행장에는 최재현이 학교 친구들과 함께 한국에서 공수되어 오는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1백60cm의 작은 키에 오리걸음을 걷는 시골청년에게 어울릴 아내는 얼마나 촌스러울까. 그러나 친구들은 그의 아내감을 보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프랑스 여배우처럼 최신 드레스에 하얀 실크장갑. 오드리 햅번 스타일의 코트를 입은 순희는 그들에게 작은 충격이었다.
 미국은 순희에게 별천지였다. 그녀는 물만난 고기처럼 활기가 넘쳤고 열심히 살았다. 순희 최로서의 삶을 사랑했고 만족했다.
 "나는 미국이 좋습니다. 성격이나 사고방식이 맞아요.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지도 않는 나라입니다."
 개성이 강하고 활동적인 여자에게 미국사회는 잘 어울렸다. 영양사, 노인 돌보기, 베이비 시터... 열심히 일하면서 미국의 자유와 풍요를 즐겼다.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밤새 퍼먹어도 말리는 사람 없는 곳, 그곳에서 순희 최는 개성을 존중받았다.
 서른일곱, 서른한 살의 늦깎이 신혼살림은 행복했다. 첫아이 침대 살 돈이 없어 캐비닛 서랍에 뉘여 놓아도 그들은 깨가 쏟아졌다. 태어난 지 2주

일 된 아이를 들여다보다 몸통보다 다리가 짧다고 이상하게 여겨 병원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지능 개발을 한다면서 어린 아들에게 눈동자 운동을 시키다가 사팔뜨기로 만드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던 시절.
 순희 최는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큼직한 스테이크를 사다 남편에게 먹였다. 그러나 공부하러 도서관에 간 남편은 포만감에 잠만 잤다.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얹어놓고 자는 남편을 위해 아내는 저녁 메뉴를 바꾸었다. 양배추와 당근 몇 조각으로 배를 채운 남편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공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생활 30년의 최재현에게서 사람들은 늘 텁텁한 막걸리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만큼 토종 스타일이다. 늘 웃음이 많은 그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의 전형이었다. 그의 불쓱 나온 배는 엄청난 지식욕으로 허기진 듯 끊임없이 읽고 배워나갔다. 감정이 풍부하고 문학과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재인.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일본어. 독일어까지 공부했다. 젊어서부터 계속된 버릇은 늘 단어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외우는 것. 부산행 기차에서 희랍어 단어장을 넘기면서 외우다가 부산역에 도착하자 간첩으로 조사받은 해프닝도 있었다.

사업 파산으로 귀국 그리고 쓰러진 아버지

 최재현 씨는 두 아들에게 마음으로뿐 아니라 늘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은 자상한 아버지였다. 방학이 되면 필독서 목록에서 아들이 읽을 책을 골라주었다. 램프불 아래에서 아들이 읽을 책을 골라주었다. 램프불 아래서 가족과 가지는 성경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가장. 당초 신학 공부를 목적으로 했던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 성공한 이민 1세로 자리를 굳힌 그였지만 포만한 아메리칸 드림이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는 성공 자체보다 성공으로 가는 길에 겪는 많은 경험과 추억들에 즐거움을 겪는 탐험가였는지도 모른다. 이들의 눈에는 늘 아버지가 외롭고 공허해 보였다. 자연 속에 들면 일본시를 주절 주절 외던 그에게서 동양, 고향을 그리는 향수가 짙게 풍겼다.
 경영하던 무역회사가 파산하자 그는 늘 잊지 못하던 한국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돌아온 한국땅에서 그는 쓰러졌다. 병명은 다종동백류파열증, 수술을 하더라도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의 지극한 사랑으로 거의 기적에 가까운 재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병원에 들어간 지 6백18일만에 아내가 준비한 흰색 테니스복을 입고 두아들과 함께 병원문을 나섰다. 죽어나간다면 모르지만 나갈 때는 반드시 아버지와 같이 나가겠다던 아내와 아들의 바람대로 병원문을 나갈 때 그들은 모두 함께였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그의 투병생활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 만4년 아버지의 간병을 하던 루이스 최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남편의 상태에 따라 가족들이 울고 웃었어요. 삶의 방향도 달라졌습니다. 이제 내가 샘(루이스 최)을 떠나도록 했습니다. 부모 인생에 제한받지 말고 네 길은 네가 닦고 내 길은 내가 닦아야죠 자식은 저희가 될려고 하니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떡장사를 해도 효도하는 자식이 있고 날품을 팔아도 서울대 가는 자식이 있듯이.
 우리 가족은 생활을 철저히 오픈시켰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비밀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위

험한 길로 가고 있는 첫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열린 가족 관계를 통해 고민이 생기면 의논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는 겁니다. 아이들 때문에 걱정해 본 적은 없습니다. 두아이 모두 다재다능하고 늘 1등만했어요 사실 내 사전에 2등은 없습니다. 스파르타식이라 할 수 있죠. 미국에서는 그림 잘그리는 의사가 운동도 잘하고 소설도 씁니다. 한 가지 잘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샘(루이스 최)이 전공은 경제학이지만 계속 글도 쓸 수 있겠지요."

남편은 '내 사랑' 이자 아메리칸 드림의 동지
 
교육열이 강한 순희 최는 두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냈다. 의학 전공인 장남 또한 아버지를 닮아 재주가 많다고 한다.
 지난 6백18일동안 루이스 최는 병원이라는 한정된 테두리 내에서만 살았지만 많은 여성들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한국여자는 수줍고 순종적이라 생각했던 그는 놀랐다.  물론 병상의 아버지를 생각해서 모두 거절했지만 그가 시카고 대학 4년동안 받아본 데이트 신청수보다 많은 것이었다.
 루이스 최는 훗날 한국 여인과 결혼할 생각이다. 어떤 문화적.사회적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인으로서 나이 들어가는 자신이 아닌 아직은 젊고 어리기까지 한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위해서라 한다. 그것은 순수와 동심의 세계를 갈망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 두아이의 결혼은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어요. 남편이 눕기 전에는 어려서 생각하지 않았고 그 후에는 생각할 여건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어릴 때부터 늘 말해온 건 있습니다. 첫 관문은 반드시 '나'라는 것이죠. 사전에 철저히 심사해서 통과되면 자기들끼리 겪어보고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내가 좋다고 해서 저희들이 싫은데 할 필요는 없겠지요. 저희들이 좋아도 내가 싫으면 안되듯이...오랜 미국생활의 결론은 역시 같은 종족끼리 만나는 것이 행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늦은 결혼을 했지만 아이들도 결혼을 너무 서두르지 않았으면 해요 졸업하고 직장 가지고 모든 준비가 끝난 뒤 짝을 찾았으면 합니다."
 남편이 한국으로 국적을 바꿀 때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았던 순희 최. 남편의 사업 실패와 오랜 투병생활도 그녀의 강한 개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작지만 강한여장부인 그녀도 죽음과 삶의 냄새와 빛깔까지 맛본 '아들의 시간'에는 가슴이 저려온다. "지난 6백18일간이 그 아이로서는 가장 절실하게 인생의 맛을 본 식단들이

될 것입니다. 훨씬 커진 모습이 대견스러우면서도 입원실 복도 구석에 앉아 핸드북 컴퓨터를 두드리던 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내마음은 땅을 치고 울고 싶을 뿐입니다.  다시 일어서면 그때 끌어안고서라도 포즈를 잡아 줄께요. 남편은 나의 사랑이자 함께 고생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동지입니다."
 사진 촬영을 강력히 거절하는 그녀의 소망은 오직 하나,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남편이 없는 자신을 내보일 수 없다는 그녀에게서 남편에 대한 집착, 사랑의 깊이를 엿볼수 있었다.
 "가질 만큼 가지고 누릴 만큼 누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기도로서 남편이 다시 일어설 날만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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